이 작품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조선의 주류 통치 이념이었으나, 이제는 낯설어진 학문인 성리학을 기반으로 우주여행이 가능한 미래 시대를 다루고 있으며, 이는 지정 칠년, 개의 해에 시작된 역병으로 서역인을 뜻하는 홍모인, 색목인, 벽안인이 멸종되었다는 이야기로 짐작할 수 있는데, 그리하여 그들이 주창한 리 없는 우주 관점은 요동 끝에 제국의 학문 앞에서 스러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 제국의 시대에도 종교인과 철학자는 살아남아 변방에 들끓었으니, 그곳에서 출발한 우주배가 도사와 승니, 유생을 태운 건 항해를 보조하는 범용 그림자가 보기에도 범용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림자의 예상을 벗어난 존재인 유생은 더더욱 의외로 우주배의 신호 수집 장치를 이용하여 태허를 관측하고자 하는데…
위의 문장처럼 이 작품은 긴 문장에 줄바꿈도 없고, 심지어 강인공지능으로 볼 수 있는 그림자의 말은 큰따옴표조차 없어서 더욱 혼란스러운 가운데, 도사와 승니와 유생이 각자의 세계관을 나누기까지 하니 마치 띄어쓰기도 줄바꿈도 없이 빼곡히 적힌 고문서 같아 보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세계관에 걸맞는 연출이라고 생각한다면, 세로쓰기로 오른쪽부터 쓰이지 않음에 감사해야겠지요.
태허, 태음은 비록 설명은 다를 지언정 아무도 어원을 모르는 목성형 행성이라는 단어나 서로 끌어당기는 힘인 인력이 존재함으로 미루어 보아 블랙홀을 가리키는 말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유생은 어떻게 해석할까, 흥미를 가지던 차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자료를 수집하지도 못하는 줄 알았으나, 이곳에서처럼 그곳에서도 블랙홀이 순음임을 밝혀낸 유생은 망연자실합니다.
사공의 반응을 보고서야 저는 왜 블랙홀 주변을 항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도 여전히 블랙홀이 미지의 존재인지, 유생이 사비를 들여 관측해야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제국은 표준 학설을 세웠으며, 이에 어긋난 관측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해 왔던 거겠죠. 절대적이지 않다 해서 강제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이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지대한 충격이라도, 리 없는 우주에 사는 제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결과였습니다. 유생은 끌려가고, 계속 무언가 숨기는 게 더 있는 듯한 사공은 계속 변방을 떠돌며 제국의 눈과 손이 되겠거니 싶기나 했습니다.
흥미로운 우주관이었고 실제로도 그러길 조금 바란 터라 아쉬움이 있던 차에, 이 모든 설명을 단숨에 뒤집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실제로도 그 모든 설명을 한 인물들을 모조리 우주에 방출해 버리는 것이, 방출된 인물들에겐 미안하지만, 후련하기도 하더라고요. 우주에 리가 없으면 그림자와 인간을 구분하는 성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이제 그림자는 인간과 동등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리학에 관해 잘 알지 못해서 제겐 이 해석이 신선했는데, 인간에게 복속되지 않도록 인공지능을 모두 해방하겠다며 웃는 결말은 후속편을 암시하는 전형적인 영화 마무리 같아서 엉뚱하게도 재밌었네요.
성리학 SF 01이라는 소개가 단순히 해당 주제로 쓰인 이야기 중 첫 번째인 줄만 알았으나 2편의 일이 왜 일어났는가를 설명해 줘서 여러모로 세계관의 프리퀄 같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2편을 먼저 읽고 와서 이런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