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인가? 에이, 꿈이겠지. 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지만 모르는 척 덮어두는 엔딩에 감사하는 날이 올 줄은 이 작품의 전개만큼이나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변신』의 첫문장 패러디로 시작해서, 인간의 몸으로 로봇청소기처럼 청소하려는 엘리자베스를 말리느라 두문불출하고, 어떻게든 의사소통 수단을 얻어 일상을 유지하려는 전 인간, 현 로봇청소기인 정주은의 분투는 코로나19의 시대가 지난 지금에도 짠하기 그지없어서, 부디 엘리자베스가 인간 구실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흉내만이라도 그럴 듯하게 내주길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잘 해주는 건 좋은데, 열심인 것도 기특한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건 역시 씁쓸한 일입니다. 내가 저렇게 ‘못났’는지, 나름 친하다고 여긴 주변인들은 내게 그렇게 관심이 없었는지. 대인 관계를 혼자서 개선할 순 없는 노릇이지만, 이쯤 되면 여태껏 대체 어떻게 살아왔는가 머릿속이 복잡해지죠.
하지만 로봇청소기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가끔 번역앱을 켜서 어설프게 행동하는 인간 몸에게 지시하거나 청소를 하는 일뿐입니다. 정주은은 이제 정말로 인간처럼 행동하는 엘리자베스가 떠난 집에 홀로 남아 우주의 일부를 공허한 속으로 쓸어담으면서, 가까웠던 사람과 대화를 해도 채 5분이 이어지지 않고, 반대로 고유한 증거라고 여긴 추억조차 SNS와 사진첩, 메모들로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모습을 보며 인간이길 포기합니다.
그래요, 갑자기 로봇청소기와 몸이 바뀌는 게 어디 흔하게 생기는 일이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인간 정주은의 삶에 훌륭히 적응했습니다. 그러니 정주은도, 무심코 엘리자베스라는 여자 이름을 로봇청소기에게 붙인 업보를 받아들일 때가 된 겁니다. 이 우울도, 무력감도, 자기가 인간이었고 지금도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느끼는 고통이잖아요.
그러다 아득바득 쌓아온 모든 게 엘리자베스의 판단으로 인간의 몸에서도 무너진다는 걸 알았을 때, 태어난 세상에서 벗어나듯 정주은은 로봇청소기의 몸으로 다시 자기를 한정하는 공간에서 벗어납니다. 이 직전에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요… 로봇청소기가 빨라도 인간보다 빠르지 않고, 또 땅에서 들리기만 해도 이동할 수 없잖아요? 거기다 엘리자베스도 로봇청소기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단 마음이 있을 줄 알아서 ‘못될 건 또 뭔데?’라는 말에 정말 철렁했습니다. 믿었던 박 선배도 대체된 인간의 눈을 하고 있어서 사실 그간 대화한 모든 가전들이 예전엔 인간이었나도 싶었지만 오로지 여기서 벗어난다는 일념으로 달리는 정주은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도 혁명이지 않을까요? 인간도 그런 식으로 노예에서, 하위 계급에서, 피착취자에서 벗어났는걸요. 평생에 걸쳐 벗어나고자 했던 인간으로서 달리는 건 굉장히 짜릿했지만, 육체의 한계는 벗어날 수가 없단 게 인간과 로봇청소기의 내용물이 바뀐 글에서도 참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기상. 한 문단 전에 일어난 일도 모두 꿈인 것처럼 박 선배와 술술 대화하며 다른 곳은 다 살펴도 깊은 눈 속은 살펴보지 않는 정주은이 정말 벗어나고자 달렸던 정주은인지, 로봇청소기일 적 정주은이 정주은이고 또 엘리자베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쪽도 엘리자베스이고 또 정주은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엔딩은 리뷰를 쓰면서 깨달아 더 오싹하네요! 처음 읽고선 다행이야ㅠㅠ 꿈이었던 거지? 꿈인 거지?? 꿈이라고 하자! 눈 가리고 아웅 하듯이 리뷰를 쓰기 시작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한번 들자 다른 분들이 왜 공포를 언급하셨는지 드디어 이해했어요.
공포는 모든 게 밝혀지지 않았을 때 찾아온다는 어느 책 속의 말도 실감이 났습니다. 어쩌면 엘리자베스는, 이제 정말 정주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