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에 뭐하세요 바쁘세요 패러글라이딩 타러 와주실 수 있나요 감상

대상작품: 어떤 종말 (단편 소설) (작가: 거산,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2시간 전, 조회 14

“당신은 종말이 24시간 남았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이젠 사실 진부한 메시지이고 진부한 질문이다. 지구는 곧 사라질 것이고,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피할 방법도 없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당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의미를 갖는가. 이런 사고 실험은 자기계발서에도, 철학 수업에도, 그래서 하다못해 아포칼립스 관련 소설 주제로도 흔하게 등장하다 못해 클리셰가 되어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 뻔할 수 있는 질문의 답을 다소 참신하게 만든다.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지구 자체의 종말이라는 조건을 걸어놓고, 그 답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에게서 받아낸다. 그리고 그 답들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소설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다수의 답: 돌아가서 안기고 싶다]

소행성 충돌까지 남은 시간이 뉴스 자막으로 흐르기 시작하자, 지초도 요양원의 노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거창한 버킷리스트가 아니었다. 그저 자식이었다. 평생 등 돌리고 살았던 자식, 낳아준 부모 봉양을 귀찮아하던 자식이라도, 종말 앞에서는 딱 한 번만 안아보고 싶다는 마음. 지문을 갈아 없애면서까지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했던 노인들이, 정작 세상이 끝난다는 소식 앞에서는 그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뭍으로 가겠다고 나선다.

이 장면은 뭉클하지만 사실 예상 가능한 답이기도 하다. 종말이라는 극한 상황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은 대체로 ‘관계의 복원’이다. 화해, 포옹, 마지막 인사. 소설은 이 답을 충분히, 그리고 진심으로 그려낸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손주들의 재잘거림, “할미가 품에 꼬옥 안아 주구마” 하는 대사는 이 소설이 사람 감정을 다룰 줄 아는 손이라는 걸 보여준다.

 

[한 사람만 다른 답을 한다]

그런데 서 씨 할아버지는 배에 타지 않는다. 가족이 없어서, 라는 표면적 이유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다. 그는 평생 한쪽 다리를 잃은 몸으로, 걷고 싶다는 열망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그리고 종말이 온다는 소식 앞에서, 그가 떠올린 건 누군가의 품이 아니라 ‘하늘’이었다.

이 대목이 이 소설의 진짜 힘이다. 다수가 “관계로 돌아가겠다”고 답할 때, 단 한 사람이 “나는 나로 존재하고 싶다”고 답하는 순간. 서 씨에게 종말 전 24시간이란 화해의 시간이 아니라, 평생 유예해온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시간이다.

거대한 공포에 압도될 법도 했지만 서 씨는 종말이 다가올수록 안간힘을 쓰며 언덕을 향해 나아갔다. 바퀴는 얕은 경사도 오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죽을 힘을 다해 오르면 허망하게 제자리로 돌아가버리는 시지푸스의 돌과 같은 운명이었다.

팔이 후들거렸다. 숨이 턱까지 찼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다시 언덕을 올랐다. 밀려나면 또 다시 바퀴를 굴렸다. 이마에서 구슬땀이 떨어졌다. 웃옷은 이미 흥건했다. 답답할 정도로 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 씨는 조금씩 조금씩 언덕의 정상을 향했다. 해감내 풍기는 소금꽃이 등어리에 버쩍버쩍 피어났다.

휠체어를 밀며 세 시간 넘게 언덕을 오르는 장면은 가장 육체적이고 가장 처절한 장면이다. 종말이 오든 말든, 그는 오른다.

 

[패러글라이딩이라는 답이 이상하지 않은 이유]

서 씨가 종말 직전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나는 선택을 한 것은 죽음이나 멸망에 대한 공포, 또는 현실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정직한 답이다. 평생 걷지 못했던 몸으로, 평생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마지막 순간에라도 맛보겠다는 것. 관계도 없고, 화해할 사람도 없는 그에게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오직 자기 몸, 자기 존재로 수렴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외롭지만 쓸쓸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소설 전체에서 유일하게 해방감과 성취를 주는 장면이다. “육신의 자유로움을 맛보고 싶었다. 오직 그 뿐.” 이라는 문장은 이 소설이 종말이라는 소재로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한다.

 

[이 소설이 남기는 질문]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라면 저 마지막 24시간에 배를 탈 것인가, 아니면 언덕을 오를 것인가. 대부분은 아마 배를 택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끝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은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소설은 그 답 하나만 정답으로 두지 않는다. 서 씨의 선택을 통해, 종말 앞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반드시 ‘누군가와의 관계’만은 아닐 수 있다는 걸, 때로는 평생 유예해온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다. 노인들의 사연이나 뉴스 속보 장면이 다소 설명적으로 나열되는 부분들은 감정의 밀도를 조금 흐트러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을 오르는 서 씨의 마지막 장면 하나만으로 이 소설은 제 몫을 다한다. 왼쪽 빈 바짓가랑이가 노을 진 하늘에서 자유롭게 펄럭이는 마지막 이미지는, 종말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룬 소설치고는 드물게 아름답고 홀가분한 여운을 남긴다.

 

그러니 다시 한번 묻는다. 종말에 뭐 하세요, 바쁘세요, 패러글라이딩 타러 와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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