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힘을 이해하고 있는 작품, 그러나 아쉬운 마침표가 흠? <척안재담> 공모(비평)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척안재담(隻眼才談) (작가: neptunuse, 작품정보)
리뷰어: 하얀소나기, 10월 16일, 조회 50

<이 리뷰는 옳고그름을 따지는 오답노트가 아닙니다. 일개 독자의 주관적인 감상에 불과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1) 설화가 주는 힘이란….

 

“옛날 옛적에……, 어느 마을에 이름 모를 선비가 살았는데…….”

 

다음 구절은 우리 설화에서 가장 유명한 도입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옛이야기’를 시작하는 도입부는 큰 차이가 없으나, 우리나라에서 전래되는 ‘옛날 옛적에’라는 구절만큼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 구절만으로도 언젠가 읽은 고전 속의 한복을 걸친 선비와 초가집을 떠올리며, 마치 조부모의 무릎에 앉아 귀를 기울이는 듯한 그리움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표현으로나마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모든 것은 ‘설화’ 곧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의 힘에서 비롯된다.

 

우리 문화에서 전래되는 설화는 시대적으로 까마득히 멀지만, 그 거리감을 좁혀가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시대도 가정할 수 없는 ‘옛날’을 가정하면서도, 관습적인 이미지로 익숙해진 ‘고전’의 이미지를 제시하며,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척안재담>은 그런 ‘설화’의 힘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소설이다.

 

눈을 한쪽 잃은 선비 ‘외눈이 박씨’는 각종 요괴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서리태’라는 요괴사냥꾼이 등장하며, 압도적인 힘으로 요괴들을 무찌르며 민간의 평화를 가져온다. 전형적인 ‘구전설화’에 가까운 이야기다.

 

어쩌면 단순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설화’의 힘은 무척 훌륭한 방식으로 응용되고 있다.

 

 

2) 작가가 이해하는 이야기의 속성이란…

 

필자는 이 소설을 두 가지 키워드로 평가하고 싶다.

 

첫째는 ‘거리감’이다.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설화’ ‘고전’과 흐름을 같이 한다. 입으로 전해 내려온다는 것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는 시대의 단면이며, 현대의 우리가 경험하지 못 한 세상의 흔적이다. 우리가 구전으로 익히 들었기에 친숙함이 적지 않지만,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손에 닿을 수 없을 만큼 머나먼 거리감을 가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가깝고 친숙하다고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그 이미지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소설 속에 응용된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화자 ‘박씨’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그에게 관객은 모든 민중이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선비, 동네에서 모여든 아이들, 심지어 그늘을 내어준 나무와 옷자락을 스쳐가는 바람까지…….

 

그러한 화자의 성격은 이 소설에서 응용되는 ‘설화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누구보다 가깝게 접근하며, 그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들마저도 귀를 기울이고 다가갈 수 있는 거리감을 좁혀준다. 액자식 구성으로 들어가는 독백체 또한, 소설보다 박씨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효과를 주게 된다. 어떤 기술적인 능력이 아닌, 소설 그 자체의 이미지와 테마로 이뤄낸 성과라는 점에서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둘째는 ‘인간’이다.

 

외눈이 박씨의 이야기는 ‘요괴’라는 초월적인 존재와의 사투를 다루면서도, 그 안에 담긴 주제는 무척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백성들은 때로 거대한 악의 시달리고, 영문도 모른 채 재난을 당하는 피해자의 위치에 서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들 스스로 ‘요괴’라는 악을 만들어내는 실수를 범하고, 한편으로는 그런 ‘요괴’들로부터 안식을 찾는 무모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무언가에 휘둘리는 것이 당연한,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인간’ 이상의 누군가를 바란다는 열망이 나타나곤 한다.

 

그렇기에 이야기에 등장하는 ‘서리태’는 상대가 없는 요괴사냥꾼이다. 그 어떤 요괴든 그의 손에 걸리며 대가를 치르며, 때로는 인간의 실수에서 비롯된 재난을 해결하며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구원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이런 ‘인간’의 이야기에 특별한 주제는 보이지 않는다. 존재에 대한 두려움,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한 욕망 따위가 대부분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기에 ‘서리태’와 같은 인물의 등장을 강렬하게 바라며, 그것은 곧 어려운 삶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동경’으로 그려진다.

 

그런 그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교훈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 교훈을 ‘용기’라고 부르고 있다.

 

그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로 통일되는 이 소설이야말로, ‘설화’라는 틀을 가장 잘 이해하고 구현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침표는…

 

앞서 ‘이야기’의 속성을 응용하는 방식에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아쉽게도 이 소설에서 보였던 아쉬운 마침표가 이 속성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름 아닌,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백의태자’ 에피소드에서 보이는 문제점이었다.

 

 

 

4) 귀를 기울이는 독자로서…

 

다행스러운 것은 독자들은 이미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열네 편을 함께했던 독자들은 수많은 감동과 공감을 곱씹었으며, 무릎을 접고 눈을 반짝이는 한 명의 ‘관객’이 되어 있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외눈이 박씨가 들려주는 ‘서리태’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로서, 언제나 귀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둔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