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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혁이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직도 주혁이 어머니의 연락처가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었다니, 메시지를 보고 너무 놀라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긴, 요즘엔 핸드폰을 바꿔도 새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일일이 적어 연락처를 옮기지 않고 통째로 복사 붙여넣기를 해버리니, 핸드폰을 바꾸면서 연락처를 정리한다는 것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말하니 요즘 흔히 말하는 ‘아재’라도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등학교 때 저장해뒀던 게 아직까지 남아있었다니… 대학교에 가지 않고 곧바로 취업한 뒤로 너무 일에 치여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혁이 어머니로부터 온 메시지는 간단한 것이었다.

‘기훈아, 갑작스럽게 연락해서 미안하구나. 다른 게 아니라, 주혁이가 너하고는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바쁘지 않다면 잠시 들러줄 수 있겠니? 이렇게 막무가내로 부탁을 하게 되어 미안하구나. 전화 주렴.’

거절하기 어려운 어조의 부탁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하는 저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거절할 여지를 주지 않는 절박함과 단호함이 녹아있는 메시지였다. (회사에서 비즈니스 메일을 주고받는 게 일상이다보니, 이런 분석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지금 당장 전화를 걸어야 할까? 하지만 점심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긴 통화는 곤란했다. 퇴근하고 나서 전화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분 일초가 급할 주혁이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면, 메시지를 보고도 못 본 척 미루는 게 조금 뜨끔했지만, 시간에 쫓겨 심각한 이야기를 얼렁뚱땅 넘기고 경솔한 결정을 하고 싶진 않았다. 사람은 촉박할 때 판단력이 흐려지는 법이니까. 이런 건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했다.

나는 아직 많이 남은 담배를 재떨이 바닥에 비벼 끈 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주혁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고등학교 동창들의 입을 통해 대충 알고 있었다. 동창들과 연락을 자주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었지만, 다들 주혁이 일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이) 곧바로 내게 알렸다. 나는 주혁이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아니, 주혁이의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선생님도 주혁이가 안 보이면 나에게 와서 주혁이 어디 있냐고 물을 정도로, 딱 붙어다닌 그런 사이.

주혁이와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주혁이의 첫 인상은 범생이였다. 그것도 일반 범생이가 아니라 초특급 범생이. 미국 영화 같은 걸 보면, 안경 쓰고 공부 좋아하고 잘 하는 학생은 너드(nerd)라 불리며 양아치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물론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문화적 편견일 수도 있었다. 내가 미국에 가서 살아본 건 아니었으니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건 왕따를 당하지 않을 방패 같은 것이었으니까. 선생님한테는 수업시간에 잠 좀 깨웠다고 목에 핏대 세워서 바락바락 대드는 놈들도 공부 잘 하는 애들은 건들지 않았다. 모든 선생님의 관심이 쏠려있는 학생. 그것도 일반고에서 대학에 잘 갈 것 같은, 그래서 학교의 위상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우수한 학생. 그런 학생을 건드려서 선생님들, 더 나아가 학교의 기대를 망쳐버린다는 건 대가가 큰 행동이었다. 그래서 왕따는 왜소하거나 뚱뚱하면서도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그런 학교의 태도가 옳았는가 아닌가를 떠나 그런 분위기였던 건 확실하다. (지금은 바뀌었으려나) 그런데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너드들은 (단체로 괴롭힘을 당하긴 하더라도) 너드들끼리 모여 서로 친구가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국에서 초특급 범생이는 괴롭힘을 안 당하는 대신 친구도 없었다. 주혁이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주혁이에게 다가가는 반 학생이라고는 학원 수학 숙제를 물어보거나 수학 수업 전에 급하게 답이랑 풀이법 알려달라는 애들뿐이었다.

주혁이는 소위 말하는 수학 천재였다.

내가 살면서 ‘천재라는 게 저런 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건 주혁이가 처음이자 (지금까지로서는) 마지막이었다. 그런 애가 어째서 이런 코딱지 만한 평범한 동네의 일반고에 온 건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그리고 TV에서 봤던 수학 천재처럼, 주혁이는 대답 외에는 말도 거의 없었고, 또 사교성도 없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자 하는 욕구자체가 안 보였었다. 자기를 찾아오는 아이들이 모두 특정한 목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다가온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 이젠 그런 것에 익숙해졌다는 듯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기계적으로 원하는 걸 내어주고, 미련 없이 떠나는 반 학생의 뒷모습을 쓸쓸한 눈빛으로도 보지 않고 다시 수학 문제 푸는 것에만 열중했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인간관계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처럼. 아니, 애초에 자신에게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인간관계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단정지은 것처럼. 자발적인 것처럼 보이는 단념.

동정심이었는지, 호기심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뭐에 홀린 듯이 그런 주혁이에게 다가갔다. 수학은 좋아하지도 않았고 (아니, 혐오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공부도 잘하지 못 했던 나였지만, 무작정 다가가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혼자 떠들며 두서 없이 말을 걸었었다. 하지만 내가 수학에 관심이 없었던 게, 그래서 수학이 아닌 이야기만 했던 게 주혁이 마음을 흔들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 주혁이는 이런 상황이 낯설었는지 반쯤 경계를 하며 거의 대꾸도 하지 않았었지만,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내가 와서 (주인이 일하고 있을 때 다가와서 훼방을 놓는 고양이처럼) 수학공부를 방해하며 잡담을 꾸준히 늘어놓자, 점차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나에게 친밀감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그제서야 주혁이가 얼마나 외로운 아이였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꾹 참아오며 내색하지 않았던 외로움이 나로 인해 터져버린 것이다. 지금도 방과후에 집으로 같이 돌아가던 길에 주혁이가 뜬금없이 울음을 터뜨렸던 게 기억난다. 자기는 학교 다니면서 영영 친구라는 건 못 만들 줄 알았었다며, 나랑 같은 반이 되었던 게 자기 인생에서 최고의 행운이었다는, 뭐 그런 (지금 생각해보면) 낯 뜨거운 얘기. 그리고 그 즈음엔 나도 주혁이를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된 상황이기도 했고.

주혁이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건 주혁이 본인뿐만 아니라 주혁이 어머니에게도 무척 기쁜 일이었던 것 같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홀로 주혁이를 키우고 계시던 주혁이 어머니는 주말에 나를 불러내 고기까지 사주시며 앞으로도 주혁이와 친하게 지내달라고 내 손을 꼭 붙잡고 부탁하셨다. (예상치 못 한 과분한 대접에 몸 둘 바를 몰라 눈치 보며 먹었던 고기는 결국 체해서 집에 와서 다 토해버렸지만…) 그리고 주혁이 어머니께서 내 핸드폰에 본인의 번호를 저장하셨다. 주혁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자신에게 전화 달라고. 그리고 정말 고맙다고.

그랬던 주혁이와는 3년 동안 줄곧 붙어다니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헤어져버렸다. 나는 대학에 가지 않고 바로 취업, 수학천재였던 주혁이는 S대 수학과 진학. 각자에게 맞는 길로 간 것이었다. 나는 공부가 아니라 일을 빨리 해서 돈을 모으고 싶었고, 주혁이는 수학, 그것도 정수론(number theory)을 연구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했으니까. 졸업하고 나서 한동안은 종종 연락도 하고 만나서 밥도 먹고 그랬지만, 나는 일로 바빠지고 주혁이는 학업으로 바빠지다보니 결국 거의 연락도 못 하고 만나지도 못 한 채, 새해 인사조차 까먹고 서로 못 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와중 그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주혁이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3년쯤 된 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세 달 전, 주혁이의 지도 교수가 대학원생 셋을 죽이고 본인도 자살해버린, 대한민국 대학교 역사상 최악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현장에서 주혁이는 다리와 팔에 중상을 입은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었고, 곧바로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아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져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