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을 좋아하는가? 다들 살면서 캠핑을 한번 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가족이랑 했든, 친구들이랑 했든, 연인이랑 했든 간에. 코로나가 유행한 이후, 캠핑족과 캠핑 관련 산업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고 한다. 일행끼리만 온전히 즐길 수도 있고, 혼자 즐길 수도 있다는 장점과 밀폐된 공간이 아닌 야외에서 놀 수 있다는 장점때문에 인기를 끈 것으로 보인다. 그 인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지, 이제는 심심찮게 캠핑카를 끌고 다니는 차들도 볼 수 있다. 그만큼 캠핑장도 많이 늘었고.
사실 나는 캠핑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자연친화적인 면모를 가졌으면 좋겠다며 몇 번 데리고 가주셨으나, 불편한 잠자리와 넘쳐나는 벌레들로 오히려 더더욱 싫어하게 되었을 뿐이다. ‘멀쩡한 건물을 두고 왜 길바닥에서 노숙을 해야 하는가?’가 바로 내 주된 불만이었다.
그러나 실제 노숙에 비하면 캠핑은 그야말로 안락한 곳에서 생활하는 셈이다. 딱딱한 길바닥에서 얇은 담요나 박스 하나로 추위를 피해 살아가는 삶은 감히 내가 상상도 못할 어려움일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노숙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몇 편 보았는데, 그 실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그 영상은 고스란히 이 소설에 녹아있는 듯하다. 노숙인들이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그들의 시선에 맞춰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낸 덕에 수월하게 읽어내릴 수 있었다.
평범한 삶을 살다 거액의 병원비로 빚더미에 앉으면서 노숙생활을 시작하게 된 ‘나’는 아직도 자신이 노숙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벌써 수년을 이러고 살았지만, 난 여전히 내가 길바닥에서 먹고 잔다는 사실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위 노숙자로서 응당 받아들여야 할 모든 순간들이 치욕적이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사실 노숙에 쉽게 적응하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날 때부터 노숙인이었던 사람은 없었을테니, 이전에 그들이 살았던 삶을 그리워하고 현재를 힘겨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하루하루를 부지런히(?) 보낸다. 일어나자마자 열심히 구제금을 받기 위해 예배를 드리러 가고, 무료 급식소에서 허기도 채우며 길에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단지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만이 평소와는 다를 뿐이다. 자신만 보면 폭력을 행사하던 무리도, 자신을 유혹하려고 애쓰던 창녀도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지나쳐버린다. 이를 보면 소설의 결말에서 보여줄 반전이 무엇인지 짐작이 된다. 정작 ‘나’는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내가 노숙인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지만.
하루종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던 ‘나’는 외로움을 느낀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노숙인도 사람인 이상, 그들만의 커뮤니티에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나’는 말상대가 있었으면 하고 소원한다.
역시 그렇다. 마주치면 인사라도 나눌 상대가 필요한 거다. 말상대가 필요하다. 친구가 필요하다. 어울릴 무리가 필요하다.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 무시하고 멸시한다 해도 이렇게까지 상처를 받고 불안하거나 마음 쓰이지 않을 것이다. (중략)
그렇다. 역시 친구를 만드는 것 또한 주제파악이다. 보잘것 없는 인간일수록 똘똘 뭉쳐야 사는 거다. 나는 그런 보잘것 없는 인간 중에서도 제일 밑바닥이다. 그런 주제에 여태 어쩌자고 이렇게 홀로 살아갈 생각을 했단 말인가?
‘나’는 내일이면 자신을 괴롭히던 패거리한테도 인사를 건네볼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제목과 딱 맞아 떨어지는 ‘이상한 하루’를 보낸 ‘나’는 그저 허탈한 웃음만을 흘릴 뿐이다. 앞으로 ‘나’는 어떤 행보를 취하게 될까? 난 그게 매우 궁금했는데, 끝까지 그건 밝혀지지 않아 좀 아쉬웠다. 사실 그게 밝혀지면 결말이 주는 여운도 사라지니 안되겠지만.
상상할 수 있을 법한 반전으로 끝났지만,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독백을 지켜보는게 더 흥미로웠다. 독백을 읽으며 주인공이 느꼈을 법한 감정, 나아가서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읽을 수 있어 좋았던 작품이었다. 역시나 외로움은 사람을 좀먹는다는 것과, 내가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든 간에 사람은 어울리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구나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