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을 짬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야근이라는 섬뜩한 일상을 아는가. 그중 하루는… 나는 분명 10시에 출근했는데 11시가 넘어서 퇴근하고야 마는 엄청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그런 날엔 아무래도 엽편이 좋다. 지옥철에 끼어서 호로록 읽기에도, 머리가 마비되어버린 채로 살짝은 넋놓은 상태로 후루룩 훑어보기에도. 이 소설 <부패>는 딱 그럴 때 읽기 좋은 소설이었다.
시작은 이렇다.
– 1인 가구의 가장인 황수기(32) 씨가 자신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 생긴 3mm 크기의 흑갈색 반점을 발견한 것은 9월 21일(목)의 일이었다.
나는 어쩐지 이 첫문장이 매우 귀엽다고 생각했다. 섬뜩한 제목인 <부패>와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문장이라니… 단숨에 읽기 시작했고 마지막 문장인 <그는 그럭저럭 행복했다>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 코미디의 형태를 취하면서 산뜻한 결말을 맺었다. 짧은 분량 안에 기승전결이 있었고, 실제처럼 느껴질 만한 묘사력이 뒷받침되었으며, 다소 건조한 듯하게 ‘황수기씨’의 일상을 관조하는 문투가 전체 소설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간단하게만 이 소설에 대해 설명하자면 황수기 씨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 생긴 흑갈색 반점은 다름 아닌 ‘기생 곤충’이었다. 서서히 커가면서 왼손 약지를 집어삼키고 약지의 자리를 차지한 그것은 손목을 지나 팔뚝으로, 황수기씨의 몸을 야금야금 파먹기 시작한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치료를 하지 않고 무얼 했느냐고? 그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애인과의 기념일을 맞아 데이트를 해야했고, 회사와 집을 오가는 것만 해도 지쳤다.
더구나… 자그마한 곤충 하나 잡으려고 손가락을 ‘절단’ 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은 황수기씨를 병원에서 멀어지게 했다. 딱히 아픈 건 아니었기에 장갑을 끼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지는 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기생곤충은 연인과의 결별을 선사했고, 해고를 선물했으며 종국에는 황수기 씨를 ‘증발’하게 만든다.
어라 잠깐만… 이거 이야기 다 말해주는 거 아니냐고? 맞다.
알고 봐도 재밌다. 실은 첫 문장을 보고 기생곤충이 딱 나온 순간 우리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아 이거 기생곤충이 뭔짓 하겠는데? 기대는 배반하지 않는 소설이다. 다만, 기대 그 이상의 ‘재미’가 있다. 기생 곤충이 살을 파먹으며 커져나가는 끔찍한 모습은 소설 내에선 현실로 그려지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크게 호들갑 떨지 않으면서, 상당히 젠틀한 말투로 그 모든 걸 ‘생생하게 전달하는 미학’이 있다. 그 ‘미학’을 즐기는 게 이 소설을 클릭해서 봐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다.
하나 더 붙이자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 기생 곤충이 ‘기생 곤충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이 바빠서, 먹고사니즘에 빠져서 내가 무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우리네 삶이니까. 내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다가 멈춰서 ‘흠칫’하고서는 공허함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헛헛한데 왜 헛헛한지 모르는 때도 있을 것이다. 분명 잃었는데 ‘무얼 잃었는지’ 모를 땐 그 빈 공간에 [나 자신]을 넣으면 된다.
나 역시 최근에 황수기 씨와 비슷했다. 면역력이 바닥 났으며 몸이 골골 거리는 상태로 일에 쫓기다가 어느 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뭐였지?] 그날 나는 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꽤나 울었다. [해야만 하는 것]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우리를 자화상 거울처럼 바라보게 하는 이 소설의 결말에 <그는 그럭저럭 행복했다>여서 좋았다.
행복이란 게, 거창할 수가 있나. 기쁨이란, 행복이란 ‘찰나에 반짝이는 섬광 같은 감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요즈음 한다. 한껏 취해 있다가도 일상으로 복귀해야만 하는… 허나 바쁜 와중에도 순간순간 떠올라서 나를 웃게 하는 게 ‘행복’이라는 감정이라면 굳이 쫓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도, 한다. 그저, 지독하리 만치 버거운 어느 날 어느 때에 꺼내 볼 만한 몇 가지 기억과 감정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것뿐. 황수기 씨는 많은 걸 잃었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육체마저 잃었지만 괜찮았을 것이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의 ‘육체를 상실했을 것’이므로.
육체를 잃고 그는 비로소 ‘자유해’ 졌다. 나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다. 밥벌이를 하고 돈벌이를 해야만 하는 인간세상의 비극은 ‘육신’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 한 몸 먹여살리기 위해 우리는 매일 일을 하고 이따금 쉰다. 육신이 없다면 그저 유유히 먼지처럼 떠 다니면 그뿐이다. 다만, 육신이 있는 것의 축복이라면 오감과 감정이라는 데 있다. 육신이 없다면 ‘느낄 수 없’다. 황수기 씨는 이제 ‘그 무엇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먼지처럼 배회하다가 어느 날 어느 때에 생각과 관념도 사라져버린 채 티끌의 먼지가 되어버릴 지도.
그렇대도, 상관 없다.
그는 이미 지쳤고 지침을 느끼지 못할 만큼 스스로와 멀어져 버렸으니까. 소설의 내용을 서술하기 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느낀 바를 주절주절 떠들어 본 것은 이 소설의 또 하나의 <미학>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상황, 생각을 비추어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구태여 아쉬운 점을 찾으라면 [황수기씨가 장갑을 벗고 자신의 손을 점령하는 벌레를 바라보는 순간]을 조금 길게,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관찰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도 물론 완결성 있지만 주인공 [황수기]가 [그럭저럭 행복했다]라는 말을 하는 게 조금 더 와닿으려면 연인과 헤어진 이후에 침대에서 손을 관찰하는 순간 그의 표정이나 제스처, 생각 그리고 해고 당한 이후에 거울을 바라볼 때 그의 표정이나 혼자 있을 때 벌레와 어떻게 지내는지 등에 대한 내용이 좀 더 보여졌다면 황수기라는 인물에 조금 더 이입하며 좀 더 다양한 각도로 글을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말 그대로의 아쉬움’ 외에는 없다.
한번 스윽 읽어보도록. 그리고 생각해보면 좋겠다. 나는 지금, 그럭저럭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