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은 진실에 대한 투쟁으로 발본해 또 다른 커다란 베일에 감싸이는 비극적 삶의 구조를 표상한다. 현상이라는 베일 뒤에 가려진 본질,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설계, 개념 너머의 물자체, 현상계 너머의 실재계, 뭐라고 부르든 어떤 진실을 향한 투쟁은 다방면에서 실천되는데, 실천이 맞닥트린 장소에 더욱 큰 베일이 드리워지는 과정이 바로 음모론의 구조다. (한 이야기의 후기에 삽입된 더 방대한 가짜 스토리, 미로의 탈출구처럼 가장한 미로….) 음모론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일부 세력이 별도의 하위그룹을 마취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음모론은 모든 이의 개별 경험에 선사된다. 경험이란 지배적인 서사가 각축하는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인식의 지평을 그 지배 속에 수감시키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어학 개론>은 그동안의 숱한 지식 텍스트를 패러디한 방식의 메타 소설들이 가닿지 못한 범주까지 치열하게 탐구한다고, (그저 철지난 90년대식 성적 자유주의의 농담이나 지껄여대는 박형서의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따위와 비교하면 이 지점은 극대화되긴 한다.) 인류학적 서술을 완벽에 가까운 경지로 모사함으로 인류학적 서술이 지닌 물화적 본질이 폭로되고, 어떤 태도, 형식, 문장, 용어 사용이, 학술의 정식 공론장에서 승인되고 탈각되는가, 어떤 내용상의 설계가 학술적 서사로 읽히게 하는가를 폭로한다고. 그렇게 이 소설은 포스트 보르헤스 문학류들이 갖는 “공인된 지식에 대한 허탈”을 폭로하고자하는 연속된 흐름에 올라타며, 진정한 지식 권위를 탈각시키는 후계자로 자리매김한다고.
아니다. <인어학 개론>은, 인류학 개론서를 패러디하며 지식의 권위를 일방적으로 냉소하기 위한 텍스트가 아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스스로 한계점으로 묘사하며 닫힌 텍스트가 아니라 열려 있음을, 인간과의 상생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개진하려는 부분을 상기하자. 이 소설은 승인된 지식의 절대화를 패러디함 아니며, 그저 구성적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함유시켜, 텍스트 내부에서 다른 가능성을 배치한다. 현실 역사의 기반째 녹여버리는 줄 알았던 학술적 형식은, 결말에 이르러 인류학을 공론장에 위치한 하나의 줄기로써만 한계 짓는다. 인류학적 서술의 물화(특히 사회생물학적 물화)가 내재적으로 비판되고, 수많은 지식의 교류와 보완으로 구성되어야함을 선언한다. 이 선언으로부터 우리는 픽션의 서술이 가져오는 위험성에 대한 경종과 지식이 갖춰야할 태도를 동시에 경험한다. 명확한 픽션으로 지정된(브릿G라는 명백한 하위문화 픽션 사이트 게시된) <인어학 개론>의 메타적 사고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픽션적 서술에 기대를 갖는 그 어떤 독자들의 튕겨나감, 기존 소설의 서사가 가지는 정동의 의도적 삭제, 매력적인 픽션적 서술의 반대항에 위치한 건조한 서술… <인어학 개론>에서는 심지어 그간 논픽션 패러디 소설들이 가지는 풍자적 유머와 조크마저 건조한 학술적 서술로 형해화된다. <인어학 개론>은 기존의 픽션이 지닌 매력성을 탈피하는 동시에, 세계를 일의적 관점으로 식민화하지 않는 정직한 학술적 서술이자, 창작된 허구임을 스스로 노출하는 텍스트로 완성된다. 그렇게 지배적인 서사의 허점을 드러낸다. 우리의 세계를 비극적인 음모론적 구조를 살펴보라. 진실을 향한 투쟁에 끝없는 끼어드는 가짜 텍스트는 매력적인 이야기의 형식을 띠고 황금빛으로 번쩍이지 않았던가. (가령 온갖 미디어에 떠돌며 부족주의를 가속화하는 대안 현실은 확실히 그렇다.) 포스트 보르헤스류의 작가들이 그저 공인된 지식에 대한 기초적 주제를 재생산할 때, <인어학 개론>은 음모론적 매력에 침몰된 세계의 서사를 지식으로 돌파한다.
덧붙이며.
소설 창작자와 비평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것은 이제 없다”라는 비겁한 변명들이 판을 치고 있다. “새로움 없음”에 대한 선언은 모든 문학적 시도를 종식시키고 문학장 속의 당사자들을 냉소주의로 이끈다. 무조건적으로 소설이라는 매체를 물화시키고자 하는 인식들이 귀 아프게 괴롭히며, 창작자들을 시니컬하고 어설픈 염세주의자의 무리 속에 내던진다, 아직 시도해보지 못한 이야기와 형식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에도, 그것은 이미 지나간 시대 어느 한 귀퉁이 속에서 누군가 재현해놓은 방식이라며, 그저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새로움에 대한 가치를 조롱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새로움에 대한 가치 추구는 철지난 낡은 창작자의 방식인가?
<인어학 개론>을 접한 일부는 이렇게 재단할 것이다. 이미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글쓰기는 예전부터 많이 우려먹지 않았냐고. 토마스 드 퀸시, 에드거 앨런 포, 존 C 발라드, 프란츠 카프카,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보르헤스, 알렉산더 충식 핑클맥그로, 스타니스와프 렘, 이규락과 같은 걸출한 작가들이 실존하는 논문이나 강의록, 학술서를 표방하는 글로 독자들을 속여오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건 사실이다. 논픽션-픽션의 경계 흐리기는 현대에 이르러 보편적인 흐름이 되었다. 매뉴얼 괴담, 파운드 푸티지, 오토픽션, 페이크 다큐 … 전부 그 가지에서 뻗어 나왔다. (심지어 앨리스 숙자 이노우에와 같은 비평가는 이 모든 형태의 픽션에 대해 포스트 트루스 시대를 앞당긴 구조적 산물이라고 비웃기도 한다! 으, 끔찍해.) 하지만 이 같은 정의내림은 수많은 개별 소설을 개념적 객관으로 집합함으로 개별 작품을 일반화한다. 일반화는 때때로 시도 자체를 선험적으로 차단한다. 실험이 창출할 수 있는 차이와 의미, 영향력조차 원천봉쇄시킨다. <인어학 개론>은 감히 같은 실험을 하고 있으나 새로움을 창출해낸다. 이 같은 텍스트를 지속 창출시키기 위해서라도 창작자들은 냉소의 잠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