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리 이세계의 던전으로 보는 비고츠키의 인지발달이론 비평

대상작품: 퍼리행성의 SSS급 부동산이 되었다 (작가: 녹차백만잔, 작품정보)
리뷰어: 드리민, 5월 25일, 조회 34

이 리뷰는 2024년 1월 8일 연재분인 11-8. 외교관 고블렌 / 11-9.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 11-10까지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죠. 기대하고 들어왔는데 초장부터 반겨준 건 고블린, 아니 녹도깨비라 실망했습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이야기를 덮을 수는 없었던 게, 실망할 겨를도 없이 광기 어린 개그의 펀치가 계속되기 때문에 웃으면서 계속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 개그만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고블렌의 탄생을 애틋하게 지켜보는 디자이어의 시선은 독자인 저 역시 가슴이 시큰하고 따뜻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던전 그 자체이자 신령인 디자이어, 그리고 그 던전에서 살고 있는 식구들의 성장과 발달을 근간에 두고 있습니다. 성장과 발달이란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성장은 생물학적 영역입니다. 키가 자라고, 몸무게가 늘고, 이가 나는 것처럼 신체 장기들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발달, 특히 인지발달은 성장과 더불어 지성적인 존재가 여러 상호작용을 통해 지성적인 존재답게 자라나는 과정입니다.

발달의 세부적인 정의와 과정은 여러 학자가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 제시한 바 있습니다. 교육심리를 적게나마 공부한 제 짧은 식견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비고츠키의 인지발달이론을 중점적으로 채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고츠키의 인지발달이론은 언어 사용과 상호작용을 중시합니다. 자신보다 인지가 더 발달한 누군가와 상호작용하고 도움을 받음으로써 더욱 높은 차원의 인지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3-1. 우리 애는 많이 모자라지만 착한 고블린이에요에서부터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디자이어와 고블린들은 서로의 행동이나 현상을 관찰하기도 했고, 렌과의 상호작용은 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결」을 통해 보다 분명한 언어 표현과 소통이 가능해진 시점에서 상호 이해와 발달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카밀이나 아르르 우르와의 대치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고, 위협적인 아사르다의 존재와 고블린 왕국의 비밀을 공유하는 것, 더 나아가 아르르 우르의 무리를 던전에 융화시키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비고츠키의 인지발달이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타인과의 언어적 상호작용만이 아닙니다. 비고츠키는 혼잣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혼잣말을 미숙한 것으로 여겼던 인지발달이론의 창시자 장 피아제와 달리, 비고츠키는 혼잣말을 통해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조절하고 인지를 발달시킨다고 보았습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작품의 형식을 차치하더라도, 디자이어는 혼잣말을 꽤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정확하게는 머릿속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빛을 발하는 대표적인 장면이 5-2. 연쇄입니다. 디자이어는 우발적으로 얻어진 힌트와 그동안 고블린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얻었던 정보들을 토대로 자문자답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실을 꿰뚫죠. 물론 디자이어 본인은 본래 세계에서 어른이었으니 머리 회전이 빨랐겠지만, 아무것도 몰랐다는 점에서는 고블렌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인지발달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라고 볼 수 있겠죠.

 

비고츠키의 인지발달이론에서 마지막 특징은, 근접발달영역과 비계설정(스캐폴딩)입니다. 근접발달영역이란 아동의 실제적 발달 수준과 교사의 도움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잠재적 발달 수준 사이의 거리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덧셈을 할 줄 아는 초등학교 2학년에게 덧셈이란 실제적 발달 수준입니다. 2학년 1학기 수학교과서에서 처음 등장하는 곱셈은 선생님과 함께 배워야만 터득할 수 있는 잠재적 발달 수준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덧셈과 곱셈 사이의 수준 차이가 곧 근접발달영역이 됩니다. 인지발달이란 이 근접발달영역에 도달하고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이루어지죠.

이를 위해서는 교사의 가르침, 협동학습과 같은 적절한 도움이 필요한데, 이것을 비계설정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계란 본래 건축에서 사용하는, 높은 곳으로 쉽게 이동하고 작업을 돕기 위해 설치했다가 작업이 끝나면 해체되는 임시 구조물입니다. 아동이 근접발달영역에 도달하여 충분한 인지발달을 이루면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으니 더 이상 교사의 도움이 필요 없는 것처럼요.

9-3. 개떡같이 지어내도 찰떡같이에서 다섯째, 곧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을 받게 되는 고블린이 이에 적절한 모습을 잠깐 보여줍니다. 다섯째는 본래부터 디자이어를 상징하는 손 조각상을 만들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과 관련된 인지능력이 뛰어나게끔 타고났다고 볼 수 있지요. 다섯째의 그러한 능력이 곧 실제적 발달 수준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통발을 제작하는 능력을 얻는 것은 잠재적 발달 수준입니다. 여기에 디자이어가 비계를 설정합니다. 지나가듯이 설명한 통발의 구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디자이어가 깔아준 비계를 토대로 통발의 견본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단점과 개선 방안까지 제시합니다. 비계설정을 통해 근접발달영역에 성공적으로 도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인지발달이 촉진됨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비고츠키는 자신의 인지발달이론에서 언어와 의사소통을 중시했습니다. 비계설정에서도, 교사가 아동을 충분히 격려하고 긍정적으로 피드백해줄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이러한 점에서 디자이어와 고블린들, 그리고 다른 던전 식구들과의 관계는 비계설정과 인지발달에 아주 좋은 환경으로 갖춰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를 정복한다는 것은 디자이어가 이야기했듯, 모든 것을 욕망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의 무한한 확장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비고츠키가 다루었던 아동기 인지발달을 넘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발달이라는 것은 본래 성장기에만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생에 걸치는 과정입니다. 에릭 에릭슨이 주장한 전생애발달이론, 칼 융이 분석심리학에서 다룬 성격발달이론 등이 이에 적용됩니다. 이러한 이론들에 따르면 우리는 개인의 발달을 넘어 사회와의 연결, 미래를 위한 생산과 헌신, 그리고 노년기의 성찰과 재통합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 과정까지 충분히 나아갈 수 있다면 현시점에서 가장 큰 대적자이며 ‘나’ 이외의 다른 권속들과 소통하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고, 장난감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아사르다와의 차이점이 될 것입니다.

 

좋은 작품을 써주신 녹차백만잔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잘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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