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이 아니지만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현신(現身) (작가: Mano, 작품정보)
리뷰어: 유은, 3월 3일, 조회 28

안녕하세요 작가님, 그간 격조했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나면 언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갔는지 생각하며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곤 했는데, 이번 년도는 개인적으로도 그 외로도 너무 많은 풍파가 있었던지라 금방 지나갔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더군요. 작가님께도 그런 한 해였을까요?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 1~2월은 빠르게 흘러 벌써 3월이네요. 2월은 하루가 더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작가님의 작품 중에도 윤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죠. 그 이야기도 새로움을 추가해 새로 쓰신 것이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이번에도 좋은 이야기 정말 감사드립니다. 작가님의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감동과 재미가 함께하지만, 이번에는 유독 재미있었습니다. 상위 존재와의 소통에서 나온 비유들이 특히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원뿔인지 공인지 우리는 그림자만 보아서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게 특히요. 세발자전거였다가 호치키스였다가 스케이트보드였다가 하는 물건은 현실에는 절대 없겠지만, 그림자가 네모였다가 세모였다가 동그라미가 되는 물건은 현실에도 있지요. 시간이 일방적이 아니라 이리저리 조정이 가능한 4차원은 아직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지만 이 비유는 정말 확실하게 각인되었어요.

한 가지 고백하면, 현신이라는 단어를 멀쩡히 보고서도 저는 이 이야기가 이전에 본 적이 있는 작품의 변주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답니다. 중반을 지나 후반의 ‘그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려냈지요. 사실 작가님의 작품인지 다른 곳에서 봤는지도 헷갈려서 무작정 검색하다가, 아무래도 작가님의 작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꼼꼼히 뒤져서 찾아내었답니다. 찾고 보니 어떻게 잊었던가 싶을 정도로 제가 정말 사랑하는 연작의 에피소드 중 하나더군요. 네, 관념체 연구소요. 오랜만에 다시 떠올린 사랑하는 작품을 읽고, 다시 새롭게 변화한 이야기를 읽고 하면서 역시 저는 작가님의 작품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네요.

현신(現身)이라는 말을 찾아보니 ¹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보임(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²현세에서의 몸, ³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의 기근(機根)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난 부처라는 세 가지 뜻이 있더군요. 이야기 속의 현신은 그럼 어떤 뜻이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작중에 쓰인 의미는 2번, 신실한 이들이 바랐던 것은 한 글자를 바꾼 現神, 그리고 인터뷰 속 화자에겐 3번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언젠가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라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그런데 이 문단이

 

“근데 저는 봤거든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신에게서요.”

“총에 맞은 17살짜리 난민 여자애의 얼굴을요.”

“저는 연구를 계속할 거고, 이해하려 노력할 겁니다. 이해할 수 있는지 노력할 거고요.”

“저는 신을 찾으려는 게 아니에요. 이해를 찾는 거예요.”

 

라는 문장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면 조금 과한가요? 주인공이 말한 이해가 사랑과 같은 뜻으로 느껴진다고 하면 이상할까요?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은 보통 사랑을 동반합니다. 그것이 신에 대한 것인지, 신이 지녔던 17살 난민 여자애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생명체의 군집 속에서 주인공이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우연만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요.

부처는 엄밀히 말하자면 신이 아닌 깨달음을 얻은 인간이고, 현신(現身)이 현신³이라면 주인공이 발견한 얼굴은 주인공이 볼 수 있기 때문에 본 것이겠지요. 평범할 땐 눈에 띄지 않다가, 상황이 나빠지자마자 위협할 대상으로서 눈에 띄기 시작한 주인공 또한 분명한 약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직접 그 약자의 얼굴을 그려낼 수 있었던 ‘신’을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중에서 고위 차원이 현실에 하는 소통이 3차원에서 2차원에 그림을 그려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비유가 되었는데, 사실 그림이라는 건 그냥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주인공이 그 난민 여자애의 얼굴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적어도 ‘신’은 그 얼굴을 이해했던 게 아닐까요. 그런 얼굴을 가진 존재에게 같은 모습으로 다가서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중력과 차원의 차이를 뚫고 곁에 있기 위해서요. 그렇다면 어쩌면 그 존재는 ‘신’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지구의 인간을 사랑한 다른 ‘인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아주 먼 시간이 켜켜히 쌓여 또 하나의 차원이 되어버렸을 뿐 정말로 똑같은 인간일수도 있지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저와 아주 다른 환경에서 자라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아주 다른 사람도 비슷한 느낌일까요?

늘 그렇듯, 문장도 내용도 중구난방이 되었군요ㅋㅋ 결국엔 좋았다는 뜻입니다. 모호하고 알쏭달쏭한 것도 사랑이니까요. 주인공이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해 노력한 것처럼 저도 다른 차원에 있는 것만 같은 저와 아주 다른 타인들을 이해하려 노력해야겠습니다. 가끔 언어가 아주 달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지라도 함께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해 속에서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테니까요.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닿을 메세지를 찾을 수 있을테니까요.

이번에도 좋은 이야기 감사드리며, 언제나 건강하게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힘든 일에 종종 멈추더라도 어떻게든 다시 걷는 방법을 찾아낼 용기가 있는 분이라 큰 걱정은 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힘든 세상이니까요.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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