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머리맡에서 듣던 옛이야기, 옛날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전설. 이 산과 저 들판에 얽힌 설화. 요즘에는 좀처럼 이런 말을 들을 수 없다. 말 그대로 구전되던 ‘옛날’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옮겨본 경험이 얼마나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된다. 한 사람이 만들어 낸 말이 이쪽저쪽으로 빠르게 퍼지긴 해도, 오랜 시간의 검증을 거쳐 말과 말로 구수하게 다듬어지는 설화는 이제 보기 힘들다. 글과 글로, 화면과 화면으로 대화는 소비되거나 소모된다. 그중 ‘기억’으로서 남는 이야기는 얼마나 있을까. 지금은 어쩌면 원형으로서의 이야기가 낡아 보이는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옛날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은 여전히 종종 쓰인다. ‘옛날’의 구수한 말투를 입혀 쓴 소설들은 현대식 설화의 모습으로 독자들 앞에 선다. 물론 그것들은 여러 세대 입으로 전달되다 글로 정리된 이야기만큼의 깊이를 가질 수 없다. 아직은 여러 사람에게 보이지 못한, 창작자 한 명이 써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원형으로서의 깊은 맛을 획득한 민담들도 처음 만들어질 때는 그저 누군가 앞뒤 없이 생각한 농담이었을 수 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이야기들 역시 여러 사람에게 오래 전승된다면, 고전이라는 비슷한 이름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옛날이야기’의 방식을 모방한 소설들은 시골스러운 향수를 불러내며 이미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다정함을 한번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문화적 원형은 남아 있으니, ‘할머니가 들려주는 듯한 옛이야기’는 왠지 정감 있다. 시골을 떠올리게 하는 말투와 배경이 문득 그리워지는 때도 있다.
이런 옛이야기, 특별히 전설이 사랑 받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신화와 전설, 민담은 구전 설화의 대표적인 갈래다. 신화는 ‘신’에 대한 이야기. 전설은 특정 장소나 물건에 관한 이야기, 그밖에 민간 전승되는 이야기를 민담이라 한다. 전설에는 다른 이야기에 없는 이중적인 특징이 있다. 실재한 장소나 물건에 얽힌 설화이기 때문에 허구성에 강한 사실성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독자는 (또는 청자는) 사실에서 맞장구치고 허구에서 몰입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법한 일들도 그럴듯한 인물과 사건, 독자에게 깊이 몰입하게 하는 배경 안에서 사실로 약속된다.
가령, 산에 여덟 개의 보물이 묻혀 있었는데 도둑이 하나만 훔쳐 가는 바람에 일곱 개의 보물을 품은 산이라는 별명을 얻은 ‘칠보산’의 전설을 예로 들어 보자. 도둑은 왜 보물을 하나만 훔쳐 갔을까, 아니, 이 산에 정말 여덟 개의 보물이 있기는 했을까. 전설을 전해 듣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미 전설로서 충분히 재미가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이 산의 이름이 ‘칠보산’이기 때문에 정말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전설 속 허구는 이미 가짜라는 사회적이고도 암묵적인 약속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사실성이 보장될 때 쉽게 그것에 몰입한다. 전설이 깃든 장소와 물건은 그 ‘사실성’을 극대화한다.
전설에는 그런 매력이 있다. 실물로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기 때문에 ‘이건 진짜 있었던 이야기라는데’라고 앞에 붙이기만 하면 마법처럼 믿어지는 힘이 있다. 만에 하나 정말이라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몰입하며 안타까워하거나 함께 기뻐하는 독자들에게 이미 그것이 진짜인지는 상관이 없다. 거기에 ‘할머니’처럼 구수한 말투가 붙는다면, 이제 아이처럼 바닥에 누워 이야기를 들을 준비는 끝난다.
여기 ‘범골’이라는 마을에서 있었던 으스스한 사건이 있다. 서울에서 온 청년에게 시골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그때 그 일을 정감 있는 사투리로 읊어 준다. 중간부터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다 알고 ‘여까지 얘기했지’,하면 그다음 내용이야 뻔해지는 그런 이야기를 또 하는 이유는 그저 재미있기 때문이다. 어딘가 위기감 있던 옆 마을, 지금은 길이 나고 없어졌지만, 그곳에는 동물 잡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건 그 마을이 사라지기 전의 이야기다.
자, 여 다 모다 앉아라.
일월명 작가의 〈범골 이야기〉는 ‘순우리말 소일장’ 응모작으로 단편 전체를 사투리로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범골의 전설을 담았다. 한자어를 최대한 배제해야 하는 소일장의 특성상 대체로 순우리말인 사투리를 소설의 주된 어투로 채택했다. 하지만 소일장의 조건이 아니더라도, 이 소설에는 사투리로 쓰였기 때문에 부각되는 장점이 많다.
사투리는 특정 지역의 상징이다. 우리는 사투리를 들으면 상대의 고향이 어디인지 짐작한다. 듣기만 해도 지리적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사투리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쓰지 않는 말투이기 때문에, 사적인 친근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그런 사투리를 옛이야기 형식의 소설에 활용한다면 향토적인 사실감이 배가 된다. 사투리와 함께 쓰인 희곡의 형식 또한, 현장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산문임에도, 이 단편은 희곡의 형식을 택하고 있다. 쌍점(:)과 대사로 발화되는 구어체를 이용한 희곡 형식은 소설의 사실성을 극대화한다. ‘현재성의 문학’이라고도 불리는 희곡은 관객 앞의 무대에서 바로 공연되기 때문에 가장 생생한 감정을 전달한다. 대사 또한 발음이 편한 구어체로 쓰인다. 이 소설은 그런 희곡의 생동감을 산문 내로 가져와 실제 청년과 노인의 대화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과거에는 어떠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독자에게 들리는 듯한 긍정적인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형식적 실험과 사투리의 사용이 옛이야기로서의 이 단편에 사실성을 부여한다면, 신비로운 환상성을 조성하는 장치는 무엇일까. 먼저 이 소설에는 ‘익명성’이 활용되었다. 작가는 소설의 비현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물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은 채 쌍점을 찍어 대사를 표현한다. 범골을 제외한, 주인공 청년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마을의 이름 또한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인물이 익명인, 이름 모를 마을의 전설이라는 점에서 이미 〈범골 이야기〉에는 으스스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청년이 이 마을에 당도한 과정도 불분명하다.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마을에서 청년은 조용히 노인들의 전설을 귀담아듣는다.
두 번째로 이 소설의 배경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 마을’이라는 점도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만든다. 그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 사실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범골 이야기〉는 서울에서 온 청년에게 시골 마을의 노인들이 전해오는 이야기를 건네는 형태로, 드물게 등장하는 청년의 표준어와 노인들의 사투리가 대비되어 그들이 있는 공간적 배경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수도’는 많은 사람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깊은 시골 마을은 누구에게나 생소하다. 이런 장소성은 이미 독자에게 ‘낯선’ 분위기를 형성한다. 전설과 민담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서 더욱 매력적이다. ‘과연 그랬을까’ 싶다가도 ‘정말 그랬으려나’하고 생각을 마치게 된다. 만약 그 말이 틀렸더라도 믿을 수 있고 그래서 더 확실히 비현실적인 상상을 할 수 있다. 이 잔인한 범골 이야기의 내용이 믿기지 않더라도, 독자가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범골은 이미 사라진 동네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고, 그 위로 도로가 났다. 아무도 그 마을을 다시 찾을 수 없다.
〈범골 이야기〉는 여러 장치로 사실성과 허구성의 조화를 이루어 냈다. 생동감 있는 어투와 희곡의 형식 차용은 사실성을, 인물과 장소 이름의 익명 처리와 지금은 사라진 범골 마을의 부재는 환상성을 드러낸다. 이런 소재들은 옛이야기로서 구전되던 전설처럼 소설이 이중적으로 기능하게 하며 독자들의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작가의 깊은 생각과 여러 실험이 깃든 단편 〈범골 이야기〉가 조금 더 짜임새 있으려면 어떤 보완 과정이 있어야 할까.
낸 모르제, 아부지는 그 사람들이 멀리 갔다고만 했으니까.
이 소설은 뛰어난 복선의 회수로 후반부의 으스스한 마무리에 성공했다. 대체로 암시된 바가 결말에 깔끔히 끼워져 완성되지만, 범골 사람들의 살인이 시작된 계기가 조금 더 극단적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마을 전체가 합심해 다른 마을 사람들을 죽일 만큼 큰 원한이 발생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 살인의 원인으로 지목할 만한 사건은 개인과 개인의 가정에 얽힌 사정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장정 여러 명이 가서 한 사내를 데려가 죽인 일은 마을 간의 다툼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지만, 이토록 잔인한 결말이 이어지기에는 어딘가 사적으로 보인다. 몇몇 가구 또는 마을 단위의 소란이 벌어질 만한 사건이 소설 도입에 극단적으로 벌어졌으면 좋겠다. 서사 초반에 배치된 극적인 장면이 독자들에게도 한편의 충격을 주면 시선을 집중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발단되는 사건이 분명하지 않다면, 도리어 중후반의 복선들에도 독자의 눈이 길게 머물 수 없다. 개인의 다툼이라고 생각했던 일에 마을 전체가 연루될 것이라고 한 번에 상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마을 전체가 뒤흔들릴 만한 사건에는 무엇이 있을까. 범골이 호랑이를 잡는 동네라고 생각했을 때, 사람을 호랑이로 잘못 보아 사냥한 일이 대표적으로 벌어질 수 있겠다. 확실히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면, 범골에서 선물 받은 호랑이 가죽을 쓰고 놀던 아이들을 범골의 사냥꾼 여럿이 실수로 해친다면 어떨까. 그건 분명히 한두 집이 아닌 마을 전체의 공분을 살 만하다.
거기에 보복하기 위해 마을이 들고 일어나 아이들을 해친 사냥꾼들을 본보기로 죽인다. 하지만 그 사냥꾼들이 촌장의 아들이라거나 마을에서 한 주먹씩 하는 사람들의 자녀들이라고 상상해 보자. 복잡한 일이 연달아 생기는 이런 와중에 범골 사람들을 ‘사냥꾼’이라는 이유로 혐오하고 폄하는 움직임까지 있다면 그것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분노할 만한 일이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겹겹이 벌어진다면, 범골 사람들이 그 마을에 살던 수많은 이를 잔인하게 죽이고 자취를 감춘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살인일수록 더 확실한 명분이 필요하다.
이 소설은 더 긴 분량으로 썼을 때, 독자들에게 확실히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이미 탄탄한 소설의 짜임과 기존 일월명 작가의 완성도 높은 단편들을 읽었을 때, 〈범골 이야기〉가 부피감 꽉 찬 단편으로 연장된다면 좋아할 독자들이 분명히 있다. 이 작품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조금 분량이 부족한 도입부를 단단히 메워 준다면, 훨씬 안정감 있는 소설이 될 것이다.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할 역량이 충분한 작가에게 독자로서의 기대를 걸어보아도 좋지 않을까.
지금은 없는 마을의 전설. 그곳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충격적인 이유.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 안타까운 사건. 그것을 오래 기억하고, 둘러앉을 때면 곱씹어 보는 노인들의 청산유수. 시간이 오래 흘러 희미하게 구전으로만 남은 범골 이야기가 우연히 서울에서 온 청년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 분명 할머니가 머리맡에서 다정히 읊어 주시는, 따스한 환상 동화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오싹함이 예기치 못한 즐거움을 줄 때도 있다. 할머니들이라고 모두 정다운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으며, 아이들이라고 모두 동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이름이 없는 마을에서 이름이 없는 사람들이 만든 오싹한 설화가 오늘도 구천을 떠돈다. 호랑이의 기운이 서린 마을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눈에 닿기 위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진다. 이유 모르게 닿은 어떤 마을에서 노인들이 자리를 펴고 본격적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면, 그들의 말에 잠시 귀기울여 보자.
오래 전해지던 이야기에 홀리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으니.
그러니까 여기 앉아 봐, 서울에서 온 청년.
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주려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