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동생, 발견되는 일에 대하여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장마와 동생 (작가: 서울쥐, 작품정보)
리뷰어: 구주, 2월 22일, 조회 23

작품의 전체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리뷰를 열람하시기 전에 작품을 먼저 일독해주세요.

 

왜 하필 나무였을까요?

이번엔 여기서 시작해봅시다. 왜 나무일까요. 나무의 무엇이 은송을 내기에 응하도록 만들었을까요. 이 작품의 나무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존재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송의 구원자에 가깝지요. 소망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은송을 돕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왜, 많고 많은 생물 중에 나무였을까요? 뭐가 그렇게 부러웠을까요.

이 작품의 장르는 호러입니다. 일반적으로 호러 하면 떠오르는 소재들이 몇몇 있는데, 이번 작품은 그런 예상들을 벗어나서 즐거웠습니다. (단순히 제 식견이 얕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작품의 전체에 잔잔하게 녹아들어 있는 습한 의심이 장마와 참 잘 어울려요. 멀쩡히 대화하다가도 갑자기 비에 주의를 뺏기고 홀려버리는 모습이 그 예가 될 수 있겠죠. 그러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사실이 더 무섭습니다.

기이한 일이 한 번 일어나면 잠깐 의아합니다. 그게 반복되면 기이는 공포로 몸집을 불리죠. 그런데 그 원인을 모를 때 공포는 한계를 모르고 커지며 원인이 해소되지 않을 땐 혼란이 덮칩니다. 제가 이해한 호러는 이런 단계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 단계를 충실하게 밟아나가지요.

비가 오면 이상해지는 친근한 인물 , 그리고 비가 오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기행, 사건의 시점은 추측할 수 있지만 원인을 지목할 수 없는 가족, 그렇기 때문에 해결하지 못하고 감당해야만 하는 일련의 상황 모두가 작품의 분위기를 심화시킵니다. 게다가 작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여름에는 장마철이 있기에 이 기행이 매년 반복’되고 있죠. 눅눅한 비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이 막막한 상황은 생각만 해도 장마철 아침의 자욱한 안개를 연상시킵니다.

가족은 한가지 방안을 생각해냅니다. 우비라도 사주는 거죠. 막을 수 없다면 건강이라도 해치지 않도록요. 관점에 따라 ‘포기’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저는 이 가족이 참 사려 깊고 따뜻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후술하도록 하죠.

우비를 사준다고 해서 비에 젖는 것까지 막을 수 있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우비가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주인공의 동생인 은송은 기껏 사준 우산의 후드도 걷고, 자신은 감기 같은 것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니까요. 비를 맞아서 감기에 걸릴 일이 없는 생물이라니요. 갈수록 기이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은송은 주인공 가족의 일원입니다. 아무리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요.

기행을 하는 동생을 내치거나 학대하지 않고 포용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우려는 가족이 참 다정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인공의 동생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기를 선택했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실종의 원인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홀로 지낼 때 어떤 감정이 드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사무치는 외로움에 괴로워하던 동생은 결국 나무에게 ‘부럽다’고 말하며 내기를 겁니다.

 

가족을 사려 깊은 인물들로 해석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실종을 선택한 건 오직 가족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빠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브레이크를 거는 존재가 가족이었던 거죠. 은송은 ‘슬퍼할 가족들이 걱정된다고 했’다고 말합니다. 친구 하나 없는 현실은 외롭지만 은송에게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가능한 선에서 사랑을 전하는 가족이 은송을 현실에 발붙이게 만들죠.

작품의 후반에서 실종 이후의 동생, 아무리 생각해도 은송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인물이 자신의 정체를 고백합니다.

내가 더 이상 언니 동생이 아니라고 해도?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서로의 몸, 혹은 정체를 바꾸는 게 그 내기의 주된 내용이고요. 몸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채면 은송은 나무에서 원래 몸으로 돌아갈 겁니다. 이것의 성패는 오로지 주변인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무가 부럽다고 해도 이런 내기를 하는 것은 과하지 않습니까? 은송이 얻을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요. 내기에 아무것도 개입할 수 없지 않습니까. 몸을 가지고 말을 할 수 있게 된 나무가 어떻게 행동할 줄 알고 몸을 내준답니까.

 

오늘은 ‘왜 하필 나무였을지’ 생각하며 리뷰를 시작했습니다. 나무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햇볕을 받으며 뻗어나가기만 하는 수동적인 상징물입니다. 그런 식물이 되고 싶다고 한 이유는 은송의 처지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친구가 없다는 건 단순히 외로움으로만 치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에서 교류할 사람이 없다는 건, 움직일 곳이 자신이 선 곳밖에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열 두살의 은송은 부모님의 이직으로 덩그러니 놓여진 낯선 공간에 갇혀있었습니다. 각자의 문제로 바쁜 가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논할 수도 없었지요. 가족들은 그걸 알기에 더 알아보는 일을 포기합니다. 대신 수습으로 미안함을 표현하죠.

나무를 부러워 했던 건 어디론가 뻗어나갈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한 곳에 붙박여 있으면서도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부러웠을 수도 있고요. 사실은, 극도의 우울감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을 은송이 뒷산의 가장 큰 나무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봤는데 글쎄요… 확언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건 은송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겁니다.

 

은송은 가족이 자신을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내 줄 거라고 굳게 믿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것에 가까웠겠죠.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안은 인물이 바라는 건, 단정하기 조심스럽지만 ‘발견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이런 고독을 품고 살았고, 그랬기에 너무나도 괴로웠다고 말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먼저 손을 내밀어주길 기다렸지만, 공교롭게도 그 대상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가족은 은송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호러지만, 이 부분은 정말 슬프게 느껴졌어요. 주변인이 이상하게 변해도 ‘이상하다’고 규정짓고 배척하지 않는 모습에서 은송과 가족의 엇갈림이 보였습니다. 친밀한 가족이 변했다고 해도 변화를 받아들이고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까. 눈치를 챌 수 있을 리가 없지요. 가족에게 은송은, 이상하게 변해도 은송이니까요. 나무도 그걸 느꼈기 때문에 정체를 밝혔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번개를 맞은 동생은 영영 사라지고 말지만요.

 

은송의 이상행동은 끝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정체를 눈치챕니다. 그들이 어떻게 함께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게 추측의 영역에 파묻힌 채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니까요. 씁쓸한 여운을 남기고요. 쓰다 보니 호러가 아니라 비극에 대해 적는 기분이 드네요. 저는 아직도 은송이 ‘먼저 말해 줄 수는 없었을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 두살이잖아요. 너무 어린 나이입니다. 조금 이기적으로 굴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도 되는 청소년 아닙니까. 의지하고 어리광을 피워도 모자란 나이의 아이가 이런 내기에 응하게 되다니요. 그 과정을 생각하면 참 먹먹해집니다.

좋게 생각해보자면, 나무가 된 동생 역시 은송의 마음을 이어받은 존재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은송이 위로를 얻지 못했다는 건 여전해서 슬퍼집니다. 여운을 오래 즐길 수 있었어서 좋았습니다.

 

서정적이지만 비극적이고 긴장감과 궁금증을 끌어올리는 멋진 글이었습니다.

이번 장마에는 은송을 떠올리게 될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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