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과 원시인, 그 사이 어드메에서 공모(감상)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침대 밑 원시인과 유령 공룡 (작가: 담장, 작품정보)
리뷰어: 구주, 2월 21일, 조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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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감상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재미있는 글은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거든요.

“나는 왜 살아있는데도 유령의 꿈을 꿀까”

이번에 제 눈길을 사로잡은 문장은 ‘살아있는데도 유령의 꿈을 꾼다’는 대목이었습니다. 대체로 죽은 이를 보는 산 사람은 공포에 질리거나 혼란을 겪기 마련입니다. 생과 사의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이죠. 그건 현실과 비현실의 유화지요. 섞이지 않는 것이 이치인 것들이 한데 뭉쳤으니 두렵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하지만 주인공은 덤덤하기만 합니다. ‘유령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고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며 담백한 정서로 그들을 대하는 게 전부입니다.

이 글은 구체적인 우울감 묘사에 중심을 두고 있지 않음에도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가집니다. 그게 이 글의 매력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시간이 빨리 지나는 것 같은 경험, 다들 한 번쯤은 해보셨을 테지요. 그게 전부 헛것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주인공이 겪는 것이 그러합니다. 주인공이 현실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만끽하는 과정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분위기잖아요. 눈치채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죠. 환상적인 공간이라는 걸요. 작내 분위기와 현실의 불합치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쓸쓸해집니다.

 

유현의 비현실

그렇다면 주인공의 비현실을 한번 들여다볼까요. 주인공은 이렇게 표현됩니다.

1. 살아있는 주인공과 치열하게 살아가는 학생들 / 죽은 과거의 유령들

2. 두렵고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공룡  / 이성보다는 감정과 본능이 우선시 되는 따뜻한 원시인

여기서 주인공은 어디에 위치할까요. 살아있지만 유령의 꿈을 꾸므로 죽은 자의 영역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정확하게는,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 홀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죠. 반대로 해석해도 사실 무관합니다. 중요한 건 어느 곳에서든 주인공이 이질적이고, 겉도는 존재로 이해된다는 점이니까요.

유령들은 나를 보지 못하고, 사람들도 더이상 나를 보지 않았다.

원인은 물론 성적입니다. 성적과 교육열이 주인공을 살아있는 사람의 현실에서 내쫓았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정해진 길에서 이탈한’ 순간부터 주인공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겁니다. 참으로 한국답죠. 존재하기 위해 허락받아야 하는 사회라니.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의 문제는 사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사회적인 문제이지 않습니까. 개인, 그것도 한 명의 청소년이 뒤집어엎기엔 이 구조가 너무 견고합니다.

그러면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궁금해지지요. 이게 어떻게 해결될까. 제목과는 무슨 관계가 있지?

네, 그래서 원시인이 나옵니다. 생뚱맞고 황당한 인물이죠. 말도 통하지 않는 고대의 인간이 이 문제의 해결책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환상의 공간’으로 세상이 뒤바뀌어 주인공은 원시인과 아주 단순하고 원시적인 일을 하죠. 먹고, 마시고, 씻고, 자는 일 말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만 현대에서는 불필요한 일로 취급되는 일들로 돌아가 주인공은 휴식합니다. 현실에 치이던 주인공에겐 단비 같은 시간이었을 겁니다.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유령 공룡이 주인공을 알아보는 사태가 일어나고 맙니다. 내면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그 감정, (제가 이해한 바로는) 죄책감이 유령 공룡으로 드러났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공룡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공룡기의 유소년과 거대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실제로 만난다면 압도적이겠지요. 나를 짓뭉갤 수 있으니까요.

주인공이 어떤 일상을 살았는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는 공룡의 목소리에서 모든 걸 유추할 수 있게 됩니다. 낙오자가 되고 싶지 않아 하는 학생,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청소년, 도피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사람. 주인공은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을 자각시키는 공룡은 현실의 상징물입니다. 거대하고, 저항할 수 없는 두려움 그 자체죠.

어디에서든 나를 쫓던 현실, 그것을 피해 달아났더니 이제 공룡이 나를 알아봅니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행동에 몰두했을 뿐인데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니요. 이때 주인공은 자문합니다. ‘나는 유령이 된걸까?’ 하고많은 생각 중 왜 하필 이 생각이었을까요.

 

유현의 현실

원시인과 함께한 공간이 환상의 공간이란 건 애초에 숨겨진 적이 없었죠. 현실 도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공룡들이 말하잖아요. ‘편해지는 길을 선택’했다고요. 현실을 상징하는 공룡은 자꾸만 주인공을 위협합니다.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주인공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에서 내쫓으려 하죠. 결국 원시인이 공룡에 대항하며 맞서 싸우게 되죠. 대체 왜 그럴까요. 원시인과 좀 쉬었기로서니 그렇게까지 과격하게 굴어야 하겠습니까?

 

어디에 서야 하는가

처음으로 돌아와서, 서두의 질문에 답할 때가 왔습니다.

나는 왜 살아있는데도 유령의 꿈을 꿀까

주인공이 현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답하고 싶습니다. 현실에 살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그 현실에서 살아갈 자신과 용기가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유리되고 있는 셈이지요.  유령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의 연장선입니다. 주인공에게 유령은 죽은 것이라기 보단 ‘현실이 아닌 것’입니다. 현실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도피처죠.

그렇다면 주인공은 남은 평생을 유령을 보아야 할까요. 당연히 아닐 겁니다. 계속해서 공룡과 싸워야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글의 결말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공룡과 원시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두려울테지만 맞서야죠. 더이상 공룡이 보이지 않게 되는 날 까지요.

주인공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아갈 겁니다. 유령 공룡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 주인공에겐 든든한 원시인 친구가 있으니까요. 사람은 그런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답게, 산 사람의 세계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과 싸우면 되는 겁니다. 유령의 일을 유령끼리 알아서 할 수 있게 될 때까지요.

그러다 지치거나 힘들어지면 원시인을 떠올리면 됩니다. 공룡이 너무 버거워 상대할 수 없을 때에도 원시인은 계속해서 싸워줄테니까요. 친구 아닙니까, 나의 영원한 친구죠.  이건 주인공 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우리만의 원시인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각자의 공룡과 싸우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네요. 저도 가끔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적고나니 뭐 당연한 말을 20매나 쓰고 있나 싶지만, 그만큼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만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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