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리뷰는 달바라기 작가님의 「뱀을 위한 변명」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읽지 않은 독자께서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표시가 된 부분을 제외하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가까운 미래를 상상케 하는 배경, 화자는 유전자편집과 단백질합성으로 새로운 동물을 만들어내는 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다. 여러 자산가의 입맛에 맞춘 동물을 만들어내며 화자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다. 뒤이어 그가 취하는 태도를 통해 달바라기 작가는 작은 암시를 남긴다.
이번 소설은 그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사건과 화자의 시선에만 집중하면 그렇다. 여기서 달바라기 작가의 재주를 찾을 수 있고, 이야기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영상 매체와 달리 글자로만 이루어진 소설에는 시점과 시간을 통해 관객을 속이는 일이 매우 어렵다. 이어지는 예를 통해 이번 소설에서 보이는 묘미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자 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연스레 화면의 중앙에 시점을 집중하거나 크고 명확하게 보이는 것, 움직이는 것 등을 자세하게 보기 마련이다. 화면의 사각에서 놓인 그림자나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은 놓치기 쉽고 관객을 속이거나 놀래는 데에 유효하게 쓰일 수 있다.
글에서는 이런 장치를 쓰기가 쉽지 않다. 글이 어떤 시점으로 쓰였는지를 불문하고 독자는 제멋대로 상상을 펼치며 글을 읽는다. 작가에게는 곤혹일 수 있으나 읽는 입장에서는 그런 재미가 또 대단하다. 이런 점에서 달바라기 작가의 이번 소설을 읽는다면 자신만의 시점을 찾아내길 바란다.
이건 소설이 3인칭으로 쓰여야했다는 식의 비판과는 다른 이야기다. 나는 작가가 낸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기분으로 리뷰를 작성했다. 그러면서 화자와 거리를 두게 되었고 그가 나를 속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모든 것은 작은 암시에서 비롯한다.
이어지는 문단에서 스포일러를 포함하여 암시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아홉 번째에서부터 열세 번째 문단까지, 화자는 업체에서 벌어지는 일과 그 안에서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설명한다. 잔인, 끔찍한 일, 불행한 삶, 기괴한 동물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보자면 화자가 본인의 업(業)을 즐기지 않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동시에 열세 번째 문단의 다섯 번째 문장에서 그는 묘한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내 일은 동물들을 만드는 것이고 신체를 자르고 편집하는 일은 다행히 다른 부서에서 한다. 적어도 내 손에서 벗어날 때의 동물들은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다.
본인의 작업보다 조금 더 끔찍한 일이 있음을 시사하며 화자는 한 발을 뒤로 빼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동물을 만들어내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그렇게까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이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조금 더 커다란 감정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화자는 한 자산가의 의뢰로 몸이 가늘고 긴 동물을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없던 이 동물에 대한 시선이야말로 화자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화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다. 또는 동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앞서 그가 보였던 태도를 고려하면,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이 역시 스포일러를 포함한 문단에서 이어 풀어보고자 한다.
조금 전까지 화자는 새로운 동물을 만들어내는 부자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왔다. 기괴한 동물들을 좋아하는 변태들이란 표현 역시 사용됐다.
이번에는 화자가 만들어낸 동물을 살펴보자. 제목과 창작 배경, 동물을 표현하는 문장을 모두 살펴보면 우리가 모두 아는 ‘뱀’에 귀결된다. 여태껏 세상에 없던 ‘뱀’이다. 여러 유전자를 섞어 팔도 다리도 없는 동물을 만들어놓고 화자는 그 동물을 사랑하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화자는 그 동물에게 에베라는 이름도 붙여준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리라. 여기서 화자는 앞서 말한 변태들과 같은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새로운 상품이 출하된 뒤, 화자는 우연찮게 그 동물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좁은 회사를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향한다.
여기서부터 주제를 녹여내는 방식을 통해 달바라기 작가가 가진 또 하나의 재주를 볼 수 있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주제와 독자가 읽어내는 주제에는 언제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앞서 말한 재주는 여전히 유효하다.
물음을 던지는 이야기는 울림이 깊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뱀을 위한 변명」은 독자를 향해 몇 가지 질문을 남긴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 흐름을 활용하지 않기에 더욱 흥미롭다.
곧 이야기만으로도 즐길 수 있으며, 그 안에 숨은 수수께끼를 탐구하기에도 즐거움이 숨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화자가 자신이 만들어낸 동물을 만난 뒤로도 한차례 무대를 바꿔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전환은 어지럽지 않고, 이해를 방해하지도 않는다.
아쉽게도 이야기를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한 분량은 여기까지다. 이어지는 내용은 감상을 방해할 수 있으니, 부디 작품을 살펴본 뒤에 찾아와주길 바란다.
이야기는 작품 태그에서도 드러내듯 모세오경 속 창세기에서부터 예수에 이르는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이클은 천사 미카엘의 영어식 표현이고 에베(이브)는 하와의 영어식 표현을 다르게 발음한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원전을 빌린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본래 여러 소주제를 두고자 했으나, 리뷰의 밀도가 낮아지는 것이 걱정스러워 크게 두 가지를 두고 남은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첫 번째로 일부 아쉬운 지점에 대해 짚고 넘어간 뒤에 두 번째로 위선과 위악의 교차를 두고 말하고자 한다.
- 일부 아쉬운 지점
모든 소설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건 소설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지 않기에 가지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번 소설에서는 일부 구성과 표현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두 번째 문단은 화자가 에베에게 붉은 포도알을 내미는 장면을 담고 있다. 여기서 화자는 에베가 진짜 음식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 말한다. 서른네 번째, 서른여섯 번째 문단을 보면 주인과의 대화를 통해 화자는 에베가 포도주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기서 포도알은 포도주에 담겨있던 것으로 표현됐으므로 에베는 포도알을 봤던 것이 된다.
두 번째 문단을 놓고 보자면, 에베가 진짜 음식을 경험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화자의 몫이 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서술을 통해, 에베가 원하던 것을 화자가 그저 전달했을 뿐인 이야기가 되고 만다.
열 번째 문단에서 강제적인 교배를 통해 새로운 종을 만들어낸다고 하지만, 이후 소개되는 작업 과정을 보자면 과연 교배라는 작업이 이루어질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다음으로 화자는 유전자를 조작하는 회사에서 동물을 생산하는 직책을 맡은 것으로 소개된다. 구체적 직함은 나오지 않았으나 실험실에서 근무한다는 문장이나 동료들과 6개월에 걸쳐 뱀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 그러하다.
그런데 여기서 만들어낸 동물이 나무에 올라가지 않도록 훈련을 시키기 위해 화자가 출장을 떠나는 것에는 어색함이 있다. 이 업체에서는 다리를 자르고 촉수를 붙이는 등의 업무를 맡은 직원이 따로 있다. 그렇다면, 사후처리를 위한 직원도 별도로 있어야하지 않을까?
이 틈은 후에 마이클의 대화를 통해 메꿔진다. 결국 부자, 곧 주인의 커다란 계획 속에 벌어진 일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제 직책과 맞지 않음에도 에베에 대한 사랑만으로 기묘한 출장을 떠난 화자만이 남는다.
사실 화자가 에베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면 그저 부자의 밑에서 일하는 정원사로도 충분했으리라. 굳이 에베를 만들어낸 위치로 인해 화자는 위선자가 될 수 있었다. 이는 분명 큰 효과이나 사소한 틈을 줄이는 방법 역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외에는 크게 아쉬움을 느끼는 일이 없었다. 화자가 주인에게서 벌을 받은 뒤로, 서사의 진행이 투박했으나 오히려 매력이 있었다.
2. 위선과 위악의 교차
두 번째로 소설을 관통하는, 위선과 위악의 교차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화자는 위선자로 등장한다. 붉은 포도알에 호르몬제를 넣어 에베에게 먹인 뒤로는 주인에게서 위선자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듣기도 한다. 여기서 화자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좀 더 살펴보았다.
얼핏 보면, 에베는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갔다. 생식을 억제하고, 인공 사료를 공급하여 길러지던 동물들이 다른 생물을 먹고 저들끼리 짝을 짓는 모습이 그렇다. 그러나 이는 에베가 태어났던 방식과는 다른 삶이다.
에베는 지금껏 세상에 없던 동물이었다. 곧 사료를 먹으며 생식을 하지 않는 것이 에베에게는 자연의 생활방식이었다. 화자는 그런 에베에게 없던 식욕을 주었고 색욕을 강제로 주입했다. 그가 자신은 그나마 깨끗하다며 거리를 두었던 다른 부서와 같은 일을 한 것이다.
이는 곧 화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에베를 사랑하며 위선을 떠는 모습이다. 여기에 반해 주인은 위악을 보인다. 그는 없던 분노도 만들어내는 듯이 화를 낸다. 그가 취해 마땅했던 행동은 불량품이 된 동물을 처분하고 새것을 들이는 것이다. 또는 화자를 보낸 업체에 항의를 할 수도 있다.
여러 선택을 두고 주인이 내린 결정은 속죄다. 당사자의 의도와 상관없는 강제적인 속죄로 그는 제 동물들을 죽이고자 한다. 그가 바랐던 것이 자신을 향한 사랑인지,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여기서 화자는 다시금 위선으로 고개를 내민다. 동물들은 스스로 존재할 뿐이며 더 위대한 무언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그렇게 말하는 화자는 이미 자신을 위한 에베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화자와 주인은 굉장히 닮아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대를 사랑하며, 그 속에서 위선과 위악을 부린다. 재미있는 점은 그러고도 에베의 사랑을 얻은 건 첫 번째란 점이다. 이름도 없는 그냥 뱀인 첫 번째 말이다.
마이클을 통해 생명을 보전한 두 뱀은 황무지로 나간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모세오경 속 창세기를 이어가듯 빠르게 흘러간다.
그 끝에 예수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제자를 유혹했던 화자가 아침을 기다리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사랑이 순수하단 믿음은 때로 잔인하게 다가오곤 한다. 그렇기에 화자는 사랑에 대해 여러 물음을 던진다. 어쩌면, 우리네 선조가 삼켰을 색욕에는 위선과 위악이 가득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키로 화자는 끝내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가 저지른 죄는 주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에베에게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