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을 사람들이 사라진 이유 공모(감상)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범골 이야기 (작가: 일월명, 작품정보)
리뷰어: 0제야, 2월 22일, 조회 39

할머니 머리맡에서 듣던 옛이야기, 옛날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전설. 이 산과 저 들판에 얽힌 설화. 요즘에는 좀처럼 이런 말을 들을 수 없다. 말 그대로 구전되던 ‘옛날’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옮겨본 경험이 얼마나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된다. 한 사람이 만들어 낸 말이 이쪽저쪽으로 빠르게 퍼지긴 해도, 오랜 시간의 검증을 거쳐 말과 말로 구수하게 다듬어지는 설화는 이제 보기 힘들다. 글과 글로, 화면과 화면으로 대화는 소비되거나 소모된다. 그중 ‘기억’으로서 남는 이야기는 얼마나 있을까. 지금은 어쩌면 원형으로서의 이야기가 낡아 보이는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옛날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은 여전히 종종 쓰인다. ‘옛날’의 구수한 말투를 입혀 쓴 소설들은 현대식 설화의 모습으로 독자들 앞에 선다. 물론 그것들은 여러 세대 입으로 전달되다 글로 정리된 이야기만큼의 깊이를 가질 수 없다. 아직은 여러 사람에게 보이지 못한, 창작자 한 명이 써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원형으로서의 깊은 맛을 획득한 민담들도 처음 만들어질 때는 그저 누군가 앞뒤 없이 생각한 농담이었을 수 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이야기들 역시 여러 사람에게 오래 전승된다면, 고전이라는 비슷한 이름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옛날이야기’의 방식을 모방한 소설들은 시골스러운 향수를 불러내며 이미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다정함을 한번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문화적 원형은 남아 있으니, ‘할머니가 들려주는 듯한 옛이야기’는 왠지 정감 있다. 시골을 떠올리게 하는 말투와 배경이 문득 그리워지는 때도 있다.

이런 옛이야기, 특별히 전설이 사랑 받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신화와 전설, 민담은 구전 설화의 대표적인 갈래다. 신화는 ‘신’에 대한 이야기. 전설은 특정 장소나 물건에 관한 이야기, 그밖에 민간 전승되는 이야기를 민담이라 한다. 전설에는 다른 이야기에 없는 이중적인 특징이 있다. 실재한 장소나 물건에 얽힌 설화이기 때문에 허구성에 강한 사실성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독자는 (또는 청자는) 사실에서 맞장구치고 허구에서 몰입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법한 일들도 그럴듯한 인물과 사건, 독자에게 깊이 몰입하게 하는 배경 안에서 사실로 약속된다.

가령, 산에 여덟 개의 보물이 묻혀 있었는데 도둑이 하나만 훔쳐 가는 바람에 일곱 개의 보물을 품은 산이라는 별명을 얻은 ‘칠보산’의 전설을 예로 들어 보자. 도둑은 왜 보물을 하나만 훔쳐 갔을까, 아니, 이 산에 정말 여덟 개의 보물이 있기는 했을까. 전설을 전해 듣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미 전설로서 충분히 재미가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이 산의 이름이 ‘칠보산’이기 때문에 정말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전설 속 허구는 이미 가짜라는 사회적이고도 암묵적인 약속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사실성이 보장될 때 쉽게 그것에 몰입한다. 전설이 깃든 장소와 물건은 그 ‘사실성’을 극대화한다.

전설에는 그런 매력이 있다. 실물로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기 때문에 ‘이건 진짜 있었던 이야기라는데’라고 앞에 붙이기만 하면 마법처럼 믿어지는 힘이 있다. 만에 하나 정말이라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몰입하며 안타까워하거나 함께 기뻐하는 독자들에게 이미 그것이 진짜인지는 상관이 없다. 거기에 ‘할머니’처럼 구수한 말투가 붙는다면, 이제 아이처럼 바닥에 누워 이야기를 들을 준비는 끝난다.

여기 ‘범골’이라는 마을에서 있었던 으스스한 사건이 있다. 서울에서 온 청년에게 시골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그때 그 일을 정감 있는 사투리로 읊어 준다. 중간부터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다 알고 ‘여까지 얘기했지’,하면 그다음 내용이야 뻔해지는 그런 이야기를 또 하는 이유는 그저 재미있기 때문이다. 어딘가 위기감 있던 옆 마을, 지금은 길이 나고 없어졌지만, 그곳에는 동물 잡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건 그 마을이 사라지기 전의 이야기다.

 

 

, 여 다 모다 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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