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동안, 단편 7개 비평

대상작품: 감자튀김 맛 돈까스 (작가: BornWriter, 작품정보)
리뷰어: soha, 17년 7월, 조회 98

이 리뷰는 Bornwriter 님의 단편 7개에 대한 통합 리뷰입니다. 리뷰에 등장하는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관점이 가득합니다.

 

 

3월 8일부터 3월 17일까지 열흘 동안 작가는 단편 7개를 브릿G 사이트에 업로드했다. 본 리뷰에서는 단편 7개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모티브가 있는지 살펴보려고 하며, 이를 통해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시도할 것이다.

우선 3월 17일에 업로드된 ‘감자튀김 맛 돈까스’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장 마지막에 업로드된 것이기도 하고, 분량이 짧아 앞으로 글들을 해석할 때 사용할 틀로 적합하다. 이 작품에서 ‘나’는 주변 세상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표출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나’는 취사병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만 동시에 취사병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고 있다. ‘나는 취사병이 그저 명령에 따랐음을 알고 있으며, ’나‘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명령을 내린 주체에 항의하는 것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소하면서 갈등을 없애버리고, 주변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나’는 주변에 존재하는 문제를 인식할 수 있다.

  2. ‘나’는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안다.

  3. ‘나’는 내가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4. ‘나’는 문제 해결을 포기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과정은 3월 9일에 업로드된 ‘낙수 효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주연은 자신의 월급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 원인은 작게 보면 사장이 가지고 있는 아집일 것이고, 사회 전체로 확장하면 본문에서도 나왔듯이 헬조선의 근로환경일 것이다. 주연은 현실적 이유로 문제의 원인을 해결할 수 없다고 인정하며, 결국 해결을 포기한다.

이러한 사고과정을 떠받치는 논리적인 기반을 3월 11일에 업로드된 ‘마음의 양식’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본문에서 악마는 책 6권을 소년에게 추천해준다. 이 중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들 수 있겠다. 모더니즘을 열어젖혔다고 평가받는 이 소설의 기념비적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편치 않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엄청나게 큰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건 두 가지다. 첫 번째로 ‘어느 날’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그레고르 잠자가 갑충이 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잘못을 해서 천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저주를 받은 것도 아니다. 이 사건은 그냥 일어났다는 게 중요하다. 특별히 그 날 일어날 필요도 없었고, 특별히 그에게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 별다른 이유가 없기에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고, 항의할 대상도 없다.

다음으로 중요한 건 ‘발견했다’라는 말이다. ‘변해 있었다’와 ‘변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의 차이는 명백하다.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소설에 대해 한 가지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그레고르가 이 시점에서 자신이 가지는 인간성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자신이 갑충, 즉 벌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자신이 벌레, 즉 특별히 의미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레고르는 당연하게도 자신이 벌레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실패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인식은 비가역적이고, 그레고르는 이러한 이유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여지조차 가지지 못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나타나는 그레고르의 비극적 이야기는 ‘감자 튀김 맛 돈까스’와 ‘낙수 효과’에서 나타나는 ‘나’의 사고를 설명하는데 적합해 보인다. 그레고르처럼 ‘나’에게 주어진 비극은 평범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항의할 대상이 모호하다. 또한 ‘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의사소통이 결국 무의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따라서 갈등 해결을 미리 포기한다.

이렇듯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딱히 이유 없는 폭력’은 3월 15일에 게시된 ‘뿅망치 게임’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적월 외의 다른 사람들은 뿅망치 게임에 대한 규칙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적월은 그렇지 않다. 건물을 쓰러뜨린 지진에 대해 항의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듯이 적월과의 의사소통도 쉽지 않다. 뿅망치로 트럭을 날려대는 적월이 사람들을 기절시켰다는 것으로부터 적월을 나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이 소설 속에서 리오는 허를 찔러 적월에게 승리를 거두지만 블레니 크로울, 신재연, 틸리언 어즈라엘은 결국 병가를 내고 만다. 특별히 그들이 잘못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폭력에 별다른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3월 11일에 업로드된 ‘마음의 양식’을 다시 살펴보자. 이 소설에서 소년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통해 아버지에게 행해진 폭력에 대해 저항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마란 어떤 인물일까? 그레고르가 변신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세상의 부조리를 알고 있고,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고 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어느 소년이 찾아와 그에게 누군가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는다면 어떨까? 그는 자신이 벌레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과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다. 돌아가서 책을 읽고 공부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면 악마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악마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능력이 직책에 따라 사회로부터 주어졌다는 점도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 직책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기에 그는 스스로를 직책을 수행하는 백수라고 부른다. 그는 소년의 영혼이 곯아서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하지만, 악마가 카프카의 변신을 추천해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특별히 그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변신을 읽은 소년은 스스로가 벌레임을 깨달아 버릴 것이고, 이 경우 소년은 복수할 대상을 잃고 갈등의 여지를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 모두가 벌레라면 누군가를 기억해줄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이런 사상을 3월 11일에 업로드된 무덤의 풍경에서 엿볼 수 있다. 공동묘지 가득 사람들을 죽이고도 모두의 이름을 죽일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A는 ‘딱히 이유 없는 폭력’을 의인화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A에게는 인간성이 있다. 그는 피 묻은 폴딩 나이프를 묘비 앞에 두고, 자신의 아내를 기억하며, 아직 죽지 않은 누군가가 누군지를 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감자 튀김 맛 돈까스’를 이후로 계속 검토해보고 있던 세계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작가가 제시하는 방안을 하나 찾아낼 수 있다. 복수심과 폭력이다. 복수심과 폭력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길게 논해왔던 논리적 사고 밖에 있다. 이들은 철저하게 사람들 간에 일어나는 감정이며, 사회로부터 일어나는 ‘딱히 이유 없는 폭력’을 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치환시킨다. 이를 통해 인물은 복수할 대상을 얻고, 이를 해소할 수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3월 8일에 업로드된 살인자x살인자 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부분의 인물과는 달리 ‘나’는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문제를 일으킨 대상을 제거한다. 성폭력과 그에 따른 복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며, 이 과정에서 의사소통이 일어날 수 있는 여지 또한 없다. 처음에 설명했던 4단계 논리의 3번째 부분에서 더 이상 논리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인물은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나’는 곧 논리의 세계로 돌아와 시체 처리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자신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국어 선생님 한 명을 죽인다고 세상의 성폭력이 모두 사라질 것도 아니고, 그녀가 받은 상처가 없어질 것도 아니다. 논리 단계를 잘못 따랐으므로 그녀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있는 곳은 없다.

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논리 밖에 있는 인물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범생이는 자신의 삶에 살아가는 의미가 없다고 인정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인물들은 자신이 살아갈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의미가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며, ‘나’가 했던 것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논리 밖으로 발을 내딛었고, 범생이가 존재하는 세계로 본문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손목이 잡아끌려 들어갔다.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라는 본문처럼 이렇게 한 번 끌려들어 가면 다시 원래의 세계로는 돌아올 수 없다. 작가 코멘트에서 볼 수 있듯, 작가는 이러한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3월 9일에 게시한 ‘부처의 마음에 대한 겨울날의 생각’을 살펴보고 논의를 마무리해보도록 하자. 이 글의 분위기는 다른 글들과는 다르다. 분위기는 차분하고, 특별한 갈등 또한 없다. ‘나’는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며 세상의 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불교적인 사고방식은 이 글에서 논하고 있는 4단계 논리와는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언뜻 보이지만 사실은 그 극한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을 포기하는 것을 끝없이 반복할 경우, 우리 모두가 그저 다 같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있으며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문제 해결에 대한 포기는 세상에 대해 항복하는 승패가 있는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받아들이는 문제로 바뀔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의 결말을 이 글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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