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3,320매에 달하는 이 장편을 읽기 전에, 과연 이 모험을 시작해야 할 지를 망설이고 계신다면 먼저 작가님의 두 단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각기 10줄인 여덟 가지의 짧은 이야기 모음입니다. 시오레 이야기의 넓고도 잘 짜여진 세계관과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잔잔한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이 중 ‘봄비가 내려’ 편이 이 장편의 주인공인 시오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오레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죠. 달래의 옛말이라는 데 검색해 봐도 안 나오네요. 진짜인지, 작가님의 창작인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두 단편을 모두 읽어 보신 분은 뭔가 의아하실 겁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데? <짧은 판타지>는 정통 서양식 판타지 분위기고, <봄비가 내려>는 우리나라 전래 동화 같으니까요.
자, 그럼 다시 <짧은 판타지>를 봅시다. 맨 처음 등장하는 로밀린이라는 지명과 마법사라는 단어를 빼면, 과연 이걸 서양식 판타지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징모관, 야공장, 천문관, 가객, 판관, 관비 같은 너무도 동양적인 단어들을 위화감 없이 읽어내려 갔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저에게는 장점이었던 건 이처럼 서양식 판타지의 분위기에 동양적인 고유명사들을 자연스럽게 녹여 넣었다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도깨비와 두억시니, 어둑시니와 그슨대 같은 한국의 요괴들이 나옵니다. 등장인물들은 떡과 달래 무침을 좋아하고 논바닥에서 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씨름으로 승부를 겨루기도 하죠. 중요한 등장인물 중 하나는 마파람이라는 선무당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 전체가 동양적인 분위기로 통일된 건 아닙니다. 주인공의 이름들은 시오레, 펠리엇, 잉겔센 등 서양식이고, 기사와 검, 성이 등장하죠. 이처럼 서로 다른 분위기가 혼재되어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이냐에서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 것 같습니다. 저는 마음에 들었고 오히려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는 도깨비라는 종족이 등장합니다. 참도깨비, 버금도깨비, 오도깨비로 나뉘죠. 유쾌하고 시끌벅적한 점은 호빗 같고, 숲 속에 모여사는 건 요정 같고, 오래된 물건들을 좋아하는 건 드워프 같습니다. 덩치가 큰 오도깨비는 트롤이나 오우거의 느낌도 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이자 도깨비인 긴즈백은 와우의 고블린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저런 걸 다 모아 놓으면 왠지 우리가 잘 아는 도깨비와 비슷한 무언가가 될 것 같지 않나요?
또한 이 작품에는 믄달시니와 해올시니라는 신이 나옵니다. 둘 다 작가님이 만들어 낸 단어입니다. 시니라는 어미에서 어둑시니와 비슷한 어떤 존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뿐더러, 둘 중 어느 것이 죽음의 신이고 어느 것이 삶의 신인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낯선 고유명사들을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글을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게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작가님은 뜻 모를 고유명사들을 초반부에 잔뜩 쏟아 놓아 독자의 뇌에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주요 등장인물들도 처음부터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잘 아는 보통 명사로 등장하다가 어느 정도 이미지가 잡힐 즈음에 이름을 알려 줍니다. 시오레도 처음에는 하녀라고만 나오다가 2편 마지막에 가서야 시오레라는 이름이 나오죠.
대륙에 퍼져있는 나라의 이름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마법 왕국, 연합 왕국, 사막 왕국, 오도깨비 왕국입니다. 로밀린 정도가 뜻 모를 이름이네요. 사실 이름을 쉽게 짓는 특징은 작품 자체의 제목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시오레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빼면 용사의 모험이 제목이니까요.
꽤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스케일이 큰 모험이 펼쳐지지만 이야기의 분위기는 무겁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읽다가 이 사람이 누구였더라, 어디 나왔던 사람이더라 하면서 다시 되짚어 갈 일도 없습니다. 익숙한 구조와 신선한 요소를 적당하게 섞어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서 읽는 사람의 부담을 최대한 줄이려는 작가님의 노력이 느껴집니다.
주인공인 시오레는 하녀 출신의 당찬 소녀지만 뭔지 모를 특별한 능력 탓에 모험에 뛰어들게 됩니다. 이야기가 조금 심각해지려고 하면, ‘저기, 그건 됐고요.’ 식으로 치고 들어오면서 분위기를 풀어 놓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네요. 아마 <짧은 판타지>의 차분한 옛날 이야기 분위기가 딱 마음에 드셨던 분은 이렇게 자꾸 가볍게 떠 버리는 게 별로 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반반이었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모두 뒤섞여 이 이야기는 잘 짜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겉멋을 쏙 빼 담백하면서도 심심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그런 동화같은 서사시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장점으로만 가득한 건 아닙니다. 정형화된 세계관의 익숙함을 즐기시는 분들은 서양적 요소와 동양적 요소가 맥락없이 뒤섞인 세계관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플롯은 타이트하게 꽉 짜여 있지는 않아서,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세계가 망해가고 있는데 유람하는 느낌이 난달까요. 겉멋을 빼는 주인공들의 가벼움이 때로는 과해서 분위기가 깨지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야기를 읽으며 <어스시의 마법사>가 생각났습니다. 일단 작가님이 체력을 좀 추스리신 후, <짧은 판타지>의 분위기를 유지하며 장편을 쓰신다면 충분히 그런 소설이 나올 것 같습니다. 용사 이야기 보다는 <오르배 섬> 이야기 처럼 꿈결같은 모험 이야기가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요. 사실 그런 이야기들은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내 작가님의 필력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시오레의 세계에서는, 개성있는 등장인물들이 왁자지껄 모였다 헤어졌다 다시 모이면서, 마법 왕국, 사막 왕국, 오도깨비 왕국, 로밀린 왕국, 고래섬 등 전 세계를 누비며 모험을 펼칩니다. 일개 하녀였던 시오레는 몸 속에 지닌 비밀스런 능력과 타고난 씩씩함을 무기로 결국 어둑시니, 두억시니, 믄달시니, 해올시니와 같은 신들의 싸움에 끼어들어 세계를 구해냅니다. 작가님의 부드러우면서도 둥글둥글한 글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그 여행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마법과 기사의 세계에 도깨비가 등장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으시다면, 한 번 여행을 시작해 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