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에 구원의 여지는 있는가? 공모(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소등 모음집) –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작가: 매도쿠라, 작품정보)
리뷰어: soha, 17년 7월, 조회 9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처음 미키를 20xx년 12월 31일에서 20xx년 12월 25일로 전송했을 때, 왜 ‘나’는 노트에 실험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실험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까? 만약 미키의 전송과 함께 20xx년 12월 25일 이후의 세계가 모두 바뀌었다면 20xx년 12월 31일의 ‘나’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기억이 없다. 소설 전체를 살펴보아도 ‘나’는 항상 실험의 결과를 노트에 적힌 실험 결과로 알아차리며 ‘나’의 기억은 시간여행 실험과 관계없이 늘 일정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설 속 세계의 규칙에 대해 한 가지 가정을 도입할 수가 있다. 시간여행을 할 경우 시간여행의 도착 지점에서 세계가 분기되는 것이다. 미키를 20xx년 12월 31일에서 20xx년 12월 25일로 전송했을 때, 20xx년 12월 25일을 기점으로 하여 미키가 미래로부터 전송되지 않은 세계와 미키가 미래로부터 전송된 세계 2개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기억이 일정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는 미키가 미래로부터 전송되지 않은 세계에 있는 것이다. 이 때 노트는 두 세계를 잇는 매개체가 되어 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여행의 출발 지점이면서 시간여행으로 바뀌지 않은 세계와, 시간여행의 도착 지점이면서 시간여행으로 바뀐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단서를 바탕으로 이 세계관에서 과연 주인공들이 구원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효정을 구하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생각해볼만한 것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첫 번째 시간여행 실험에 따라 20xx년 12월 25일에서는 미키가 미래로부터 전송되지 않은 세계와 미키가 미래로부터 전송된 세계 2개가 생성되었다. 미키가 미래로부터 전송되지 않은 세계에서는 소설에서 서술된 것처럼 무리 없이 이야기가 흘러간다. 문제는 미키가 미래로부터 전송된 세계에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가정을 해보려고 한다. 1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는 특별히 많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1주일 동안 약간 더 연구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지만 불필요한 패러독스로 인한 위험을 막기 위하여 ‘나’는 실험을 성공시킬 것이며, 자신이 알고 있던 대로 미키를 20xx년 12월 25일로 전송시킬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미래의 행한 일이 과거의 일의 원인이 되는 순환 고리를 안정적으로 형성시킬 수 있다.

자 그러면 20xx년 3월 29일로 미키의 털과 효정을 구할 정보를 전달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자. 위에서 가정한 바와 같이 시간여행 실험을 과거로 한 순간 20xx년 3월 29일을 기점으로 두 가지 세계가 생성된다. 소설의 흐름에 따르면 이 중 미래로부터 미키의 털과 정보를 받은 세계의 경우 20xx년 3월 30일에 효정이 죽는 것으로 세계가 변경되었다. 그렇다면 20xx년 3월 30일에 효정의 죽음을 겪은 ‘나’는 열심히 연구를 진행하여 결국 효정을 구할 수 있는 걸까?

여기서 이 소설의 가장 낭만적이면서도 등장인물의 구원을 극적으로 방해하는 장치가 논리 전개를 가로막는다. 효정이 ‘나’로부터 팬던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거의 사실은 19xx년 5월 5일에 일어났으므로 지금까지의 시간여행들로 인한 세계의 분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분기된 세계들 중 어떠한 세계에 있든 효정이 펜던트를 ‘나’로부터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과거로 출발해야만 하며, 이를 위한 동기가 필요하다.

만약 ‘나’가 효정의 죽음으로만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등장인물들에게는 해피엔딩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효정이 ‘나’로부터 펜던트를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므로 이를 위한 동기도 미래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 따라서 효정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수없이 많은 ‘나’는 3월 29일 근방에서 시간여행에 따라 끝없이 분기되는 세계 속에서 효정을 구하고자 몸부림치겠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만약 ‘나’가 효정의 죽음 없이도 과거로 돌아가서 펜던트를 건네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어떨까? 이 경우에는 효정이 더 이상 죽을 필요가 없어지고, 수없는 시간 여행을 통해 효정을 살릴 수 있는 세계를 찾아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여전히 효정에게 팬던트를 주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나’와 효정에게 해피엔딩으로 갈 만한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주제를 퇴색시키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파괴할 수도 있겠지만 등장인물들에게는 여전히 구원의 여지가 있다. 우선 3월 29일 근방의 죽음으로부터 효정을 구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 후 효정으로부터 19xx년 5월 5일에 일어난 일을 자세히 들어야 한다. 최대한 정확하게 그 날에 있었던 일을 파악한 다음 ‘나’와 아주 닮은 배우를 고용한다. 이 때 이 배우는 19xx년 5월 5일 이후로 이어진 효정의 삶과 ‘나’의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어야만 한다.

이 배우가 19xx년 5월 5일로 시간여행을 할 경우 배우가 19xx년 5월 5일로 시간여행을 한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로 분기가 발생한다. 이 중 배우가 시간여행을 한 세계의 경우 ‘나’는 효정을 위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할 필요가 더는 없어진다. 만약 배우가 그 이후의 효정과 ‘나’와의 삶과 전혀 관계가 없었으며, 죽는 때까지 정확히 효정의 원래 기억대로 움직여준다면 그 후에 일어날 일은 효정과 ‘나’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결말로 가는 길이 열린다.

하지만 여기서 마지막으로 행복한 결말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 19xx년 5월 5일부터 이야기를 다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소설에서 겪었던 원래 일들, 즉 20xx년 3월 29일에 효정이 죽는 세계가 이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 따라서 시간 여행 실험을 통해 효정이 죽지 않는 세계를 다시 찾아나서야 한다. 또한 세계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배우가 ‘나’인 것처럼 속여서 19xx년 5월 5일에 효정을 만났으므로 효정은 그 때 만난 것이 ‘나’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효정을 구한 후 배우를 고용하지 않고 ‘나’가 직접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들이 다 허사가 된다. 소설에서도 나왔듯이 인과율이자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영원토록 이 시간여행을 반복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분기를 만들며 시간 속을 헤쳐나간다면 아무리 작은 확률로 일어날 일이라도 한 번은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기적적인 일이 일어난다면 ‘나’와 효정은 이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고,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감겨 있던 뱀은 마침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비극으로부터 벗어나 ‘나’와 효정이 20xx년 다음 년도의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세계에 함께 도달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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