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체로 그렇지 않지만, 이웃 간 소통이 활발하던 과거에는 마을마다 전해오는 괴담이 있었다. 모든 이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불가사의한 죽음이나 신비스러운 사고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곤 했다. 물론 누군가 위험에 처한다는 건 한편으로 안타깝지만, 어째서 멀쩡한 사람이 뭐에 홀린 것처럼 갑자기 골짜기에서 뛰어내렸는지, 왜 그이가 빠진 계곡에서는 물살이 다른 날보다 셌는지 추측이 꼬리를 물다 보면 때로 귀신과 유령의 힘이 가미된 이야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우선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나면, 그리고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치 않게 된다. 이 산에서 죽은 누가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원귀로 되살아나 집집을 돌아다니거나 저 개울에서 빠져 죽은 아이의 귀신이 물길을 흔들어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등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그곳 특유의 전설이 되곤 했다.
도시에도 괴담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골 괴담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해진다. 최근 생산되는 도시 괴담은 개인의 창작이나 경험을 텍스트나 영상으로 다수에게 공개하는, 일방적인 경우가 많다. 그것들은 무한한 상호작용을 거치며 수정되거나 구전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손끝에서 현대적이고 깔끔하며 기이한 괴담이 탄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민담’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공동체가 해체되고 소통이 끊기고, 이웃의 경조사에 크게 관심이 없어진 도시에서 이야기는 생동하기 힘들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사고의 소식을 한 겹 액정 너머로 듣는 일이 허다하고, 마을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장소는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누군가에게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어쩌다 찾은 뒷산 입구나 근처의 문화재 안내문에서 읽은 내용을 띄엄띄엄 말해줄 것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는 괴담은 이제 희귀하다. 누군가는 민담을 보존하려 하지만, 그들의 손이 닿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가 소멸의 길을 걷고 있다는 건 창작 괴담의 원형이 사라지는 것과 같아 안타까운 일이다.
신을 모신다는 나무와 요물이 된 빗자루, 하다못해 뒷간 귀신의 이야기도 정겨운 이유는 그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구전’ 설화의 최대 특징은 많은 이의 입을 통했다는 것이다. 상대의 표정과 반응, 응답에 따라 이야기는 더욱 재미있는 방향으로 변형된다. 그렇게 문자가 아닌 입으로 정제된 설화의 맛은 텍스트가 써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수하다. 모두의 입맛을 맞추는 이야기의 힘은 그곳에서 생긴다.
여기 아주 오래전, 이야기쟁이 친구를 기억하는 한 여성이 있다. 그 친구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에게 동네의 시시콜콜한 전설을 말해주곤 했다. “저 계단은 쓰지 마라. 일 년에 꼭 한 명씩 굴러서 죽는다. 저 집에선 불이 나서 일가족이 죽었다. 비 오는 날엔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친구가 어째서 갑자기 생각나는 건지, 여자는 노쇠하여 기억이 띄엄띄엄한 아버지에게 친구와의 추억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우리 옆집에 내 친구. 은이”라고 다정하게 시작하는 회상은, 말 건네는 투와 평서문의 서술을 오가며 점점 깊이를 더한다.
은이, 그녀의 친구가 전해주던 괴담은 거의 ‘케케묵은 농담’이었다. 알고 보면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달변의 혀로 꿰어 내는 재주가 있던 모양이다. 언제나 ‘나’는 은이의 이야기에 넘어가는 쪽이었다. 그러고도 곧잘 그 말이 거짓인 걸 깨닫는 모양이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은이의 말을 그냥 이야기로 듣게 된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하지만, 끝까지 그래서는 안 됐다. 은이의 괴담에는 진실도 있었으니.
이것은 ‘나’와 그의 친구 ‘은이’의 아주 오래된, 으스스하고도 충격적인 학창 시절에 관한 괴담이다.
밤에 혼자 걷지 마라. 함진아비가 따라온다.
은이는 언젠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을에는 혼자 걸어 다니는 아이들을 노리는 함진아비 귀신이 있다. “지독한 놈이야. 마당에 달라붙어 그 집 딸을 데려간대”. 함진아비는 전통적인 결혼식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함을 지고 가는 사람을 말한다. 그의 얼굴에는 본래 액운과 부정을 막는 검댕을 바르는 풍습이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오징어 가면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가면’을 쓴다는 점에서 함진아비 귀신에게는 얼굴을 숨기고 있다는 비밀스러운 속성이 부여된다. 그는 어떤 얼굴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함진아비에게는 여러 특징이 있다. 그가 들고 있는 함을 사면 그 안에 든 몽달귀신 사주 때문에 남편 자리에 귀신이 든다. 함진아비는 돈귀신이기 때문에 지전을 바닥에 둥글게 깔면 그것을 따라 빙글빙글 돌기 때문에, 그 틈에 달아나면 된다. 마지막으로 귀신의 앞에서 웃으면 안 된다. 일종의 규칙처럼 작용하는 이 특징들은 함진아비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쉽게 그려낸다. 독자들은 속으로, 저도 모르게 은이의 말에 따라 함진아비 귀신을 만났을 때의 주의사항과 행동 요령의 목록을 나열한다. 우선 함을 사지 않고 귀신의 주변에 지전을 깐다. 그리고 웃지 않은 채 자리를 피한다. 이게 뭐가 어려울까.
“누가 귀신을 보고 웃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독자의 마음에도 같은 생각이 든다. 사람을 잡아간다는 무시무시한 귀신을 만났을 때의 대처요령치고는 쉽고 간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모든 공포 소설의 금기는 깨지기 마련이다. 어떤 일도 당하기 전에 예측해서는 안 된다. 특히 그 일이 공포 소설 안에서 일어난다면.
‘나’는 함진아비 귀신을 만난다. 야밤에 들려오는 “함 사시오!”라는 말에 쿵 내려앉는 심장.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나’가 느꼈을 두려움이 문장의 마디마디에서 만져진다. 시체의 얼굴에 오징어를 붙여 놓은 모양. 그것의 생김새는 생각보다 훨씬 고약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내려진 지침은 간단하지 않았는가. ‘나’는 다행히 정신을 차려 지전을 바닥에 깔고 함진아비는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변수가 발생한다. 방금까지 죽음을 몰고 올 것만 같던 귀신이 고작 지전 하나 바닥에 깔았다고 그 위를 조심조심 밟으며 맴돌고 있다. 금기는 이때 깨진다. 귀신이 웃기고야 만 것이다. 함진아비가 돈 위를 걸을 때 웃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 돈이 가짜였기 때문이다. 돈귀신에게 가짜 돈으로 장난을 치면 그 후폭풍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돈을 밟는 함진아비를 비웃으면 가짜 돈이 탄로 난다는 것이 금기의 의미였다. 분노한 함진아비의 발밑에서 지전이 찢어진다.
앞집 처녀는 시집을 가는데 뒷집 총각은 목매러 간다.
함진아비가 부르는 끔찍한 노래의 가사는 그 함에 담긴 것이 몽달귀신의 사주임을 암시한다. ‘나’는 괴기스러운 노래와 함진아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달음박질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나’에게 질문을 쏟아내는 친구 ‘은이’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 죽음의 목전에서 살아 돌아온 친구에게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는커녕 다그치듯 이것저것 묻는 은이의 매정함에 ‘나’가 상처를 입는 것도 다정하다. “설마 함을 산다고 하진 않았지?” 막말로 함을 샀다고 해도 남편에게 귀신이 붙는 건 ‘나’일 텐데 ‘은이’는 왜 그런 호들갑을 떨었던 것일까.
〈명랑한 함진아비〉는 구조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이야기와 이야기의 경계 내지는 변곡점이 되는 반전이 두 번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나’의 아버지로부터, 다른 하나는 ‘나’라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함진아비를 만난 ‘나’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 서술자의 회상 시점이 가까운 과거로 당겨진다. 은이의 결혼식에서 ‘나’의 아버지에 관한 진실과 숨겨져 있던 반전이 밝혀진다.
돈귀신 함진아비는 왜 ‘나’를 찾아왔던 것일까. 그건 바로 ‘나’의 아버지가 돈귀신에 홀렸기 때문이다. 은이의 집에 돈을 훔치려고 들어간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혼비백산해서 안긴 ‘나’가 함을 사겠다고 소리친 순간, 귀신은 은이네 집 마당에 있었다.
“마당에 달라붙어 그 집 딸을 데려간대”
금기 사항에 집중하느라 한 줄 대사로 지나가 버린 함진아비의 특징 중 하나는 대문 안까지 쫓아와 마당에 들러붙는다는 점이다. 귀신은 ‘나’가 아닌 은이의 집 마당에 붙었다. 그래서 은이는 ‘나’에게 함을 사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이다.
돈귀신 함진아비는 은이의 삶을 망가뜨렸다. 하지만 은이의 삶을 진짜로 망가뜨린 건 ‘나’의 아버지였다. 귀신은 그의 은유일 뿐이다. 은이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돈을 훔친 것으로 모자라 그 돈으로 경찰을 사고 은이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등을 떠밀다시피 한 ‘나’의 아버지는 이 소설에서 어떤 악귀보다 징그러운 사람이다. 지켜줄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남겨진 한 소녀가 모두에게 신뢰를 잃도록 한 그는 결국 과거의 기억을 점점 잃어가며 병원에 누워 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딸이 아닌 은이가 있다.
웃으시니 좋네요.
후반에서 밝혀지지만, 아버지에게 다정하게 옛이야기를 전해주는 ‘나’는 그의 딸이 아닌 은이다. 돈귀신에 홀렸던 ‘나’의 아버지가 은이네 집을 뒤졌다는 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등골이 주뼛 서게 하는 반전이다. 이 소설은 아버지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투의 서술과 평서문의 일반적인 서술이 교차한다. 작가는 처음부터 독자가 두 서술을 모두 ‘아빠’의 딸인 ‘나’로 착각하도록 한다. 소설의 시작부터 화자의 정체가 밝혀지기까지, 두 일인칭 서술자 중 하나가 은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독자는 서술 ‘방식’이 바뀌었을 뿐 발화자가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은이가 남자를 ‘아빠’라고 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중 현재 아버지를 돌보고 있는 건 ‘은이’다. 은이는 스스로 ‘나’라고 칭함으로써 이름을 숨긴다. 독자는 소설의 전모를 알기까지 두 명의 ‘나’가 같은 사람인 줄 안다. 그러나 ‘아빠’에게 직접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은 ‘나’의 어린 시절 친구인 은이다. 이것이 소설 속 두 번째 반전이다. 독자는 아버지의 곁에 있는 사람이 진짜 딸이 아닌 ‘은이’라는 것을 깨닫고 경악한다. 이로부터 서스펜스가 만들어진다. “기억은 없어도 죗값은 치러야 하지 않겠어요?” 이야기는 끝나지만, 복수는 이제 시작이다. 아버지와 그의 딸 ‘나’의 앞에 악몽과도 같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 암시되며 소설은 끝난다.
이 단편은 분량에 비해 내용이 꼼꼼히 차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이유는 반전의 구조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의 진행에는 두 번의 변곡점이 있다. 아버지가 ‘은이’에게 행한 잔인한 행동, 그리고 간병인의 정체는 이야기의 흐름을 두 번 꺾으며 소설을 세 덩어리로 나눈다. 글은 세 부분으로 나뉠 때 가장 안정된다. 소위 논제를 풀어내는 글의 기본 구조를 서론-본론-결론이라 하며, 극의 기본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또한 이야기에는 처음, 중간, 끝이 있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대부분 드라마나 시나리오가 3막의 구성을 따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명랑한 함진아비〉는 두 번 꺾어지는, 세 덩어리의 이야기다. 서사의 높낮이를 자연스러운 반전으로 과감하고 명징하게 변화시켰기에, 이 소설은 높은 밀도로 완성될 수 있었다. 단순히 독자에게 감정적인 긴장감을 전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구조적인 안정감을 주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돋보인다. 으스스한 사건에 꼭 필요한 인물만 등장시키는 센스와 그 인물을 십분 활용해서 두 번의 반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군더더기가 없다. 어떤 복선도 낭비되지 않았으며, 씨실과 날실이 고르게 직조되어 짧지만 정갈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내용의 완성도가 높으면 제목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소설의 제목은 왜 ‘명랑’한 함진아비일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제목에서 찾는 경우는 오랜만이다. 오히려 어두운 소설의 내용과 대비되며 기묘한 밝음을 만들어내는 ‘명랑’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괴이해 보일 수 없다. 누구도 웃을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노래 부르는 함진아비의 송장 같은 얼굴이 다시금 떠오른다. 아, 은이도 마지막에 노래를 불렀던가. 그에게도 귀신이 붙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돈귀신 괴담이 내려오던 작은 동네에서 귀신보다 더 무서운 사람에 의해 망가진 인생. 은이에게 찾아온 복수의 기회는 갑작스럽지만 달콤하다. 어떤 귀신도 사람보다 무서울 수는 없음을 증명하는 많은 이야기 중 가장 으스스하고도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이 소설의 끝에서 다시금 큰 숨을 내쉰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숨 쉬는 것을 잊었던가. 처음부터 심장을 조이듯 몰려들던 긴장감이 속에서 탁, 하고 풀어지는 느낌이다.
close to you, close to you.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온다. 오징어의 탈을 쓴 시체, 일수도. 사람의 탈을 쓴 귀신, 일수도. 그도 아니면 명랑하게 노래하는 재앙, 일수도.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확실한 욕망으로 가득 찬 ‘그것’.
천천히 다가오는 그에게서 어떤 잔혹한 바람hope이 불어 온다. 바람wind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모쪼록 죗값을 치르시길. 귀신보다 더한 인간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