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장르가 나와는 인연이 없다. 아마도 장르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내가 주요하게 관심을 갖는 몇 개의 장르 외에는 문외한에 가깝다. 어쩌면 로맨스보다 하드보일드를 더 모를 수도 있다. 내가 하드보일드에 대해 아는 거라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정도일까.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라는 작품도 알고는 있지만, 읽어본 적은 없으니 지식이라곤 말할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드보일드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냥 내 기분이 그렇다.)
내게 처음으로 하드보일드를 알려준 것은 스티븐 킹의 소설 ‘메르세데스 킬러’였다. 섹스와 총성이 적절히 어우러진 소설이었다. 작중 주인공은 50대의 전직 형사였고, 그 스트레이트한 성격이 잘 드러나는 직업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퇴직의 여파로 비만이 된 전직 형사는 하드보일드의 참맛을 끌어올리기에는 약간 부족해보였고, 때문에 나는 소설 메르세데스 킬러를 ‘찌질한 하드보일드’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하드보일드를 알려준 것은 어쩌면 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돈 받고 사람을 죽이는 청부살인업자, 즉, 히트맨이다. 그렇지만 사사롭게 목숨을 뺏는 것 같지는 않다. 경찰 쪽(정확히는 경찰 개인)의 의뢰를 받아서 범죄자를 처단한다. 이것은 수동적인 배트맨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쭉쭉 읽어내려갔다. 따까리를 죽일 때,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이 좋았다. 이것이 문장과 문단이 하드보일드다! 라고 내게 소리치는 듯했다.
다만, 결말은 조금 애매했다. 부연설명이 너무 없었달까. 곁가지 없이 빠르게 나아가는 것이 하드보일드의 작법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끝내는 것은 (적어도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물론 결말의 구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 좋았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그 맛이 훌륭했다. 그러나 소설은 결말 만으로 존재할 리가 없다.
경사(?)가 등영이 통수치는 까닭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제일 답답했다. 단순히 코카인 빼돌리려고 그러는 건 아닐 것이다. 등영이 혼자 홍콩 코카인 30%를 공급한다는 것은, 다른 판매자들이 가진 물량이 시장의 70%만 공급할 수 있는 정도여서가 아니라, 등영이가 구축해놓은 판매 루트가 그만큼 괜찮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경사가 등영이 통수치고 물량을 빼돌린다고 예전처럼 30%를 공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코카인은 파는 것만큼이나 사오는 것도 중요하다. 경사가 경찰 관두고 아예 등영이 자리를 먹고 중간마진을 떼먹으려고 하는 걸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연설명이 없으니 당황스럽긴 매한가지다. 적어도 경사가 어떤 마음가짐인지 낌새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뜬금없는 소리를 해보자면, 내 문체적 스승은 김훈이다. 문장은 짧게 쓰지만 문단은 두껍게 마련한다. 단순한 문장을 여러번 구사하여 묘사의 깊이를 만든다.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문장을 짧게 쓰는 것은 같지만, 문단을 두껍게 만들지 않는다. 문단마저도 짧게 잘라내어 독자로 하여금 빠르게 읽어내려가도록 만든다. 문단을 잘라낸다는 것은 묘사를 덜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최소한의 문장으로 필요한 묘사를 모두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역시 문단은 조금 더 두꺼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있었다. 추가적인 묘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 정도의 문단을 하나로 합치는 식을 말하는 것이다.
하드보일드와 느와르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서 홍콩 느와르 영화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 시대의 사람이 아닌지라 홍콩 느와르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스틸컷으로 스쳐지나간 장면들이 이 작품의 느낌과 비슷했다. 약간 물 빠진 듯한, 가짜 위스키 같은 맛(?). 이 작품을 읽고나니 내 한참 윗세대가 왜 홍콩 느와르 영화에 미쳤던 건지 조금 알 것 같다.
여러모로 공부가 된 좋은 글이었다.
그렇지만 이게 왜 뱀일장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이거 뱀이랑 별로 관련 없는 거 아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