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가 된 엄마와 남산에 간다면?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엄마A 그리고 좀비 (작가: 배일랑, 작품정보)
리뷰어: 이유이, 23년 10월, 조회 76

소설<엄마A 그리고 좀비>를 끝까지 다 읽고 나는 울었다. 카페였고 사람이 많았다. 소리 없이 조용히,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좀비를 소재로 한 소설을 보고 울어본 적이 있던가.. 회고해 봤을 때 ‘처음’이었다. 그래, 바로 이 ‘첫’에 대한 감정을 품고서 리뷰를 시작해 보겠다. 하나 말하고 지나가자면 나는 ‘신파’를 극혐한다.

특히 한국형 신파의 경우 보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는 편이다. 굳이 열거하진 않겠지만, 몇몇 개의 천만 영화라던가…만 말해도 알 것이다. 좀비물에서 예를 들자면, 영화 <부산행>을 영화관에서 보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지 말자, 저렇게는 가지 말자, 저렇게 울어라 막 하지는 말자… 하다가 예상대로 가버려서 내적으로만 소리를 지르고 ‘넋이 로그아웃’되었다. 그 전까지 좋았던 모든 액션씬들(맨손으로 격투하는 좀비물이라니 재밌었다)이 모조리 그 신파에 묶여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부산행>을 그 뒤로 그 어떠한 누구에게도 추천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눈물을 짜내려는 ‘심보’가 보이는 것을 싫어하며 그럴 것 같은 기미에 예민하다. 의도하지 않아도, 그 인물의 서사와 감정과 모든 상황이 차곡차곡 쌓여서 그 인물의 감정에 ‘공명’하게 되면서 울리는 게 <진짜>라고 생각한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혹자는 좀비물, 좀비아포칼립스라고 하면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서 마구 쫓아오는 ‘괴수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나는 언제나 ‘휴먼 드라마 장르’라고 생각했다. 휴먼 드라마란 인간의 삶을 소재로 하여 감동을 주고, ‘인간’과 세상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장르를 일컫는 말이다. 인간들은 본인이 어떤 이유로 태어난지 모르며, 모든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당연한 진리다. 그런데 ‘좀비물’은 바로 그 진리를 비틀어버리는 데서 흥미롭다. 죽은 뒤에 육신에는 영혼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한데, 좀비들은 분명 죽었는데 살아 있고, 영혼은 사라진 듯하나 움직이며 다만 식욕이라는 ‘욕망’ 하나를 갖고 있다. 물론 여러 형태로 변형되었고, <웜바디스>처럼 심장이 뛰며 사람 같이 사고하는 좀비가 출현하기도 하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익히 아는 클리셰적인 좀비’에 대해 말하려 한다. 바로 이 소설 <엄마A 그리고 좀비>에서 그려내는 좀비도 그런 양상이니까. 알 수 없는 이유로 좀비가 된 이들은 다른 이들을 물어 뜯어 좀비화시키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로부터 도망쳐야 하며 ‘다행히도’ 좀비들의 달리기 속도나 근력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이라 ‘야구 배트’ 하나만 있어도 제압 가능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경기도 외곽에서 서울로 ‘유학’ 온 대학생이다. 울산 출신의 엄마는 언제나 서울을 동경했고, 남산에 꼭 가고 싶다고 했다. 학력고사 날 긴장한 탓에 경기에 있는 대학에 온 탓인지, 서울 취직에서 실패한 탓인지, 오래도록 지병을 앓던 아빠가 바람을 핀 탓에 이혼을 한 인생사가 고단해서인지, 아니면 그 모든 이유들 때문인지 주인공은 들여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주인공 ‘나’의 입장에서는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남산 타령을 하며, 나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품고 있는 엄마란 존재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믿는다’라는 말은 너무도 버거운 말 중에 하나다. 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을 심어줘서다. 물론… 이 ‘믿음’을 배반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기에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나’는 엄마에게서 스스로 놓여줄 생각도 없으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신실한 믿음’을 보이며 ‘우상화’하는 엄마를 경시했다. 어쩌면 엄마는 영원히 곁에 있을 거란 착각에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죽었다. 다름 아닌 좀비에 의해서, 잔혹하리만치 ‘3갈래’로 찢겨서.

‘나’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와 잠든 덕에 살았다. 그 밤에서 새벽 사이에 이 세상은 좀비들에 의해 점령 당했다. 음식 솜씨 없는 엄마가 딸 생일이라며 냉장고에 차곡차곡 채워둔 반찬들 덕에 재난의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다. 학점이며, 울증으로 괴로웠던 상태에서 엄마에게 화를 냈던 게 엄마와의 마지막 추억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화자는 ‘덤덤하게’ 서술한다. 재난이 발생하고 3주가 지난 날에야 집에 도착해서 엄마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조차도 화자는 울지 않는다. 피 웅덩이 속에서 발견된 3갈래의 엄마를 끌어 안고, ‘계란말이 싱겁더라, 그래도 다 먹었어”라고 중얼거렸을 따름이다. 엄마는 죽었고, 동시에 살아 있다. 3갈래로 찢겼지만 머리가 붙어 있는 조각에 A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가 남산을 보러 나서기로 결심할 이유다.

수없이 많은 순간이 있었다. 무수한 시간들이 있었다. 엄마를 남산에 데려갈 모든 나날들을 흘려보내고 딸은 이제, 죽었으되 죽지 않은 좀비 엄마의 조각과 함께 남산으로 떠난다. 이 소설 <엄마A 그리고 좀비>는 ‘나’의 자취방에서 경기도 외곽의 빌라로, 그곳에서 다시 ‘남산’으로 향하는 여정을 다룬 소설이다. 우울하거나 서글프지만은 않고 조금 더 액티브하다. ‘나’는 그저 떨면서 좀비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는 이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야구 배트’로 좀비의 머리를 날리며 자기가 갈 길을 개척하는 종류의 사람이니까. 이 ‘야구 배트’ 휘두르는 것은 엄마에게 배웠고, 엄마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너무도 닮았던 두 사람은 한 사람이 죽고 난 이후에야 함께 살을 맞대며 걷는다. 오래도록 걸어가며 때론 엄마의 조각을 넣어둔 백팩이 ‘나’에게 너무 버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버리지 않고 기어이 남산에 도착하고야 만다. 서사는 단순하나,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은 너무도 ‘진심’이었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으며 운 것은 내가 갖고 있는 백그라운드 서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믿는다’라는 말에 노이로제를 느낄 만큼 책임감이 강했고, 나 역시 지방에서 상경했다. 서울에 가지 않으면 ‘일자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대다수의 청춘들은 ‘서울’로 향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거나, ‘서울’ 안에 자리 잡기 위해서 버티고 또 버티고 있을 테다. 그러한 시간들에서 가장 홀대 받기 쉬운 것이 가족, 그 가운데서도 어머니다. 대중교통 타고 간단히 갈 수 있던 남산을 주인공 ‘나’는 야구 배트를 휘두르며, 한참을 걷고 걸어서, 좀비와 좀비의 조각들과 죽어 있는 시신들을 넘어서 겨우 도착했다. 이 고난의 여정이 흥미롭게 잘 그려지기 때문에 나는 마지막에 남산에 도착했을 때 장면이 참 좋았다. 세상은 망했는데 풍경은 여전하다. 바이러스가 출몰해도, 온갖 일들이 자행되어도 내일의 태양은 뜨고, 설사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세상의 풍경은 여전히 평화로울 것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참, 버겁다. 여러 곡절을 겪으며 우리는 끝없이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어차피 죽을 것이 예정되어 있으면서, 사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라고 아등바등대는 게 인간이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누구든 짓밟으면서 또 어느 날엔 누군가를 살리기도 하는 인간의 ‘본성’이 잘 보여지는 게 바로 좀비물과 같은 재난 소설이다. 이 소설을 보면서 나는 그 아등바등대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나 생각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이 악물고, 세상을 향해 소리 쳐봐야 해결되는 건 없는데도 자연히 그렇게 되면서 우리는 ‘말랑거리는 마음’을 자꾸 잊는다. 때론 그 ‘말랑거림’을 멍청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린다. 청명한 가을의 하늘, 노을 사이로 붉게 마지막 기운을 뿜어내는 저녁의 태양 그리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물결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멍- 하니 있다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도 그 사소함도 ‘행복’이다. 다음에, 더 잘 되면, 나중에… 라고 미루며 잊기 쉬운 가족과의 추억 역시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시간 동안 우리는 무얼 그리 힘겹게 내달리고 내달리는 걸까. 그럼에도 내일이면 다시 또 ‘무언가’를 하게 되고야 말겠지만 잠시 이 소설을 읽으며 ‘멈출 수’ 있어서 좋았다.

울고 싶을 땐 울고, 풍경을 보고 싶을 땐 풍경을 봐도 좋다. 이야기하고 싶을 땐 하고, 우울할 땐 우울해도 괜찮다. 남이 뭐라고 하든 내 감정을 다 표현해 봐야 한다. 이 소설 속 모녀가 갈등하게 된 이유는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끝없이 외면해 온 모녀는 좀비떼가 창궐한 이후에야 제대로 된 소통을 하게 된다. 바로 그래서 더 애처롭다. 대답할 수 없는 엄마에게 무수한 말들을 던지며 스스로도 떠들어대는 ‘나’가 너무도 외로워 보여서. 닿을 수 없는 이를 향한 서글픈 독백 끝에 이 소설은 끝난다.

허나 주인공 ‘나’도, 나 역시도 안다. 이 소설 마지막의 문장들처럼 <억수로 고맙다 우리 딸. 여까지 왔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는 니밖에 없다. 엄마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니까. 이것은 살아 있는 자가 마음 편하려고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일 수도 있다. 미련이 남지 않게끔, 조금의 미안함이라도 남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써보는 것이며, 엄마를 향한 ‘효심’이라기 보다 주인공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이러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우니까. 산 사람은 ‘어쨋거나’ 살아야 하니까… 스토리로 읽는 소설이 아니기에 결말까지 러프하게나마 이야기해 봤다. 이 소설 도입부를 지나서 주인공이 엄마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을 본 순간 독자들은 이미 안다. ‘클리셰적’으로 두 사람은 남산에 도착하겠구나… 하고. 그럼 중요한 건 ‘어떻게’ 가느냐는 것이다. 그 지점에 집중해서 이 소설을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 길지 않은 소설 속에 참 많은… 감정들이 ‘덤덤하게’ 담겨 있어서 더 마음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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