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여동생의 잘못으로부터 시작된다. 독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챈다. 이 이야기에는 여동생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잘못 또한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을.
어떤 일의 잘잘못을 따진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제가 더 많이 다쳤어요. 쟤가 먼저 때렸는 걸요. 그렇지만 니가 먼저 욕했잖아. 물건을 부숴놓고 사과를 안 한 건 넌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논리에 약간의 비약을 추가한다면, ‘그런 성격의 아이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모든 과거는 기계론적 결정론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모든 변수를 완전히 똑같게 재현한다면, 그에 따른 결과도 완전히 똑같을 수밖에 없으므로. 다만 우리는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수많은 가정법을 되뇐다. 그때 그걸 했었더라면, 하지 않았더라면, 알았더라면 혹은 몰랐더라면. 그래, 네가 그 잘못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을 단순히 당사자의 사고 편향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 말은 참이다. 실제로 사건에서 ‘누군가의 잘못’을 떼어내면 그 사건은 성립되지 않는다. 누구나의 잘못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서로의 흠결을 천칭에 재어 저 사람이 더 잘못했다고 소리 높이길 그치지 않겠지만.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잘못이 얽히고설켜 있다 하더라도, 그 잘못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눈을 돌려버렸다. 이해의 포기는 불가해로 확장된다. 불가해는 마왕성이라고 하는, 환상적 알레고리로 화한다. 우리는 그 알레고리 아래에서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마왕을 죽이는 것은 용사다. 여동생은 오빠를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다.
여동생이 오빠에게, 어떤 기대를 얼마나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빠가 여동생의 일 이전에, 어떤 일들에서 얼마나 피로를 얻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것들이 화풀이나 이해의 포기로 이어져서는 안 되지만, 그런 현실이 만연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새삼 현실로 끌어내려진다. 무겁게. 무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