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긋나 있다. ‘뒤죽박죽’이라는 말을 세 번쯤 썼다가 어딘가 어색해서 골똘히 고민했다. 그러니까, ‘뒤죽박죽’처럼 혼란한 단어를 무작정 쓰기엔 (나를 제외한) 세계가 지나치게 고요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세상과 내가 반 발짝 정도 어긋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뒤죽박죽’에 관한 사유의 끝에는 항상 그런 결론이 있었다. 분노하거나 슬프거나 혼란한 건 내 머릿속이었다. 아침에 누군가 죽어도 저녁이면 고요한 이 땅에서 삶이 복잡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너만 그런 건 아니야’라는 말을 친구에게 숱하게 들어도, 딱 십 분만 지나면 ‘역시 나만 그렇구나’라는 확신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어쨌거나 화가 난 것도, 우울한 것도, 발을 구르는 것도, 목이 아픈 것도, 팔다리가 쑤시는 것도 나뿐이 아닌가.
한 건강기능식품 광고에서 사람의 주변에 비눗방울 같은 경계가 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광고에서는 비눗방울이 튼튼한 ‘면역력’을 상징했지만, 순간 그 비눗방울이 ‘나’와 ‘남’의 경계처럼 보였다. 매우 견고해서 사람과 사람이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못하도록 하는 투명한 막. 물론 광고의 내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마치 모든 사람이 같은 극을 띠는 거대하고 강한 자석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생각과 이해가 다른 상대를 마주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결코 터지지 않는 막에 밀려 미끄덩. 내가 미끄러진 적은 얼마나 많았나.
집에서 미끌, 사무실에서 미끌, 길에서 미끌, 버스 또는 지하철에서 미끌, 엄마 앞에서 미끌, 아빠 앞에서 미끌, 명절 친척들 앞에서 미끌, 친구 앞에서 미끌, 키보드 위에서 미끌, 때로는 원인 없이 미끌. 내 발바닥과 길바닥 중 어느 게 미끄럽기 때문인지를 따져보다가 에이, 그만둔다. 그러다 몇 번, 균형을 놓쳐 콰당 넘어지기도 한다. 엎어져 낮아진 시야에서 문득 발견하는 건 모두를 둘러싼 비눗방울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비눗물이다. 비눗물, 그건 눈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밀려나는 게 버릇이어서인지 언제부턴가는 발에 힘을 주고 걷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습관이어서인지 세상이 스스로 휘청이는 것도 같다. 이런 날이 반복되면 살아남기 위해, 어지럽지 않기 위해, 정신과 실제에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러니까 쉬운 컴퓨터 게임을 집중력 없이 하는 것처럼.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질문에 어, 어하고 건성으로 답하는 것처럼. 나의 비눗방울에 맺힌 세계의 상(狀)을 감상 없이 지켜본다. 어쩌면 이 심리적 거리두기가 어긋남의 출발이 아니었을까. 세상은 “나한테만 왜 이렇게 무례하고 위험하고 적대적”일까.
글로벌 시대에 외국어를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디지털 시대에 코딩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재태크의 시대에 투자 하나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서울에 그럴듯한 집 하나 없이는 어떻게 살아갈 텐가. 저 사람보다 더 노력하지 않고서는 도태될 것이다. 그렇게 이타적으로 물러터져서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치밀하고 도전적으로 미래를 계획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남은 하루의 분량이 무겁고, 만원 지하철에서는 목숨을 위협받는다. 지금도 내가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유가 대량생산되고 있다. 이러다 정말 질식이라도 하는 거 아닐까. 땅 위에서는 멸치가 살아남을 수 없고 바다에서는 인간이 살아남을 수 없듯이.
그러니까, 이상한 일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퇴사, 아니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거실에 웬 인어가 곱게 앉아 있다. 전날 회식 중 홧김에 주머니에 넣어 왔던 잔멸치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선가 나는 익숙한 약품 냄새. 인어는 세상의 시름을 잊으려고 사둔 금값의 술을 바닥에 다 부어놓고 그 위에서 헤엄친다. 야, 그건 내 재산인데! 외치기도 전에 잠깐. 근데 너, 어디에서 왔니. 어떻게, 아니 무슨 목적으로 온 거니. 왜 하필 골라도 여기니.
여긴 아시아 최상위권 대학을 나와 5개 국어에 능통한 사람들만 겨우 살아남는다는 대한민국이라고!
만약 꿈이 아니면 어쩌지.
꿈. 집에 잔멸치가 들어오는 꿈은 길몽일까, 흉몽일까.
환상은 현실을 환기하는 데에 사용된다. 어떤 환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철저히 현실의 이미지에 기반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니까, 이런 상상을 해보자. 이 ‘질식’할 것 같은 세상을 아예 바다로 만들어보는 거다. 세상의 마지막처럼 쏟아진 비로 모두가 물에 잠겨 허우적대는 세상. 사실보다는 환상에 가깝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잠겨 서서히 죽어가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환상 속 인물이다. ‘그’가 죽음의 목전에서 출퇴근 지하철보다는 물의 부드러운 밀도가 낫노라고 유언처럼 읊조리는 가정을 해보자. 그 대사 한 줄은 뜨겁게 부풀어 오른 대중교통의 압력에 관한 효과적인 환상 은유가 된다.
근데 이게 웬 잔멸치냐는 거다. 세상을 온통 물로 휩쓸어 담가버려도 출퇴근하며 꽉 막힌 속이 시원할까 말까 하는데, 기왕이면 그럴듯하게 상어나 고래(그래, 세상에서 제일 큰 생물이라는 긴수염고래)면 어디 덧나는가.
아니, 한켠 작가의 〈어느 날, 잔멸치〉는 그런 거대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 아니다. 그런 커다란 환상에 덜컥, 내어맡기기에 때로 우리의 삶은 작고 보잘것없지 않은가. 비뚤어진 세상을 타파하거나 바꿔보자는 식의 일반적인 거창함도 때로 무겁다. 그냥 보통의 점심시간, 매일 얼굴을 보는 동료가 평범한 식당에 마주 보고 앉아서 ‘야, 근데 있잖아’로 시작하는 대화면 된다. 그런 이야기에는 술집 주인의 눈치가 보일 만큼 저렴한 안주가 잘 어울린다. 술도 잘 안 들어가고 안주도 잘 안 들어가서 돈도 아끼고 시간만 잔뜩 흘려보낼 수 있을 듯한 그런 안주 말이다. 나초 과자보다는 조금 더 가볍고 뻥튀기나 쌀과자보다는 간이 잘 된. 잔멸치가 딱인 타이밍 아닌가.
그러나 그 잔멸치를 홧김에 집으로 가져왔다면, 그 멸치가 인어로 변신했다면 어떨까. 멸치를 집에 가져온 것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멸치가 인어로 변하는 건 다른 문제다. 등록 반려동물 300만 시대에 악어, 미어캣을 기르는 유튜버도 널리고 널렸으니 인어 한 마리 정도는 괜찮을까. 하지만 ‘나’는 월급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게다가 회사의 구조조정에 앞으로의 벌이도 불투명한 회사원이다. 가만있자. 인어는 반려동물 보험을 들어야 하나 아니면 사람 드는 보험도 괜찮으려나. 주민등록을 해야 하나 반려동물 등록을 해야 하나.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울컥, ‘나’에게 몰려든다.
인간이기에, 말도 안 통하는 잔멸치 인어를 키우게 된 ‘나’의 심정을 먼저 상상하게 된다. 그럼 잔멸치는 어떤 마음일까. 살아남은 것에 기뻐하고 있을까. 아니면 물부족국가 대한민국에 자기를 제대로 보호해줄 것 같지도 않은 인간의 집 가습기 속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을 한탄하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웃기다. 그렇다. 이 잔멸치의 등장은 어처구니가 없다. 헛웃음을 픽, 하고 흘려야 한다. 잔멸치는 도무지 이 땅에 설 자리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의 주인공 ‘나’는 어떤가. 그는 이 대한민국 땅에 두 발 단단히 디딘 채 살고 있나. 그것도 아니다. “해외 사업 파트에 가기에는 외국어가 약하고 국내 사업 쪽은 막내로 부리기엔 연차가 쌓였고 바로 실무자로 쓰기엔 너무 오래 한 부서에만 있어서 할 줄 아는 게 없다”. 요컨대 자기가 어디서 일해야 하는지조차 정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 상태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짐작도 안 되는 인어와 다를 게 없다.
가습기에서 갑자기 인어가 된 잔멸치. 이 황당한 환상으로 한켠 작가가 환기하려는 현실은 무엇인가. 그건 ‘나’의 불안정한 위치다.
처음, 등장 장면에서 잔멸치와 ‘나’의 공통점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둘은 사는 곳부터가 다르다. 멸치는 바다에서. ‘나’는 육지에서 나고 자랐다. 멸치는 생선이고 ‘나’는 인간이다. 멸치는 먹히고 ‘나’는 먹는다. 인어가 된 멸치는 환상, ‘나’는 현실의 인물이다. 그러나 ‘나’와 멸치는 어딘가 비슷하다. ‘나’도 멸치도 이 세계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제 회사에서 회식하다가 호프집으로 2차를 갔고, 마른 안주를 시켰는데, 요즘 오징어값이 올랐다며 마른 오징어와 마요네즈 대신 잔멸치와 칠리소스가 나왔고, 잔멸치 한 마리랑 눈이 마주쳤고, 그 눈이 왠지 슬퍼 보였고, 너는 왜 이렇게 말라 비틀어졌냐고 시비를 걸다가 술김에 집어서 주머니에 넣어 왔고, 너도 나처럼 서울에 집 한 채 없냐며 물 속에 살아야 되는데 왜 이런 데서 썩고 있냐면서 가습기 물통 속에 집어넣은 것까진 기억난다. 남들은 노래방에서 탬버린 같은 걸 훔쳐 온다는데 나는 겨우 잔멸치 한 마리냐.”
이 짧은 인용에서 멸치와 ‘나’의 공통점을 몇 가지나 찾을 수 있을까. 첫째로 둘은 ‘값’이 떨어지는 취급을 받고 있다. 멸치는 ‘값이 오른 오징어’ 대신 식탁에 올랐다. 사람들은 주문도 안 했는데 등장해버린 잔멸치는 구조조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밀려난 ‘나’와 같다. 원하지 않는데 그 자리에 있다. 자의가 제한된다. 둘째로 멸치와 ‘나’는 모두 ‘슬픈 눈’을 가지고 있다. 멸치는 슬프고 말라비틀어졌다. ‘나’의 인생도 비슷하다. 좋은 감정이라고는 없이 아슬아슬한 매일을 살고 있다. 만약 서술자 ‘나’의 눈을 마주할 일이 있다면 그의 것에도 슬픈 빛이 깃들지 않았을까.
셋째로 ‘나’와 멸치는 모두 서울에 집이 없다. ‘서울’이라는 지명보다는 ‘집’이라는 공간에 주목해보자. ‘자기만의 방’이라는 단어가 고유명사처럼 쓰이듯, 모든 사람에게는 스스로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하다. ‘집’은 그런 공간의 최소 단위다. 적어도 ‘집’은 있어야 삶이 편안하다. ‘나’에게는 마음 편히 거할 곳이 없다. 이미 세상의 집은 ‘부동산’으로 불리게 된 지 오래다. 시간과 추억이 깃든 공간보다는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재산’으로서 기능하는 집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거처가 되지 못한다. 집의 개수는 부의 상징이다.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집이 멸치에게도 없다. 멸치는 바다에서 오기라도 했지.
넷째로 멸치와 ‘나’는 주류로 편입될 수 없는 존재다. ‘물속에 살아야 하는데’ 물밖에서 안줏거리가 된 멸치나, 다른 부서에 가지 못하고 ‘줄줄이 거부당한’ ‘나’나 다를 게 없다. 이만하면 ‘나’의 영혼이 멸치에 빙의되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그 멸치를 덜컥 맡아 스트레스를 받다가 로또 번호를 찍어주는 신기(神氣)를 구한다. 아무리 그래도 환상 속 존재인데 초능력 하나 없을까. 인어는 머리를 땋기 시작한다. 그것이 자신의 언어인 양 ‘나’의 머리도 따준다. 영화 《아바타》가 떠오른다. 사고(思考)를 담당하는 기관인 머리(뇌)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머리카락은 자세히 뜯어보면 꽤 신묘하다. 일평생 거의 일정한 속도로 자라고 잘라도 고통을 못 느낀다. 무엇보다 머리 위쪽에서 자라기 때문에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과거에는 머리카락 또한 꽤 신기해 보였음직하다. 마치 생각을 먹고 자라는 풀 같지 않았을까.
《아바타》에서 자연과 판도라 행성인은 머리카락을 통해 소통한다. 물론 그 머리카락은 지구 인간의 머리카락과 정의가 다른 개념일 수도 있겠지만, 외면상으로는 그렇다. 〈어느 날, 잔멸치〉에서 인어와 ‘나’의 소통 방법도 이와 유사하다. 머리카락을 땋는 모양이 인어의 언어라는 상상은 얼마나 독특하게 아름다운가. 세상 그 어떤 언어보다 몸을 가까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멸치가 기원한 인어 종족들은 피부와 피부의 유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집단일 수도 있다. ‘나’의 머리를 꼬아 주며 인어는 태어나 처음 조우했을 인간의 마음을 연다.
‘나’ 역시 인어의 손길에 반응한다. “나는 왜 다감한 순간을 견디지 못할까”라고 되뇌지만, 인어의 손에서 굳이 몸을 빼지는 않는다. 잔멸치였던 인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을 넘어 그를 사랑한다. 그와 감정의 교감을 느낀다. 그리고는 인어를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그에게도 좋을 테니까.
그리고 찾아온 주말, 인어와 함께 바닷가에 있는 서술자에게 갑자기 쓰나미가 들이닥친다. 인어처럼 환상적인 장면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녀가 이후 구조되는 것을 보면 실제로 물에 빠지긴 한 것 같다. 그렇다면 바다가 다가온 게 아니라 그녀가 걸어간 게 아닐까. 물이 그녀를 끌어당겼을까, 삶이 그녀를 밀어낸 걸까.
구조된 그녀의 몸에서는 다시 잔멸치 한 마리가 발견된다. 그녀의 마음은 후련한 듯하다. “하룻밤 푹 쉬고”, “머리를 숏컷으로 바짝 자르고” 월요일에 출근할 생각을 한다. 잔멸치는 그녀에게 동질감을 주는 대상이었다가, 그녀 자신이었다가, 애인이었다가, 감정의 종착지가 된다. 고작 하나의 잔멸치에 불과했던 인어의 환상이 구조조정에 불안해하던 한 여성의 마음에서 응어리를 해소한 것이다. 마치 시원한 바다에 한번 풍덩,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원치 않은 타이밍에 마른안주로 식탁에 올라 세상에서 가벼이 사라질 운명이었던 잔멸치. 고작 그것으로 이렇게 섬세한 사랑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서술자는 비뚤어진 세상에서 행복을 다짐한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삶을 바로 세운다. “진짜로, 절대로, 반드시, 꼭, 더 이상” 망가지지 않겠다고 되뇐다. 이제 그녀의 마음에는 인어였던 잔멸치 하나가 퍼덕이고 있다.
어쩐지 눈이 슬퍼 보여서요, 라고 시작되었던 잔멸치와의 인연. 그 끝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그 말을 사람에게도 슬쩍 해보는 건 어떨까. 말도 통하고 생긴 것도 비슷한데 나와 똑같은 상황에 처한 누군가가 등을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다. 자세히 보니 불규칙하게 어깨를 살짝 들썩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투박한 그릇에 오징어보다 저렴한 잔멸치를 수북이 쌓는다. 그에게 건네는 말에는 잔멸치 이상의 무게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오징엇값이 너무 나가서, 실수로 잔멸치를 내와서 미안한데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주머니에 슬쩍 한 마리 챙긴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상대에게 건넨다. 역시, 솔직히 말하는 게 좋겠다.
오늘, 어쩐지 당신이 슬퍼보여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