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당신이 슬퍼보여서요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어느 날, 잔멸치 (작가: 한켠, 작품정보)
리뷰어: 0제야, 23년 9월, 조회 140

세상이 어긋나 있다. ‘뒤죽박죽’이라는 말을 세 번쯤 썼다가 어딘가 어색해서 골똘히 고민했다. 그러니까, ‘뒤죽박죽’처럼 혼란한 단어를 무작정 쓰기엔 (나를 제외한) 세계가 지나치게 고요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세상과 내가 반 발짝 정도 어긋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뒤죽박죽’에 관한 사유의 끝에는 항상 그런 결론이 있었다. 분노하거나 슬프거나 혼란한 건 내 머릿속이었다. 아침에 누군가 죽어도 저녁이면 고요한 이 땅에서 삶이 복잡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너만 그런 건 아니야’라는 말을 친구에게 숱하게 들어도, 딱 십 분만 지나면 ‘역시 나만 그렇구나’라는 확신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어쨌거나 화가 난 것도, 우울한 것도, 발을 구르는 것도, 목이 아픈 것도, 팔다리가 쑤시는 것도 나뿐이 아닌가.

한 건강기능식품 광고에서 사람의 주변에 비눗방울 같은 경계가 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광고에서는 비눗방울이 튼튼한 ‘면역력’을 상징했지만, 순간 그 비눗방울이 ‘나’와 ‘남’의 경계처럼 보였다. 매우 견고해서 사람과 사람이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못하도록 하는 투명한 막. 물론 광고의 내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마치 모든 사람이 같은 극을 띠는 거대하고 강한 자석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생각과 이해가 다른 상대를 마주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결코 터지지 않는 막에 밀려 미끄덩. 내가 미끄러진 적은 얼마나 많았나.

집에서 미끌, 사무실에서 미끌, 길에서 미끌, 버스 또는 지하철에서 미끌, 엄마 앞에서 미끌, 아빠 앞에서 미끌, 명절 친척들 앞에서 미끌, 친구 앞에서 미끌, 키보드 위에서 미끌, 때로는 원인 없이 미끌. 내 발바닥과 길바닥 중 어느 게 미끄럽기 때문인지를 따져보다가 에이, 그만둔다. 그러다 몇 번, 균형을 놓쳐 콰당 넘어지기도 한다. 엎어져 낮아진 시야에서 문득 발견하는 건 모두를 둘러싼 비눗방울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비눗물이다. 비눗물, 그건 눈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밀려나는 게 버릇이어서인지 언제부턴가는 발에 힘을 주고 걷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습관이어서인지 세상이 스스로 휘청이는 것도 같다. 이런 날이 반복되면 살아남기 위해, 어지럽지 않기 위해, 정신과 실제에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러니까 쉬운 컴퓨터 게임을 집중력 없이 하는 것처럼.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질문에 어, 어하고 건성으로 답하는 것처럼. 나의 비눗방울에 맺힌 세계의 상(狀)을 감상 없이 지켜본다. 어쩌면 이 심리적 거리두기가 어긋남의 출발이 아니었을까. 세상은 “나한테만 왜 이렇게 무례하고 위험하고 적대적”일까.

글로벌 시대에 외국어를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디지털 시대에 코딩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재태크의 시대에 투자 하나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서울에 그럴듯한 집 하나 없이는 어떻게 살아갈 텐가. 저 사람보다 더 노력하지 않고서는 도태될 것이다. 그렇게 이타적으로 물러터져서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치밀하고 도전적으로 미래를 계획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남은 하루의 분량이 무겁고, 만원 지하철에서는 목숨을 위협받는다. 지금도 내가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유가 대량생산되고 있다. 이러다 정말 질식이라도 하는 거 아닐까. 땅 위에서는 멸치가 살아남을 수 없고 바다에서는 인간이 살아남을 수 없듯이.

그러니까, 이상한 일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퇴사, 아니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거실에 웬 인어가 곱게 앉아 있다. 전날 회식 중 홧김에 주머니에 넣어 왔던 잔멸치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선가 나는 익숙한 약품 냄새. 인어는 세상의 시름을 잊으려고 사둔 금값의 술을 바닥에 다 부어놓고 그 위에서 헤엄친다. 야, 그건 내 재산인데! 외치기도 전에 잠깐. 근데 너, 어디에서 왔니. 어떻게, 아니 무슨 목적으로 온 거니. 왜 하필 골라도 여기니.

여긴 아시아 최상위권 대학을 나와 5개 국어에 능통한 사람들만 겨우 살아남는다는 대한민국이라고!

 

 

만약 꿈이 아니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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