戦争の虚無 : アジア太平洋戦争機の日本
전쟁의 허무 :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의 일본
※ 본 리뷰는 <쇼와 19년, 헌병이 그곳에서 죽었다>를 읽고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3.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의 국가주의
4. 결어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일본관련 뉴스를 보게 되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많이 듣게됩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적인 사건들 때문에 일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우리는 일본에게 식민지배를 받은 피해국이고, 우리나라를 수탈한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이 되어 세계 강국이 되었으니까요. 일본이 패전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정치인, 재벌, 군 고위 간부들은 상당한 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보통의, 평범한 일본 사람들도 그랬을까요?
세모니키 작가님의 67매 분량의 단편 소설인 <쇼와 19년, 헌병이 그곳에서 죽었다>는 전쟁이 발발하던 일본 쇼와 시대(1927년~1989년)를 배경으로 합니다. <쇼와 19년, 헌병이 그곳에서 죽었다>에선 천황제와 국가주의로 점멸된 일본에서 하타나카 신고라는 평범한 청년이 살인을 저지르고, 일본군에 입대하여 태평양 전쟁에 출전하고 사망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평범한 청년이 어쩌다가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가 되었을까요? 그 이야기를 리뷰하고자 하옵나이다.
2.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Benedict Ruth, 1887-1948)의 <국화와 칼>이라는 책에 대해서 아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녀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배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후 생화학자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했고, 1921년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프란츠 보아스의 지도를 받으며 인류학 연구를 하게 됩니다. 루스 베네딕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화와 종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교의 인류학 교수가 됩니다.
<국화와 칼>은 1944년 6월에 미국 국무부의 위촉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화와 칼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승리가 가시화되어갈 무렵이었던 1944년 6월 미국 국무성의 의뢰를 받아 베네딕트가 작성한 정책보고서<No.25 일본인의 행동패턴>1을 가필, 수정하여 완성한 책입니다. 그녀는 종전이 다가옴에 따라 1944년 12월에 일본문화에 대한 입문적인 리포트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리하여 1945년 5월 초에 시작하여 적어도 8월 원폭투하가 이루어질 때까지 초고를 마친 59쪽의 <No.25 일본인의 행동패턴>을 제출하였습니다.
정작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 교수는 태어나서 한번도 일본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아서 주관적인 관점이 개입되지 않는 객관적이고 엄밀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하는 미국 인류학의 가장 주도적인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저서입니다. <국화와 칼>은 1946년에 영문판2이 나온 뒤로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인도네시아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읽고 있습니다. 연구 저서로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여 영문판은 약 40만부, 일본어판은 약 250만부가 팔렸습니다.
또한 1948년엔 <국화와 칼>의 일본어판 출간을 계기로 일본의 대학자들을 초청하여 토론회를 연 뒤, 일본민족학회(=일본문화인류학회)의 <民族学研究>3에 게재까지 합니다. 일본의 대학자들은 인류학자로서의 예리한 통찰력, 상대주의적 사고방식, 풍부한 데이터의 활용이라는 긍정적 평가를 내림과 동시에 개념, 연구방법, 계층성에 대한 분석의 비과학성, 비학문성, 몰역사성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내렸습니다.
베네딕트가 <No.25 일본인의 행동패턴>에서 기술한 일본의 윤리와 서양의 윤리 중 이 논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구미의 윤리를 기준으로 일본인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정한 상황에서 일본인이 보이는 순종 탓에 일본인은 순종한 민족으로 분류하고, 일본인의 규율 탓에 그들의 불복종하는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한다. 또 일본인이 때로 보이는 숙명론적인 구도 탓에 일본인을 숙명론자로 간주한다.
이러한 일본인의 행동에서 보이는 패러독스가 서양인을 두렵게 하고 일본인을 불가사의한 국민으로 결론짓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 있는 일본인의 도덕규범이나 책무에 관한 감각은 결코 서양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일본은 타국으로부터 존경받는 것을 중시하고, 진정으로 평화로운 세계가 되면 그 상황에 맞춰 방침을 세울 가능성이 크다.
일본에서는 기본적인 윤리로서 방법이 변화해도 그 정신은 변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 정신이란 채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채무나 예의작법에 관한 규칙에서 명확히 볼 수 있듯이 일본의 윤리기준은 형식적이고, 선악은 주위의 상황에 의해 구분된다.
때문에 일본인은 상황이 변해도 별 고통 없이 아주 간단히 새로운 상황에 몸을 던질 수 있다. 서양인은 그런 일본인을 신념 없는 순응자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인이 절대적인 윤리 속에서 자란 데서 기인할 뿐,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으로도 바르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최대의 고민거리였던 ‘종전 후에 일본인이 협력적으로 나올까, 아니면 게릴라전을 이어갈까?’ 라는 물음에 대해 베네딕트는 일본인은 변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미국이 천황의 처우를 비롯해 일본이 패했다고 해서 결코 모욕을 주거나 깔보는 것처럼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상대에게서 ‘마코토(誠)’를 느낄 수 있으면 상대를 받아들이지만 마코토가 결여되었다고 느낄 경우에는 일본은 주인 잃은 무사의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朴容九. (2014). 전시 정책보고서로서의 『국화와 칼』. 日本硏究, 0(61), 83-108.
3.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의 국가주의
일본 정부의 금속 공출령에 따라 각 가정에서는 숟가락, 솥뚜껑, 그릇, 불상, 철, 구리 등을 군함, 소총, 포탄 같은 전쟁물자로 만들기 위해서 바쳐야 했습니다. 일본 헌병들은 마을과 동네를 누비며 구리와 철, 금속제 물품들을 전부 약탈해갔습니다. 주인공 ‘하타나카 신고’ 또한 마찬가지로 집에 있는 금속을 바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사용하는 필수품을 모두 바치면 하타나카의 가족들이 고생하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하타나카 신고는 집안에 모든 금속들을 자루에 담아서 뒷산에 몰래 묻어놨습니다.
하지만 일본 헌병에게 발각됩니다. 헌병은 금속제를 바치지 않은 하타나카의 행동을 ‘비국민’적인 행위라고 비난하며 처벌을 하려고 합니다. 하타나카는 그저 가족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했던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온 평범한 청년이었을 뿐이었죠. 억울한 마음에 하타나카는 헌병의 머리를 돌로 때려죽입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에 극도로 불안감을 느낍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여러번 했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그런 하타나카 신고에게 소집영장이 발부됩니다. 하타나카 신고는 전쟁터로 향해야 했습니다.
하타나카가 입소한 부대의 대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랑스러운 천황 폐하의 아들들이여, 우리는 반드시 이곳에서 옥쇄한다! 축귀와도 같은 양키들을 단 한명도 살려보내지 마라! 일본은 반드시 전쟁에서 이긴다! 제군들, 모두 야스쿠니에서 만나자! 천황 폐하 만세!” 실로 군국주의적인 메세지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수많은 일본의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이 남기던 말이지요. 이런 야스쿠니 신사는 1869년 정부 군무관에 의해 도쿄에 초혼사(招魂社)의 건립이 처음 하달되었을 때만 하여도 무진전쟁 전몰자와 소위 유신순난자(維新殉難者)들의 합사공간이었습니다.
이후 1874년 대만침공이나 서남전쟁(西南戰爭)과 같은 대내외적인 무력충돌을 겪으며 그 복잡한 측면이 점차 구체화되었습니다. 합사자의 숫자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천황의 참배를 통해 신사의 위상이 향상되고 국가주의와의 결합이 두드러진 것입니다. 1874년에는 처음으로 메이지 천황의 행차가 이루어졌고, 1879년에는 명칭이 야스쿠니신사로 변경됨과 동시에 별격관폐사(別格官弊社)로 지정되었습니다. 1873년 미나토가와진자(湊川神社)에서부터 지정이 시작된 별격관폐사의 지정은 국가신도의 체계가 갖추어짐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입니다.
그 과정에서 비록 신도를 국교로 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국가주의와 천황제가 밀접하게 결합되고 일본인의 사후세계까지도 국가가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만들어집니다.4 별격관폐사로서 지정되며 야스쿠니신사의 위상이 변화된 것과는 달리 일반대중에게는 그것과 대조적으로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여가를 보내는 장소로 혹은, 그 앞에 자리잡은 오락시설을 통하여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5 야스쿠니신사의 기능이 또 한번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근대 최초의 대외전쟁인 청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입니다.
대량의 전사자들이 발생하고 합사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청일전쟁 발발 이전 약 4000명이던 합사자수는 전쟁이 끝난 후 약 20,000명으로 늘어났고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었습니다.6 22회 합사가 이루어진 1895년 12월에는 메이지천황이 직접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습니다. 러일전쟁을 지나며 약 5만에 달하는 전몰자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고 천황과 황후의 공식적인 참배 행차 횟수도 늘어났습니다. 이로써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주의와 결합된 추도공간으로서의 색채가 한층 짙어지게 되었습니다.
쇼와(昭和)시대에 들어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전몰자의 규모에 비례하여 천황이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빈도 역시 잦아졌다. 특히 만주사변 이후 매년 4월의 임시대제에는 천황의 참배가 정례화되다시피 하였다. 만주사변 직후만 하여도 매년 한 차례 4월 임시대제에 참배하던 천황의 참배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 두 번으로 늘어나 가을 임시대제인 10월에도 참배가 이루어졌다.
합사자수 또한 대폭 증가하여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45년 4월까지는 매회 1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합사되었다. 같은 시기 후방의 국민이 공교육 과정에서 수신(修身), 일본역사, 지리와 같은 과목을 통해 국가신도와 밀접한 연관을 형성, 유지하게 된 것은 야스쿠니신사의 위상을 공고한 것으로 만들어었다. 스모대회나 노 공연, 유슈칸의 전시 등도 야스쿠니신사는 일반대중에게 친밀한 장소로 자리잡는 데 기여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야스쿠니신사의 중요성은 더욱 커져 점차 신사들 가운데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잡다시피 하였고, 어린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기원하는 753의 장소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각종 이벤트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7년 9월 15일에는 수상을 비롯한 각료들과 군장성, 관료들이 참가한 국위선양・무운장구 기원제가 열려 전국에 라디오로 중계되었고, 전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육해군 대신이 참가한 남경함락 봉고제,
이듬해 7월에는 중일전쟁 1주년 기념 봉고제가 열렸다. 1938년 2월 11일 요배식으로 처음 열린 건국제에는 2만 여명이 참여하여 이세신궁의 지소 혹은 대리행사장으로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2년 후인 1940년 2월 11일에는 일본기원2600주년을 기념하는 기원절제(紀元節祭)와 건국제가 함께 열려 진행상황을 전국에 라디오로 중계하였다.
당시 약 10만의 참배자가 몰려들어 성황을 이룬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야스쿠니신사는 명실 공히 국가주의 및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바로 이와같은 변화를 통해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의 정신적 허브가 된 것이다.
김용철. (2018). 야스쿠니(靖国):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의 정신적 허브. 日本學報, 0(114), 173-192.
4. 결어
결국 하타카나 신고는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유서는 아무도 읽지 못한 쓰래기가 될 뿐이었습니다. 전쟁이란 것이 이토록 허무하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그것을 느끼게 해준 중단편 소설이 <쇼와 19년, 헌병이 그곳에서 죽었다>입니다. 저는 브릿g의 편집장의 시선에서 추천으로 있길래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시간이 되시면 한번 일독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