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처음 인생을 산다. 한 번 사는 삶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다.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인정받는 이들에게도 크고 작은 실수를 하던 때는 반드시 있다. 지구상에 ‘완벽하게’ 살고 가는 이는 없다. 살면서 하는 후회는 선택의 수에 비례한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무의식에 선택하지만, 모두가 성공적이지는 않다. 작게는 점심 메뉴부터 크게는 진로와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까지. 했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는 작은 고민부터 며칠 밤낮을 새우고 손을 떨게 하는 걱정까지. 삶의 선택지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우리가 갈등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내가 골라야 하는 이 갈림길. 양쪽 끝에 나올 결과를 저울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 다 성공일 수도 실패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상하게 나의 선택이 성공이라면 반대편은 실패, 실패라면 반대편은 성공일 것만 같다. 미래를 보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으니 누군가 ‘이리로 가거라’라고 점지라도 해줬으면 좋겠는 심정일 때도 있다.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갈라져 있을 평생의 경우의 수 중 내가 걸어온 길은 오직 한 가닥이다.
사람이 한 번의 갈림길에 서면 그 결과에 따라 두 개의 평행 우주가 생긴다고 상상해보자. 한쪽 세상의 나는 A를 선택했고, 다른 쪽 세상의 나는 B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이 각각 살아가는 와중 또 발생하는 선택 C/D, E/F로 인해 A-C, A-D, B-E, B-F라는 우주가 생긴다. 이렇게 모든 경우의 수에 맞게 만들어진 수많은 평행 우주를 엿볼 수 있다면, 그곳에서 살고 있는 나와 단 한 번이라도 대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실수를 바로잡는 법, 나의 잘못된 삶을 되돌릴 길이 어딘가에 있다면 사람들은 일정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그것을 택할 것이다.
멀티버스로 우리에게 익숙한 다중우주론의 한 갈래는 수년 전부터 다양한 콘텐츠 안에 녹아 재생산되고 있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의 결과를 어떻게든 들여볼 수 있다는 매력 덕분에 멀티버스 세계관은 인간의 욕망을 쉽게 건드린다. 천문학적인 자본을 들여 현대적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는 마블 유니버스의 창작물들과 최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매트 헤이그의 장편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Midnight Library)』 역시 멀티버스를 적극 차용한 콘텐츠다. 인류 역사의 오판이 없는 행성부터 나 한 사람의 은밀한 실수가 사라진 세계까지. 멀티버스는 개인과 사회, 집단과 우주까지 상상의 제한이 없는 소재이기도 하다.
선택의 분기점에서 발생하는 다중우주는 ‘시간여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 선택이 적절한 것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발생했을 당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동시대의 다른 평행 우주로 이동한다면 시간여행은 상대적으로 적겠지만, 갈림길의 시작점에서 인생을 다시 살기로 결심했을 때는 회귀가 필수적이다. 다중우주와 회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만, 둘의 접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특정 선택에 따르는 후회가 깊을수록 사람들은 다른 방향이 옳았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시간여행을 통해 다양한 우주를 경험하길 원한다.
여기, 죽음을 앞둔 오빠에게서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들은 한 여성이 있다. 그녀의 오빠는 사고로 숨지기 전, 자신이 시간여행자였다고 고백한다. 보통의 남매 관계에서 평범한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면 장난이나 헛소리로 넘기겠지만, 그의 오빠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알지만, 죽기 직전의 사람이 가장 아끼는 동생에게 틀린 말을 할 리 없다. 오히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소중히 아껴 꼭 필요한 유언을 남기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신이 시간여행자라니. 이 여성은 그날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오빠가 자기 입으로 시간 여행자라고 말했을 때, 나는 기어이 오빠가 미쳐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어.”
1. 지극히 사적인 시간여행
이런 시간 여행자를 한번 상상해보자. 오직 ‘자신의 일상’만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 지구를 구하거나 세상을 변화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 무려 회귀의 능력이 있음에도 누구나 한 번쯤 알아볼 법한 주식 시세 변동이나 로또 당첨 번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당장 내 옆에 있다면 어떨까. 그가 어떤 회귀를 원하든 일단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결하라고 진심으로 권하고 싶을 것이다.
시간을 여행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되돌리거나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대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욕망이 있다면 무엇일까. 사실 그에게는 한 가지 작은 소원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바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그는 ‘행복한 가정’을 원한다. 부모님의 원만한 관계와 하나뿐인 여동생의 안전한 인생. 오직 그것을 위해 시간을 되돌린다. 셀 수 없는 회귀의 수레바퀴에서 끝내 모두가 행복한 단 하나의 평행 우주를 찾아낸다. 하지만 그곳에서 불행한 것은 오직 자신이다.
푼크툼 작가의 소설 〈오빠의 시간여행〉은 이런 시간여행자의 동생 입장에서 시작된다. 죽음을 앞둔 오빠에게서 그가 시간여행자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여동생. 오빠는 그녀에게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을 풀어놓는다. “자기 인생이 몇 번째인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그는 시간여행을 여러 번 했다. 그의 목적이자 욕망은 ‘행복한 가정’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작가는 오빠의 동생을 전해 듣는 여동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그의 감정에 독자가 필요 이상으로 공감하는 걸 막는다.
‘가정 내 폭력’ 피해자는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되는 깊고 어두운 감정을 느낀다. 그 때문에 독자, 어쩌면 작가 스스로 그 감정에 휘말릴 위험이 있다. 하지만 오빠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관찰자 시점의 ‘나’가 주인공이라면 어느 정도 감정의 거리가 확보된다. 사실 시간여행자의 여동생이라는 그녀의 정체성은 한 번에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나’는 황당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오빠의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한다. 오빠가 느꼈을 깊은 슬픔은 동생의 혼란에 희석된다.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러나 어느 정도의 공감대는 유지한 채 독자는 ‘나’의 시점을 따라간다.
오빠의 시간여행에서 녹록한 과정은 없었다. 하나같이 아프고 쓰린 기억뿐이다. 부모님의 이혼을 막으면 폭력의 가해자인 아버지와 살게 된다. 그렇다고 이혼하도록 가만히 두자니 동생이 불행한 삶을 산다. 이는 시간여행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시간여행 장르의 관용적인 교훈을 내포한다. 과거에는 시간여행으로 단순히 문제가 해결되는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독자의 수준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빠르게 향상되고, 그들이 요구하는 스토리텔링은 지금도 복잡다단해지는 중이다. 입체적인 전개를 위해 최근의 타임리프 서사에서는 한 번의 시간여행만으로 간편히 해결되는 문제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 속 시간여행자 오빠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지도 못할 만큼의 인생을 새로 고친다. 그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건 여동생이며, 시간여행의 핵심인 타임머신 역시 그녀와 함께 그린 만화 그림책이다.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시간여행이 사랑받는 이유는 인간의 욕망을 강하게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 욕망의 이야기를 신선하게 만드는 기술 중 하나는 의외로 ‘타임머신’에 있다. 시간여행의 방법과 이유가 다양해짐에 따라 ‘타임머신’의 모습도 조금씩 바뀐다. 투박한 쇳덩어리에 앉아 비장하게 여행을 떠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이 더 신비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 이야기가 더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타임머신이 회귀하려는 자의 욕망과 밀접히 관련될수록 소설의 몰입도는 더욱 높아진다.
이런 관점으로 파악할 때, 〈오빠의 시간여행〉에는 꽤나 독특한 타임머신이 나온다. 오빠에게 시간여행의 매개는 동생과의 추억이다. 하나뿐인 동생의 인생이 조금이나마 행복해지길 바랐던 오빠의 마음이 간접적이지만 분명히 전해지는 순간이다. 오빠의 회귀에서 동생의 안위가 큰 일부를 차지하는 만큼,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타임머신이 그를 다중우주 속 과거로 인도한다.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은, 지극히 사적인 시간여행자가 마지막으로 원한 건 완전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의 여동생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빠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불행과 희생을 택했다. 죽음의 언저리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묵묵히 들은 여동생은 말없이 오빠를 보내준다. 여기에서 이 소설이 끝났다면, 여러 번의 회귀로 최적의 방안을 찾는 평면적인 이야기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오빠의 시간여행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다. 마치 그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동생은 오빠가 완성하지 못한 진정한 행복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비록 그 역시 억겁의 시간을 되감아야 할지라도, 오빠의 희생이 평행 우주의 종점이 아니길 바라는 동생의 마음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순간이다.
2. 오빠가 원한 것
동생은 오빠의 뒤를 이어 시간여행을 다짐한다. 이 다짐은 이야기의 시간 경로를 뒤튼다. 오빠는 과거로만 회귀하여 여러 평행 우주 속 가족을 경험한다. 그들은 대체로 불행했으며, 미해결의 과제로 남는다. 동생 역시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동생은 의미심장한 대사로 자신의 앞으로 떠날 여행이 오빠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상상을 해. 나는 여러 차례 시간여행을 시도하고, 그러다가 결국 지쳐버려. 그래서 어느 날은, 오빠에게 나의 속내와 진실을 털어놓는 거지. 예전 인생에서 오빠가 나에게 그런 것처럼. / 그러면 나에게 진실을 전해 들은 오빠는, 나의 짐을 대신 짊어지기 위해, 나 대신 스스로 시간여행을 시도하는 거야. (…) 만약 그런 순간이 나에게 온다면, 나도 오빠 대신 시간여행을 짊어질 거야.”
오빠는 가족에게 최적인 대안을 찾았고 그것이 회귀의 끝이라 믿었다. 하지만 동생은 이 시간여행이 끝없이 반복되리라고 믿는다. 자신이 회귀하다 지치면 오빠에게 털어놓을 것이고, 오빠는 시간여행을 “짊어질” 것이다. 그럼 또 다른 회귀가 시작된다.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동생의 말은 ‘무한루프’로 시간여행의 모양을 바꾸어 버린다. 단순히 현재-과거를 오가던 직선의 시간여행 경로는 동생에게서 오빠로, 그리고 다시 동생으로 돌아올 것이다.
시간여행은 이 가족에게 짐과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설 속 오빠와 동생에게는 가족이 짐이었다. 그들은 단지 가족의 안녕을 위해 삶을 여러 번 포기한다. 그러고도 얻을 만한 것이 평화로운 가정이다. 가정 폭력과 방임, 그리고 어딘가 자꾸만 기울어져 가는 구성원의 균형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야말로 짐과 같은 여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 끝에서 서로의 본심을 확인하는 오빠와 동생은 끝내 서로의 손을 뜨겁게 잡는다. 한 사람의 인생에 감기던 수많은 리본이 점차 그 길이를 더해 다른 이의 삶에도 감긴다. 그들은 짐을 공유하고 여행을 함께한다.
가족의 이름으로 마음에 남는 아픔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보호자가 휘두르는 폭력, 그로부터 방치되는 아이들. 청소년들은 이유 없이 방황하지 않는다. 이제는 누구 하나가 죽지 않으면 뉴스에는 보도도 안 되는 이 상처가 언제쯤 지구에서 사라질까. 무탈한 가정에서 단 하루만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이 오늘도 세상에는 넘실댄다. 그들을 위한 단 하나의 타임머신이 있을 수는 없을까. 그들이 모두 행복한 유토피아가 셀 수 없는 평행 우주 중 한 곳에는 존재해주지 않을까. 그 전에, 사람들이 이 세계를 버리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도록 만들 방법은 없을까.
경험하지 않은 자는 알 수 없기에, 연대자의 모습으로 고통을 공유하는 두 사람이 유난히 애틋하다. 그 둘에게 닥친 불행은 폭력만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몸서리쳐지는 불행에서 벗어날 길이 물리법칙을 어기는 것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설 속 동생은 자신이 지치면 오빠에게 시간여행자로서의 정체를 털어놓으려 한다. 그렇게 삶과 삶의 고리를 맞물려 누구도 괴롭지 않은 인생을 반드시 찾으려 한다. 하지만 동생의 삶이 지칠 때까지 여행이 반복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한두 번의 회귀만으로, 오빠와 동생이 모두 무탈한 우주가 발견되기를 바란다. 누구도 시간여행을 할 필요 없는, 만화책이 추억으로만 남는 삶이 이 소설의 바깥 머잖은 곳에 있기를 바란다.
가장 의지 되는 사람, 가장 소중한 이에게 비밀스러운 자신의 짐을 공유하고자 털어놓는 것은 분명 대단한 용기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또는 보통이 아닌 의지로밖에 할 수 없다. 상대가 내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수십 번을 상상해본다. 그가 나를 이상하게 여기면 어쩌나. 나의 상처를 평면적이고 관용적인 표현으로 그저 덮고 지나가려면 어쩌나. 그러나 종종, 결국은 한번 용기를 내야 하는 때가 온다. 그때 상대가 손을 잡아준다면 우리는 마음의 연결을 느낀다.
“나는 몇 번이나 시간 여행을 다시 시도하게 될까?”
가장 어두운 기억을 애틋하고도 신비로운 시간여행으로 이겨내고자 한 오빠와 여동생의 이야기. 이 끊이지 않는 여정을 잠시 따르는 동안 그들에게 분명한 위로와 연대가 함께 했음을 느낀다.
주저하지 않고 누군가의 삶에 자신을 온전히 연결하는 방법을 알려준 이 회귀의 끝이 행복하게 닫히기를. 그들이 무한한 슬픔의 순환에 빠지는 게 아닌, 유한한 행복 속에서 여정을 끝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