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이익이 전부인 세계를 향한 대항과 연대
1) 한정된 공간에서의 범죄추리물에서 추격액션활극까지
이 소설은 선상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초반부에 소년이 잇따라 살해되는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화자인 한나는 “… 그레이슨은 남색가가 아닐까? 항구의 소년을 죽인 범인이 그레이슨라면? …” 이라고 생각하며 그레이슨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초중반부에 그레이슨이 범인으로부터 화자를 구해주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그레이슨이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나 싶지만, 이윽고 제임스가 그레이슨을 공범으로 지목해버리면서 그레이슨은 죄수실에 수감됩니다. 하지만 그레이슨을 범인으로 지목한 하우저는 그날 이후 화자인 한나를 피해 다니는 등 어딘가 미심쩍은 모습을 보입니다.
이후 선상에서는 얼굴과 팔뚝에 얼마 안 된 상처가 있는 범인을 찾기 위한 수색이 진행됩니다.
중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일종의 반전이 드러나는데, 진범은 선장과 제임스였음이 밝혀집니다.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도 무차별적으로 아이들을 죽이는 게 아니에요. 단지 선장이 병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게 문제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희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범인이 밝혀진 이후에도 남은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소설의 후반부에는 인어들이 앙골레지 호를 습격합니다. 이때부터 장르는 범죄추리물에서 추격액션활극으로 바뀝니다. 선장은 전부터 이 배에 잡혀 있던 인어인 레히를 인질 삼아 인어들을 협박하지만, 레히가 자신들과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알아본 인어들이 아랑곳하지 않자 이내 내동댕이치고 뒷걸음질 칩니다. 제임스는 총을 사방으로 발포합니다. 선원들은 인어들을 피해 달아나려 합니다.
탈출 과정에서 제임스가 자베스 선장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작은 배 위에서는 큰 배를 모는 선장이 필요가 없고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 뻔하니 처리해버린 것이죠.
“아이들의 머리를 자른 건 네놈 짓인가?”
그레이슨이 물었어요. 제임스는 보트에서 나와 우리 앞에 섰지요.
“아이들에게 변태 짓을 할 용기는 있어도, 처리할 용기는 없는 사람이었죠. 선장은 항상 아이들을 건들고 징징대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대신 처리해줘야 했어요.”
그러니까 살인마와 강간마는 따로따로였던 겁니다! 그 둘이 동업자였던 거고요.
마찬가지 이유에서 생존에 필요한 의사는 살려둡니다. 즉, 제임스라는 인물은 철저히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산대로 행동하는 자로 보입니다.
그 와중에 인어인 레히는 홀로 바다로 뛰어내려 도망칩니다. 그레이슨과 제임스는 계속 싸우고 이 틈을 타 화자와 보트를 탄 아이들은 그들과 멀어집니다. 한나는 레히의 ‘집’으로 향하기로 합니다. 이렇게 소설은 마무리됩니다.
이 소설은 이처럼 범죄추리물에서 추격액션활극까지 보여주는 선물세트같은 흥미진진한 전개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소설입니다. 작가가 이러한 형식을 채택한 이유는 흡인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보입니다. (추리소설과 범죄액션물을 좋아하는 제 취향을 정확히 저격해버렸네요!)
하지만 이 소설의 매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만 있었다면 기존의 텍스트와 비슷한 그저 그런 소설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제가 이 리뷰를 써서 “세상 사람 여러분, 이 소설 좀 읽어보세요!” 하고 떠들고 싶게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요.
2) 신화적 모험서사에 대한 대안 모색: ‘인어’라는 낯선 생명체와의 조우에서 연대까지
이 소설의 결말은 기존의 가부장적 신화적 모험서사에서 탈피해, 새로운 모험의 가능성을 모색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말합니다.
“호르길리우스, 이제 더 이상 바다가 모험과 낭만이 기다리는 곳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요. 첫 항해에서는 저는 사람들을 잃었으니까요.“
이 소설은 (자신을 소년으로 속이고) 앙골레지 호에 승선한 한나라는 이름의 소녀가 호르길리우스라는 백작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작가가 이러한 형식을 취한 필연성이 완성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소설에서 호르길리우스는 신화적 • 가부정적 영웅의 상징으로 그려집니다. 실제로 한나는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호르길리우스에 대한 동경어린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한나는 태도를 바꾸게 됩니다. 즉, 소설 전체는 신화적 가부장 영웅 호르길리우스에게 감명받은 소녀가 소수자들끼리의 연대-저로서는 배에 승선하기 위해 남성으로 변장한 여성인 한나와 성소수자인 그레이슨1과 인어들 중에서도 혼자인 인어 레히는 소수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물론 한나는 그레이슨과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지만, 레히와는 명백히 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레이슨은 결말 부분에서 제임스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으로 다른 인물들의 탈출을 돕기도 합니다-를 경험하고 가부장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제가 리뷰를 쓰고 싶게 만든, 이 소설에만 더해진 고유한 매력입니다.
그렇다면 소설의 결말에서 한나가 연대하기를 택한 대상, 인어 레히는 어떤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푸른빛 피부를 가진’ 소녀(인어)인 ‘레히’가 배에 승선하게 되었을 때, 한나는 레히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합니다. 하지만 레히는 이내 배의 철창 안에 갇혀 지내게 됩니다. 한나는 그런 레히에게 음식을 줍니다. 그리고 부쩍 가까워집니다.
“저희는 새로운 놀이를 발명했지요. … 저는 품속에 지니고 있는 수첩에 그림을 그려서 설명했어요. … 조금 지나니 레히가 더 많이 그림을 그리더라고요. 오히려 레히가 사용하는 단어를 제가 배우기 시작했어요.”
한나와 레히가 필담을 나누는 소통의 현장은 흡사 영화 <E.T.>에서의 저명한 손가락 소통 장면, 영화 <미지와의 조우>에서의 음악을 통한 소통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두 영화 모두 공교롭게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네요. 스티븐 스필버그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낯선 존재와의 조우와 유대감을 형성하는 일련의 장면들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수단은 중요한 것이 아닐 테죠.
이렇듯 서로에 대한 유대감을 쌓게 된 한나와 레히가 함께 레히의 집을 찾아가기로 하면서 소설이 마무리되는 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이 소설이 신화적 모험서사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읽었습니다. 하나의 소설 안에서 기존의 소설들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여러 감정을 느끼게 되는 특이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얻게 해준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꼭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좋겠네요!
+P.S.
아무튼, 이 과정에서 화자는 레히가 ‘크세노토스의 아이들’, ‘세계를 유지하는 힘을 해석하고 나아가 그 힘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죠.
여기서 크세이노토스에 대해서도 정리를 해봐야할 것 같아요. 이 소설에서 크세이노토스라는 용어는 범신론적 신 혹은 자연세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소설의 초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 위대한 크세노토스께서는 우리가 내딛는 모든 육지와 바다, 그리고 하늘을 의미하잖아요? 방랑하는 미친 거인 다아즈만이 그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을 뿐이죠. …”
그러니까 크세노토스 종교는 자연현상을 크세노토스의 영역으로, 본인들 시스템 안에 위배되는 행위나 악을 미친 거인 다아즈의 영역으로 몰아낸 종교로 보입니다.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듯 호르길리우스는 이러한 세계관 내에서의 신화적 가부장적 영웅의 상징이죠.)
이러한 세계관에서, 연대를 택한 소수자들인 한나와 레아는 이러한 기존의 세계관에 균열을 낼 수 있을까요? 문득 둘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작가님이 다음 내용도 써주실 때까지 잠수한 것처럼 숨참고 기다리겠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