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의 주마등이라면… 감상

대상작품: 기사의 회고 (작가: SL Kim,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7시간 전, 조회 9

[줄거리]

변방 영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한 소년이 중앙 성회의 부름을 받아 기사 후보생이 된다. 십수 년의 가혹한 훈련을 거쳐 동방 기사단 ‘벨파랏’의 기사가 된 그는 결혼하고, 아들을 낳고, 지휘관이 되어 대륙 동쪽 최전선에서 악마들과 싸운다.

어느 날 밤, 세 개의 날개를 가진 대악마 베카레츠가 이끄는 대규모 악마 군단이 도시를 포위한다. 성벽 동쪽을 지키던 그는 다섯 명의 기사와 함께 성벽을 뛰어내려 베카레츠와 맞선다. 동료들의 희생 끝에 그는 베카레츠의 목을 베지만, 놈의 마지막 일격에 치명상을 입는다.

죽어가는 순간, 그의 눈앞으로 평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꽃을 안겨주던 어머니와 누이, 검을 건네주던 아버지, 마차를 따라오던 친구들, 함께 훈련받던 동기들, 전사한 전우들을 위해 밤새 편지를 쓰던 밤, 결혼식, 아들의 얼굴… 그리고 지금 성문 안에서 불안에 떨고 있을 아내와 잠들어 있을 아들.

멀리서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지원군이 도착한 것 같다. 그는 어머니의 자장가를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선한 싸움을 마치고 달려갈 길을 다 갔노라.”

 

 

 

사람들은 죽기 직전 주마등을 본다고 한다. 평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기사의 회고]는 한 영웅의 일생을 죽어가는 순간의 회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화려한 전투 장면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다만 한 명의 기사가 꽃을 받아 들고 고향을 떠나던 날부터, 동료들의 희생 위에서 대악마의 목을 베고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를 담담하게 그려낼 뿐이다.

그런데 이 담담함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완성된 삶의 무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특별한 영웅이 아니다. 변방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 기사가 되었고, 결혼했고, 아들을 낳았고, 동료들과 함께 싸웠고, 마지막 순간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그 ‘전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지막까지 그들의 모습은 용맹했고 명예로웠노라고 반드시 적어서 보냈다. 그리고 끝내 기사가 되지 못한 전우들의 가문의 문양을 갑주의 가슴팍에 새기며 그들을 영영 기억하겠노라 맹세했다.

전사한 동료들을 위해 밤새 편지를 대신 쓰던 장면. 가슴팍에 전우들의 문양을 새기던 장면. 이 작은 디테일들이 주인공의 삶이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강한 전사’가 아니라, 동료를 기억하고, 책임을 다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 ‘완성된 인간’이었다.

 

[두 개의 여정, 두 개의 주마등]

『발할라를 위하여』의 아스발과 『기사의 회고』의 이름 없는 기사. 두 사람의 여정은 흥미롭게도 정반대의 궤적을 그린다.

https://britg.kr/review-single/233683/

아스발은 49번 죽으며 시작했다. 겁쟁이로 도망쳐 ‘애스케르커’라는 이름을 버리고, 49년을 속죄하며 살았고, 그 후 49번의 전투에서 죽고 부활하며 진정한 전사로 거듭났다. 그의 여정은 실패에서 시작해 완성으로 나아가는 성장의 서사였다.
반면 이 기사는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 사랑받는 아들로 자랐고, 정예 기사가 되었고, 가정을 꾸렸고, 지휘관이 되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그의 여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 완성의 서사다.
아스발이 동료들과 함께 싸우는 법을 49번의 죽음 끝에 깨달았다면, 이 기사는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악마를 마주하고서는 자신 말고는 그것을 상대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차라리 이쪽에 나타나서 다행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베카레츠를 상대해나갔다.

 

한순간이었다. 나는 동귀어진의 각오로 놈의 목을 베고 이어서 어깨죽지로부터 허리춤까지 사선으로 베어넘겼다.

아스발이 “우리는 우리가 지킨다”를 외치며 동료와 등을 맞댄 것처럼, 이 기사 역시 다섯 명의 동료와 완벽한 호흡으로 베카레츠를 쓰러뜨린다. 하지만 아스발은 그것을 배워야 했고, 이 기사는 이미 정해진 길을 걸어오며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명확하다. 아스발은 ‘되어가는’ 영웅이었고, 이 기사는 ‘이미 자신의 길을 알고 있는’ 영웅이었다.

 

[주마등에 담긴 것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주마등은 어떻게 다를까?

아스발의 주마등에는 49번의 전장이 담겨 있을 것이다. 처음 겁에 질려 죽었던 순간, 가름과 싸웠던 암흑, 발할라에서 본 동료들, 함께 “발할라를 위하여”를 외치던 에인헤랴르들. 그의 주마등은 성장의 기록이다.

반면 이 기사의 주마등에는 그의 삶 전체가 담겨 있다.

꽃을 안겨주던 어머니와 누이. 검을 건네주던 아버지. 마차를 끝까지 따라오며 눈물 흘리던 친구들. 매달 한 편씩 편지를 보내던 어머니. 함께 훈련받던 동기들. 전사한 전우들. 아내. 아들…

잠시지만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당장 불안에 떨고 있는 아내와 곤히 잠들어 있을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주마등에는 화려한 승리도, 거대한 업적도 없다(물론 남은 사람들은 그의 업적을 기억하겠지만). 다만 사랑했던 사람들, 함께 싸웠던 동료들,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만이 담겨 있다. 이것이 진짜 영웅의 주마등이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 지키고 싶었던 일상. 함께했던 순간들.

아스발이 라그나로크의 전장에서 “발할라를 위하여!”를 외칠 때, 그것은 동료들과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발할라임을 깨달은 외침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기사가 죽어가며 떠올리는 것들 역시, 그의 삶 전체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무언가 였음을 보여준다.

 

[미련 없이 눈을 감을 수 있는 삶]

가장 인상적인 것은 두 영웅 모두 죽음 앞에서 후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스발은 49번째 전투에서 동료들과 함께 “발할라를 위하여!”를 외치며 달려들었다. 설령 죽더라도, 동료들과 함께 싸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선한 싸움을 마치고 달려갈 길을 다 가도록 나는 내 신념을 지켜왔노라. 이젠 먼저 떠난 전우들 앞에서 말할 수 있겠지.

그는 자신의 검을 아들에게 전해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한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남은 자들이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가족들은 그가 명예롭게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을 것이다.

이 태연함. 이 평온함.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완전히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멀리서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지원군이 도착했다. 내일 아침, 그가 지킨 사람들은 살아서 해를 맞이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스발이 수천 번 죽어도 좋다고 했던 것처럼, 이 기사 역시 죽음 앞에서 평온하다. 왜냐하면 둘 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지켰기 때문이다. 아스발은 동료들과 함께 싸울 수 있었고, 이 기사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켰다.

 

[이 정도의 주마등이라면]

이 두 작품을 함께 읽고 나면 생각하게 된다. 내가 죽는 순간, 내 주마등에는 무엇이 담길 것인가?
아스발처럼 49번의 실패 끝에 얻은 깨달음? 아니면 이 기사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걸어온 길?

어쩌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순간에 “나는 내 신념을 지켜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료들과 함께 싸울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다.
아스발의 주마등에는 성장이 담겨 있고, 이 기사의 주마등에는 완성이 담겨 있다. 하지만 둘 다 같은 것을 향해 있다. 사랑했던 사람들, 함께한 순간들, 지켜낸 것들.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킨 명예.
둘 다 아름답다. 성장의 서사도, 완성의 서사도. 중요한 것은 마지막 순간 무엇을 떠올리느냐가 아니라, 그 주마등에 후회가 없느냐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삶이었는가.

이 정도의 주마등이라면, 정말로 미련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래전에 유튜브에서 봤던 음악영상인데, 짧지만 이 소설과 꼭 한번 같이 보길 권한다.

[The Last Stand]

(이런거나 좋아하니 맨날 사나이 같다는 소리나 듣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