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청귤은 시대의 젊은 초상을 가장 유머 넘치지만 다정하게 그려내는 작가다. 그의 소설은 보통의 사람이 보통으로 살아가는 이야기에 아주 매력적이고도 신묘한 약을 한 방울 떨어뜨린 듯한 느낌을 준다. 평범한 주인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를 둘러싼 세계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 ‘분위기’는 환상 내지는 흥미로운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다. 청귤 작가는 가장 흔한 주인공의 캐릭터에서 가장 비범한 매력을 만든다. 그러니 그가 대학원생이니 취준생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쓴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취준생이야말로 가장 평범하고, 흔한 데다가 단 한 방울의 묘약이 필요한 존재이지 않은가.
「잠자는 도서관의 취준생」이라는 제목의 이 단편은 신기하게도 제목을 보았을 때 (분명 이 소설의 원작으로 삼았을)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숲’에서 ‘도서관’으로, 공주에서 취준생으로, 주인공과 그가 있는 장소만 바꾸었을 뿐인데 제목의 느낌은 근본부터 변화한다. 푸릇한 숲과 (적어도 취준생에게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도서관,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주와 늘 다크서클을 턱까지 내리고 사는 취준생. 독자들은 소설을 다 읽고서야, 또는 단편을 전부 읽고 제목을 다시 보아야만 이 글이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원류로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이미 완성된 하나의 소설을 차용한 창작에서 원작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는 것은 독자의 늦은 발견과 관련 있다. 이 소설에서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늦게 발견되지만 분명 스토리에 온전히 녹아 있다. 그러므로 고전의 효과적인 현대식 차용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청귤 작가는 어떻게 숲 속의 공주를 취준생에 녹여 내었을까. 인물과 공간이 분리에 초점을 맞추어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잠자는 공주’와 ‘취준생’은 캐릭터상의 대척점에 있다. 공주는 아름다운 숲에서 자신을 깨워줄 인연을 기다리며 꿈꾸지만, 취준생은 날마다 동일하게 지나가는 하루를 뒤로 하고 피곤에 찌든 채 잠든다. 공주의 꿈은 여유롭고 낭만적인 데가 있지만, 취준생의 잠은 어딘지 안쓰럽고 삭막하다. 이러니 두 소설을 연관 짓기가 힘들 수밖에. 청귤 작가는 이토록 대척점에 있는 두 소재를 오히려 효과적으로 뒤섞는다. 공주와 취준생. 이 둘을 모두 한 이야기에서 살려내려는 것은 시도만으로도 독특하다. 그러나 그 둘의 대화에서 독자들은 청귤 작가 문체의 특징이기도 한 묘한 블랙코미디의 기운을 느낀다. ‘김청귤식’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 농담들은 취준생과 공주가 소설 내부에서 발 딛는 위치를 명확한 극단으로 고정한 후에 그 둘의 대화가 전혀 가까워질 수 없는 속성의 인간들이 나누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여기서 나와 함께 있어요. 이곳은 언제나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 어두운 밤도,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도, 타인의 가시도 없죠. 적당히 식은 장미차와 보드라운 흰 빵에 장미잼을 발라 먹어요. 욕조 한가득 장미 꽃잎을 뿌려도 좋지요. 우린 언제나 행복할 거예요.” (…)
“근데 난 아메리카노, 이거 좋아해요. 장미차나 장미잼은 좋아하지 않고요.”
공주는 은은향 향을 느끼며 장미로 만든 차와 잼을 먹지만, 취준생은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장미 차와 잼은 취준생이 아침 내내 먹고 생각한 진미채 무침, 컵라면, 소불고기처럼 짜거나 맵지 않다. 그저 달콤한 장미의 향을 상상하면 현실에서 잠시 멀어지는 느낌마저 든다. 공주는 동화 속의 환상에서 오랜 시간 지내 바깥을 모른다. 그러나 취준생은 춥고 시린 겨울을 몸으로 통과하며 이제 막 따뜻한 도서관으로 들어온 참이다. 공주와 취준생만큼 다른 것은 둘이 놓인 공간이다.
취준생의 아침부터 묘사되는 이 소설은 그의 집에서 시작된다. ‘푸르스름한 빛이 내려앉은 주방’, ‘추운 방안에서 먹는 컵라면’, ‘차가운 고깃조각’, ‘온 집안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라는 설명으로 보아 이 공간은 매우 춥고 어두우며 시리다. 그곳을 나온 취준생 ‘나’는 이른 아침의 도서관에 다다른다. “도서관은 온통 빨간색과 초록색의 향연이었다”. “새빨간 장미가 가득 피어 있는 도서관”은 푸르게만 묘사되던 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초여름에만 한철 피는 장미는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추위와 대조된다. 마치 환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도서관 속 공주처럼.
가장 현실적인 존재인 취준생과 가장 환상적인 공주를 이리저리 실험하며 하나의 이야기 안에 얽어 놓은 이 소설은 고전과 현대를 매끄럽게 경유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예상대로 분량을 늘렸을 때 이 스토리텔링은 더 큰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잠자는 도서관의 취준생」은 이미 취준생의 행보를 중심으로 도서관 내외의 두 세계를 완전히 분리하는 데에 성공했으며 각 세계의 현실성과 환상성을 대비하는 동시에 그 안에 개별의 메시지를 적당히 녹여냈다. 이 소설이 더 촘촘한 밀도와 개연성으로 독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보완되어야 할까. 누구도 하지 못한 상상을 교묘한 씨실과 날실로 이어내는 청귤 작가의 글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이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부터는 작가의 구역입니다.
청귤 작가는 주인공 취준생의 눈에 올라타 그의 행보를 슬그머니 따라다닌다. 이 취준생의 세상에서 한순간에 변화한 것은, 도서관의 모습이다. 취준생 ‘나’눈 아침을 먹은 후 습관적이고도 일상적으로 도서관에 간다. 그러나 그가 매일 다니던, 닳고 닳은 이 보통의 공간은 하루아침 사이에 환상적으로 바뀌어 있다. 전술하였듯 「잠자는 도서관의 취준생」은 이미 신선한 상상이 뒷받침된 단편이기에 이야기를 읽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작은 질문들을 해결해 나간다면 충분히 많은 이의 일상적 공감을 살 수 있다.
이 소설을 처음부터 훑어보자. 대조되는 두 개의 공간이 완충지대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으며 그 안에 각 한 명의 인물이 서 있다. (집-취준생, 도서관-공주) 그렇다면 무엇보다 이 공간들은 각각의 이미지가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가 두 곳을 대비하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취준생인 ‘나’의 시선을 따라 소개되는 공간은 총 세 군데다. 그의 집과 도서관, 그리고 중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집-도서관 사이의 길이다. 취준생은 집에서 가장 춥고 도서관에서 가장 따뜻하다. 그렇다면 도서관으로 향하는 중간 지대에서 그의 감정은 서서히 데워져야 한다. (물론 그가 환상의 공간으로서 도서관을 마주하는 것은 그곳에 다다른 직후지만) 작가는 우선 이렇게 세 개의 공간을 머리에 형상화해야 한다.
가장 차가운 공간인 집을 먼저 보자. 집은 이 소설의 출발지이기 때문에 취준생이 처한 상황을 꼼꼼히 설명하는 동시에 그가 앞으로 이곳에서 ‘나갈’ 예정임을 암시한다면 더욱 좋다. 그 끝이 환상 속 도서관이라면 말이다. 전통적으로 ‘집’은 안온함과 편안함을 뜻했다. 그러나 청귤 작가가 소설에서 그려낸 대로 최근의 ‘집’은, 특히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왠지 불안하고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공간일 때가 많다. 작가는 이 점을 충분히 꼼꼼한 시선으로 포착했고, 극단으로 어둡고 시린 분위기도 형성했다. 그러나 소설의 도입에서 도대체 ‘왜’ 취준생에게 집이 어두운 공간이어야 하는지 명확한 답이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진미채를 “내가 제일 좋아하는데 비싸다고 해주지 않는 반찬”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 집의 경제적 위기 때문인가 싶다가도 소불고기 반찬을 먹는다는 데에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 문장에서 독자는 이 취준생의 집이 어둡게만 느껴지는 이유를 안다. 그는 가족 공동체에 온전히 편입되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서 외로워하고 있다. “가족들은 저녁에 식탁에 둘러앉아 따뜻한 상태에서 먹었겠지? 어제 난 뭘 먹었더라…?” ‘나’는 “엄마가 깨어나기 전에 나가야만” 했다는 점에서 가족의 지원과 응원조차 받고 있지 못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독자가 충분히 곱씹기 전에 취준생은 도망치듯 집에서 나와 버린다. 현재 이 소설의 전체 분량을 고려했을 때, ‘나’가 집에서 밥을 먹고 나가기까지의 과정은 짧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의 흐름이 워낙 짧은 탓에 독자는 이 취준생의 가정 형편과 주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그와 함께 집을 나와야만 한다.
만약 분량이 늘어난다면 취준생인 ‘나’의 상황, 특히 가정 내부의 어두움을 인물 간의 대화(엄마와 ‘나’의 대화 등) 내지는 행동(공부가 끝난 ‘나’가 조심스럽게 집으로 들어와 방으로 향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가족의 모습 등)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가장 분명하고 좋은 것은 가족 중 한 명을 빌런(villain)으로 설정하는 것이다(지금 상황에서는 그나마 콕 집어 부정적으로 묘사된 엄마가 그 역을 가장 잘 수행할 것 같다). 또는 가족 모두가 빌런일 수도 있다. 그러면 집은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디스토피아적 공간이 된다,
도서관은 어떤가. 이런 디스토피아와 완전히 대비되는 유토피아다. 누구도 ‘나’를 춥게 하지 않는다. 자극적인 음식으로만 점철된 곳도 아니다. 현재로서는 집보다 도서관이 좀 더 완성된 공간이다. 공주가 있어 환상적이고, 취준생을 감싸준다는 점에서 안온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취준생인 ‘나’에게 이곳은 너무도 갑자기 변화했다. 생각해보자. 어제까지 반복적이고도 기계적으로 살아온 내 하루의 커다란 일부는 도서관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하룻밤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도서관이 동화 속 한 장면을 옮겨다 놓은 듯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내부뿐 아니라 외형도 그러하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도서관 안으로 발을 옮긴다. 심지어 공주와 자연스레 대화를 나눈다. ‘이게 꿈인가’라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취준생은 도서관의 급작스러운 변화를 태연히 받아들인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오늘 도서관에 가는 게 수험생이고 취준생이라지만, 그의 감정에 조금의 요동도 없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도서관을 보는 순간 그곳에 들어가고 싶었을 수도, 잠깐의 거부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작가에게 이 잠깐의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 불필요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음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 감정의 미세한 변화를 잘 활용한다면 취준생의 캐릭터를 더욱 확실히 드러낼 수 있다. 만약 그가 취업 준비에 몹시 찌들어 있다면 ‘내가 드디어 환각을 보나’라고 시니컬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정말 기댈 곳이 필요하고 휴식 절박한 상황이라면 따뜻하게 바뀐 도서관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환경이 급작스럽게 바뀌어 짜증이 났을 수도, 일상이 지나치게 단조로워 어떤 감흥도 없이 도서관에 발을 디뎠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캐릭터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는 매력적인 장면은 소설의 변곡점으로도 쓰일 수 있다. 뭐니뭐니해도 주인공이 다른 세계에 진입하는 순간이니 말이다.
이렇게 주인공이 도서관에 무사히 진입해 공주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결말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이 소설은 한 가지 희망을 내포하며 마무리된다. 작가는 주인공이 이 각박한 세상에서도 ‘무언가’를 구하기로 다짐하는 것을 마지막 장면으로 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공주’인 것과 그가 처한 상황에 충분한 개연성이 있을까. 공주를 ‘구출’하는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만약 공주를 현실로 불러내는 것이라면, 그 행위와 과정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 이 소설은 다시 쓰인 모습을 상상하기가 매우 어렵다. 작가의 머리에 어떤 설정이 있는지 충분한 분량으로 다 풀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머리에 ‘나’가 구해내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공주라고 말하고 싶다면 더 많은 근거를 들어야 한다. 공주는 도서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심지어 그녀의 세계는 안전하고 따듯하기까지 하다. 요컨대 공주가 도서관 밖을 나가는 것은 더 위험하고 추운 공간으로 내몰리는 것과 같다. 직관적으로 보자면 공주가 ‘나’를 구하는 편이 더욱 매끄러운 전개다.
그럼에도 ‘나’가 공주를 구해야 한다면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한 가지 힌트는 있다. 공주는 누군가가 자신을 구하길 원하지만 ‘나’는 지금 그럴 처지가 아니다. 그 자신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당신을 구하러 온 게 아니에요. 나 자신도 못 구하는데 남을 어떻게 구하겠어요”). 여기서 누군가를 ‘구하지 못함’은 주인공 ‘나’의 결핍을 의미한다. 주인공에게 결핍이 있을 때 작가는 그의 결핍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소설의 궁극적인 끝은 ‘나’가 남을 구할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두 공간의 불균형을 상정했을 때 이쪽 공간에 사는 사람이 저쪽 공간의 대상을 구하는 플롯은 상당한 재미를 준다. 이런 일련의 사고(思考)를 통과한다면 「잠자는 도서관의 취준생」은 주인공인 ‘나’가 자신을 구하는 동시에 남을 구하는 ‘구출의 플롯’ 내지는 그가 내면의 성숙을 이루는 ‘성장 서사’로 변모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형태의 변화는 청귤 작가가 지금껏 써온 소설의 내용과도 썩 잘 어울린다. 가장 평범한 취준생이 동화 속 공주를 구해내는 이야기. 평범한 ‘나’의 일상에 떨어진 단 한 방울의 묘약은 이제 그의 삶을 바꿀 준비를 마쳤다.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로서도 이리저리 말을 얹었으니 이만 글을 줄이려 한다.
모쪼록 현실과 가상의 묘한 혼합이 이 소설에서도 매끄럽게 완성될 수 있기를. 더 넓어질 시공간에서 취준생과 공주가 더욱 자신의 삶을 온전히 다질 수 있기를. 두 인물의 결합 안에서 청귤 작가가 매만질 서로 다른 아픔, 그리고 장미처럼 피어날 봄날의 향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