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슨 미친 짓인가, 마르스의 아들들이여, 뱀의 이빨의 자손들이여, 무엇이 너의 두뇌를 흐리게 하였는가? 징을 두드리고, 굽은 뿔피리를 불고, 마술로 사기를 치고, 여인들은 소리를 지르고, 술에 취해 고성방가하고, 사람들은 더럽고, 광대들은 북을 치고 ― 나팔이 울리고, 칼들이 뽑혀 나오고, 창들이 너의 눈앞에 번쩍일 때 함께 한 용사들이여, 이제 이 모든 소동들이 너희들을 놀라게 하느냐?
위의 인용은,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1》에 수록된 〈펜테우스와 바쿠스〉 중, 바쿠스 축제를 즐기는 추종자들을 보고 펜테우스가 외친 말이다. 테베의 통치자였던 그는 바쿠스 신도들의 광기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신을 분노케 하지 말라는 충고에도 불구 신도들 중 한 명인 어부를 잡아들인다. 아코에테스란 이름의 어부는 자신이 바쿠스를 섬기게 된 일화를 고백하고, 펜테우스는 본보기를 삼고자 그를 구속하지만 알 수 없는 기적에 의해 아코에테스는 풀려난다. 펜테우스는 기묘한 흥분에 이끌려 신성한 키타이론 산을 오르고, 그를 짐승으로 착각한 이모와 어머니에 의해 사지가 찢겨 최후를 맞이한다.
화두를 유지하고 이야기를 조금 비틀어 보겠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 여신도들Bacchae〉은, 그의 사후 기원전 405년에 초연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디오니소스의 계략이 펜테우스에게 직접적으로 미친다는 차이가 있으며, “모든 게 신의 뜻”이라는 결말부 코러스의 합창은 신들의 잔혹함을 장엄히 암시한다. “슬픈 사람man of sorrows”이란 뜻의 펜테우스는 에키온과 아가베의 아들이며, 아가베는 아레스의 뱀을 죽인 테베의 창업 군주 카드모스의 딸이다. 또한 펜테우스의 증손자는 오이디푸스로,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Oedipus Tyrannus〉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필자는 극작과 신화 속에 숨겨진 어떤 비밀을 누설하려는 게 아니다. 이 연결고리는 전적으로, 텍스트가 자아낸 하이퍼링크의 방황 경로거나 필자의 자유 연상에 의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 신화가 고대 그리스인과 그 후계자들에게 있어 핵심적인 정신문화였으며, 희곡이라는 형태로 끊임없이 변모하고 재생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 희곡은 고대 그리스의 종교 행사였던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상연되었으며, 제전에 참가하는 작가들은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사티로스극2을 제출해야 했다. 제전에 선발된 작가에게는 코레고스choregos가 붙었으며, 이들은 부유한 시민이자 후원자로서 합창단 구성과 연극 제작에 필요한 재정을 담당하였다. 아테네에서는 가난한 사람들도 연극을 볼 수 있도록 공연기금Theorica3이 설치되었을 정도로 연극이 대중적인 문화로 인식되었으며, 성년의 그리스인들이 폴리스의 공감대와 의제를 학습하고 공유할 수 있는 교육적 기능도 담당했다.
고대 그리스 희곡에서는 극장 얘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경사면에 지어진 극장은 아크로폴리스 아래에 있으며, 인간의 정수리보다 위에 있으되 신들의 발 아래 놓였다는 점이 극장의 위치가 가지는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은 건축 시 석재를 꼭대기4로 옮기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극장 역시 아크로폴리스 인근에 존재했기 때문에 신전 건축에 쓰고 남은 석재를 극장 건축에 활용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돌 뿐만 아니라 나무도 사용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근거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극장에는 ‘신성이 세속을 향해 한 발짝 다가와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어떤 연결’이 있다고 필자는 감히 주장해 본다.
이 영험한 공간은 ― 마치 현대의 극장이 그러하듯 ― 크게 좌석theatron·무대orchestra·배경skene으로 나뉘어 있으며, 언어의 힘을 믿는 고대 그리스인의 사상을 음향학적 구조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연극 연출의 선구적인 장치들도 여기서 출발하였다. 죽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자 배우를 눕혀서 내보내는 수레 에키클레마ekkyklema, 극의 부연 설명을 위해 삽입하는 무대미술 스케노그라피아skenographia5, 무대의 복합 구조물인 에피스케니온episkenion까지 ― 현재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장치들이 이미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유명한 ― 아이스퀼로스가 즐겨 썼다고 알려진 기중기 메카네mechane 역시 고대 그리스 연극의 산물이다.
에우리피데스는 본인의 비극 작품 〈메데이아Medeia6〉에서 신격을 지니지 않은 등장인물에게 메카네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관절 이게 무슨 상관인가 묻는다면, 필요한 재료를 모두 모았으니 필자도 더 이상 횡설수설하지 않겠다.
드리민 작가의 창작 그리스 비극 〈클뤼타임네스트라Klytaimnestra7〉는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Elektra〉에 대한 현대적인 답변이다.
브릿G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비극 대본인 이 작품에서, 독자가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는 것은 등장인물과 장소에 관한 설정이다. 대본은 연극의 기초를 설정하는 뼈대이기 때문에, 극에 앞서 선결해야 할 조건들이 있다. 배경의 시공간이나 필요한 소품, 무대 구조, 무대의 전후좌우,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 및 신분, 그리고 복식. 이러한 것들을 선결함으로써 극의 연출은 작가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일관성을 얻게 된다. 본작은 코러스의 규모나 장소에 대한 엄격한 지시를 두고 있지 않으며, 등장인물에 관한 정보도 보편적인 전승을 채택하고 있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은, 코러스장에게 허름한 옷과 화려한 옷을 동시에 갖출 것을 지시했다는 점이다.
코러스장은 대중 정서를 통해 극을 바라보면서도, 해석의 규준을 제시하여 이상적 관객 역할을 하는 적극적인 중간자이자 한 명의 배우이다. 코러스는 일반적인 시민에서부터 환상적 존재까지 다양한 신분으로 극에 등장하며, 코러스장 또한 다양한 개성을 지닐 수 있다. 코러스장이 겉에 허름한 옷을 입고 있다는 설정은, 전체 코러스가 비근한 신분으로 등장할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안에 화려한 옷이 있음을 지시함으로써, 작가는 코러스장에게 구분되는 역할과 신분을 부여했음을 고백한다. 전통적으로, 코러스장이 등장인물과 대화 이상의 고수준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8을 감안하면 이는 흥미로운 점이다. 그러면서도 코러스장의 정체에 대해 단서를 주지 않는 것으로, 본작은 대본이면서도 “무언가를 암시하지만 알려주지는 않는” 산문 문학의 특성을 약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 희곡은 음절 의식이 강한 문화권에서 집필·향유되었고, 중간에 합창이 삽입9되었으므로, 부분적으로 운문의 특성을 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리스 희곡의 한글 번역본은 이 특성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향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어 특성상 운율은 가변적인 음수·음보·압운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 본작은 (거칠게) 4음보를 기준으로 구성되어 장중한 느낌으로 읽히고, 적절한 위치에서 자음운을 사용하여 발음할 때의 강세와 리듬이 쉽게 전달된다.10
본작은 코러스의 구체적인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 열린 해석을 염두에 두었거나 실제 상연을 가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이디푸스 왕〉의 원로들이나 〈엘렉트라〉의 아르고스 촌부들처럼, 코러스는 해당 장소에 존재할 당위를 설명해 줄 간단한 신분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본작의 배경은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집이며, 코러스장에게 부여된 겉옷은 “허름한 옷”이기 때문에, 여기서 오는 부조화가 기묘한 상상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허름한 옷을 입은 필부들이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집이라는 무대에 있다면, 본작에서의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미케네의 궁정이 아닌 은신처에 숨은 상황일 수도 있다. 여러 가정을 도출할 수 있겠지만, 극의 해석에 다양성을 부여하는 것 외의 의미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넘어가도록 하겠다.
메카네를 사용해야 하는 연출이나 잔인한 장면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 부분은, 고전 비극의 규칙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이다. “지붕 위에서” 같은 지시문과 “하늘의 신과 같은 길을 거니는”이란 대사는, 신성과 불멸을 지닌 등장인물이 무대 장치를 통해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에 더해, 죽어서 퇴장을 앞둔 인물은 에키클레마에 실린 채 등장하고, 코러스가 인물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신성한 존재는 죽을 수 없으므로, “구름11이 되어 사라졌다”는 코러스의 설명은 헬레네의 퇴장을 다른 방법으로 묘사할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스 비극을 창작하는 담대함 그 이상으로, 고전 비극의 세계를 작가가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라 할 수 있다.
중반부 헬레네와 후반부 아폴론, 아테나의 등장은 에우리피데스 〈엘렉트라〉의 영향이 적지 않다. 에우리피데스는 “장치로부터 신이 내려와 모든 것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전개”를 자주 사용했다. 〈엘렉트라〉에서는 이 역할을 디오스쿠로이Dioscuri12가 맡았는데, 이들은 클뤼타임네스트라와 헬레네의 형제이고 튄다레오스의 자식Tyndariai으로도 불렸다. 본작에서는 신탁의 주인인 아폴론과 오레스테스의 죄를 심판했던 아테나가 자리를 대신하고, 이부자매인 헬레네는 디오스쿠로이 대신 신성(불멸)을 지닌 혈육으로 등장하여 흥미로운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복수의 테마 속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표독스러운 여성상을 자주 그려내었고, 이 때문에 “도덕적이지 못한 여성을 등장시켜 여성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성 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편향적 비난에 지나지 않으며, 〈메데이아〉·〈헤카베Hekabe13〉에서 보여준 여성상은 비록 입체적이지는 않아도 시대의 장벽을 허무는 강렬함을 지니고 있다. 본작의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에우리피데스 〈엘렉트라〉의 우유부단한 어머니상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코러스에게 동정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불경함을 지적받는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캐릭터성은, 공정하지 못한 세상과 의심스러운 신탁 속에 원념으로 불타는 에우리피데스적 인물상의 영향이 아닌가 추측된다.
공교롭게도14, 필자는 여기서 “도끼를 들고 커튼을 열어젖혀 살인을 고백하는” 〈클뤼타임네스트라Clytemnestra after the Murder15〉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살인 앞에 당당하고, 또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복수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기울어진 정의와 자신에게 내려진 잔인한 운명에 대해 신들에게 항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본작의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인간에 대한 신들의 처우에 저항하고, 이것이 부당하다고 고발할 뿐 아니라, 부친살해의 연쇄에 얽혀 있는 그들이 아버지의 질서가 아닌 어머니의 질서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까지 한다. 이는 신화적 비극 속에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극단의 ― 그리고 최고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세계관은 논증과 대화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가 그린 세계는 신적인 개입에 의해, 혹은 우연에 의해 해결되고, 극단적으로는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파괴적인 힘에 휩쓸린 폐허만이 남는다. 그리고 인간은 그 속에서 짓눌리고, 그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클뤼타임네스트라〉 역시 에우리피데스의 시선 ― ‘부조리한 세계 속에 놓인 인간의 비극’과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갈등’이 배경과 전경을 채우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본작의 인물은 좀처럼 파괴되지 않으며, 미덕과 따스함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열려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코러스 사이(민중)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헤라16는, 필자가 본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이다. 인구어족으로 쓰인 신화에서 주신은 “손님을 환대하는 관습”을 관장하여 나그네와 걸인을 돌보았고, 제우스 역시 ‘바우키스와 필레몬의 이야기’를 통해 “제우스를 모시듯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헤라는 그런 주신의 반려이고, 제우스조차도 사사로이 벌할 수 없는 높은 위상을 지녔으며, 폭넓게는 지상의 모든 여인에게 힘을 행사하는 신으로도 볼 수 있다.17
코러스장을 극의 결정적인 장면에 개입시키고, 여인들의 신이 비근한 곳으로부터 나타나고, 예언과 정의가 아닌 제 3의 질서18에 의해 굴레에서 해방되는 점은 자못 의미가 크다. 이는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지니는 고유한 특징이자, 어째서 이 작품이 “창작 그리스 비극”인지를 보여주는 요소다. (필자의 좁은 식견으로 감히 주장하건대,) 코러스장에게 찬송과 해석 이상의 역할을 부여한 작품은 고전에서 전례가 없다. 또한, 군중의 대표자로서 해석을 주도하던 인물이 신성을 드러내고 해갈을 이끌어내는 모습은, 일반 대중의 정치의식이 강한 사회에서 발상 가능한 연출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는 장치로 내려온 신이 문제를 종결짓고 관객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데 반해, 본작은 신격의 개입이 수 차례 이루어지고, 운명과 죄의 무게를 덜어주는 신은 메카네가 아닌 “우리 사이에”서 출현하는 등, 클리셰를 여러 번 비틀고 있다. 플롯의 구성으로써 이는 일견 산만하게 보이지만, 관객에게 드라마틱한 시선을 요구하며, 부유하는 상징들이 느슨한 연결고리를 교차하는 지점은 우리에게 어떤 상상을 일으킨다. 필자는 이 연출이 마치 “정죄와 위로의 권능은 우리 사이에 있다”고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본작은 〈엘렉트라〉의 미진하고 무거운 결말과 달리, 등장인물들이 심리적 부담을 덜고 운명의 잔인함에서 벗어나는 결말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점은 에우리피데스의 후기 비극을 생각나게 하는데, 〈이온Ion〉과 〈헬레네Helene19〉는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해피 엔딩을 그리고 있으며, 전쟁에 대한 환멸을 표현한 중기 작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20 “불운과 굴레가 끊어진 사람들에게는 그 앞에 행복이 가득해야 하니까요” 라는 코러스의 마지막 인사도 〈엘렉트라〉의 오마쥬로 보이지만,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대사는 그것보다 개운하고 희망차게 들린다.
안녕히들 가세요! 안녕할 수 있고, 어떤 불운도 당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복 받은 사람이에요.21
종합하자면, 본작은 에우리피데스 〈엘렉트라〉와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재해석을 중심으로 창작되었고, 이외에도 그리스 비극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활용해 구성에 있어 독자적인 특징을 구축하였다. 이는 충분한 열의와 탐구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며, 고전에 경의를 표하는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 부디 이 표현들이 무례하게 들리지 않기를 ― 인물의 독백이나 코러스의 분량이 본작만의 독특한 수사법을 구축하기에 충분히 길지 않으며, 현 시대의 관점과 정서만이 자아낼 수 있는 해석 역시 고전을 경외하는 분위기 아래 다소 절제되어 있다. 때문에 필자는 다음의 결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비극을 네 글자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파란만장波瀾萬丈’이다.
그리스 비극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3대 작가들은 델로스 동맹과 아테네의 헤게모니 ― 그 굴곡진 역사를 경험한 세대였다. 아테네는 살라미스 해전을 기점으로 부흥하였고, 무역과 전쟁 경제를 통해 성장하였으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권을 상실하였다. 아이스퀼로스는 페르시아 전쟁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페르시아인들Persai〉를 창작했고, 소포클레스는 페리클레스의 실추를 〈오이디푸스 왕〉에 담았으며, 에우리피데스 〈트로이의 여인들Troades〉에는 아테네가 멜로스를 파괴할 적의 환멸이 투영되어 있다. 그리스 비극에는 그 시대의 오만이, 부도덕이, 그리고 분노와 슬픔이 있다. 모든 창작물이 그러하듯, 고대 그리스 비극은 당대의 사람들이 지닌 의식과 문화의 소산인 셈이다.
이러한 전제 하에, 현대를 사는 우리 세대가 고전 그리스 비극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답의 출발점을 도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필자는 그리스 비극을 ‘파란만장’이라 정의하였다. 지금 우리의 삶과 세계는 어떠한가? 금권 정치를 제 2의 귀족정으로 굳히려는 위정자들이 있고, 위헌 판결을 번복하여 시민의 권리를 파괴하는 법관들이 있으며, 패권을 위해 전쟁범죄를 자행하는 국가가 있다. 과연 현대가 고대에 비해 파란만장하지 않다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삶에 비극이 따르는 한, 이를 노래하는 것은 언제나 참되다. 비애는 어떤 그릇에도 담길 수 있으며, 다만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시대가 정해져 있을 뿐, 고문古文과 금문今文을 가리지는 않는다. 즉, 우리 시대의 정서와 이야기를 그리스 비극의 형태로 쓴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 비극이 되는 것이다.
현대의 작가가 고전 작품을 쓴다는 건, 고전이 지닌 형식미에 지금의 의제와 정서를 투입하고, 과거의 좋은 문장을 현대인이 향유하는 문장 구조로 치환하고, 이전 시대에 시도되지 않았던 것들을 새로이 넣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그리스 비극을 창작한다면, 여기에 더해, 신화 원전의 뼈대에 현대적인 해석을 살로 붙이는 게 필요할 것이다. 마치 고대의 비극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의 작가가 쓴 그리스 비극은 지금의 의식과 문화가 신화극의 형태로 말하여지는 것이다.
고전주의적 창작은 ‘고전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동시에 ‘고전을 향한 도전장’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후대의 작가는 불멸과 겨루는 판크라티온Pankration 선수이며, 새로운 고전이 되기 위해 도전하는 문예사文藝史의 주역이다. 개인적으로, 〈클뤼타임네스트라〉 이후에도 작가가 계속 그리스 비극에 도전하기를, 그리고 다음 저작에서는 “위대한 문호”들과 겨루는 한 명의 비극 작가로서 담고 싶은 이야기와 기법을 마음껏 발휘하기를 필자는 감히 바란다.
이 장황한 글을 마치며, 그리스 비극에 도전한 드리민 작가에게 좋은 코레고이choregoi22가 함께 하기를, 그리고 우리 시대의 제전과 극장에서 결실을 거두기를 기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