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스포가 많으니, 소설을 먼저 읽고 오시길 권해드립니다. ^^
분량은 136매였으나, 소설의 복잡함을 따라가는 기분은 중편에 버금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눈이 호강해 좋아하는 영화 ‘인셉션’의 줄거리를 좇느라 벅찼던 것처럼. 물론 재미없었으면 중간에 그만뒀겠지만 시간 투자가 절대 아깝지 않는 소설이라 자진해서 리뷰까지 내처 쓴다.
일단 소설의 줄거리부터 간단히 정리해보고 가겠다. 혹시나 모를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최대한 스포를 자제하는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잘라내는 장면이 많다.
이 판타지의 배경은 까마귀 시이다. 15대 시장이 집권하면서, 채무를 잔뜩 안아 파산 지경에 놓인 까마귀 시의 경제 위기를 타개할 목적으로 정부는 마도사들을 이용해 지옥의 악마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까마귀 시의 시민들 영혼을 대가로 지불하고 채무를 청산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유령회사인 마뷸러스와 마뷸러스 관계자들을 만들어낸다.
일부 귀족과 재벌에게만 개방된 삼족오 극장에서 일명, 마뷸러스 해체양식이라 불리는 것 중에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연극은 사실 그 연극에서 사용된 투명벽을 관찰하는 순간, 관객은 자동적으로 악마와 계약이 돼서 자신들의 영혼을 무의식적으로 뺏긴다. 이 연극을 대중 취향으로 확대해서 지옥과의 계약 관계를 이행하는 게 고위공직자들이 생각해낸 경제위기 극복 방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술사, 마술사, 연금술사를 통칭하는 마도사들 간에 파벌이 형성되고 마뷸러스 변형주의자들이 새로운 우주 창조를 시도하기 위해 뒷골목 범죄사건을 저지르는 데서 발생한다. 마뷸러스 변형주의자들은 강령술사 길드 대표인 추파카브라를 중심으로 납치와 신체 매매로 인공종족을 만들어내는 실험도 벌여 마법 관련 범죄를 책임지는 이단심판관들의 눈에 띈다.
추파카브라는 불법 강령술로 체포되어 비밀리에 정부조직에 숨어있는 변형주의자들을 색출하는 이중 스파이 역할을 한다. 강령술 최고 경지에 오른 추파카브라에게 접근한 변형주의자 측이나 강령술 비법을 마뷸러스 해체 양식 창조에 이바지한 그를 이용하기만 한 마뷸러스 관계자들 어느 쪽에서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추파카브라는 목숨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비밀 수첩을 만든다. 이 비밀 수첩의 존재가 새어나가면서 와전되어 마뷸러스 해체 양식의 비밀을 전해주는 비법서로 퍼진다.
세간에는 마뷸러스 해체 양식의 비법서를 찾아 돈을 벌겠다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 중에는 호문쿨루스라는 인공종족 제조업체에 의해 제작된 인공거미 책벌레도 포함된다. 책벌레는 호문쿨루스 주식회사가 파산하면서 주문인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먹고살기 위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이 팍팍해지자 마도사의 심부름 용병단원이던 고양이엄니와 힘을 합쳐 그 비법서를 찾아다닌다.
그 여정에서 신체 매매의 대상이 될 뻔하면서까지 위기를 넘나들던 책벌레와 고양이엄니는 마뷸러스 가문 후계자이자 총책임자로 알려진 교수의 조교라고 허풍을 친 예티 연금술사, 아아디야가를 속여 진짜 마뷸러스 교수의 명령 전달 역할을 하는 뱀파이어 조교를 알아낸다.
셋은 그가 남긴 단서를 따라 추파카브라를 뒤쫓다가 그가 드나드는 검부리구 행정사무소에서 신체 암거래를 신고하려다 책벌레가 만났던 개머리판을 재회한다. 뒷골목 신체 암거래 범죄를 조사하던 인간 경비소대장 개머리판은 범죄 현장 벽면에서 발견된 문양을 조사하다가 검부리구 행정사무소를 알게 되어 잠복하던 중 책벌레 일행을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도망치던 추파카브라는 골목에서 구울에게 살해당한다.
추파카브라의 시체에서 나온 수첩에는 호문쿨루스를 인수합병한 프롤레마이오스 기업의 음모와 관련해 마뷸러스 해체 양식의 내막과 비밀 노트를 작성한 이유를 적은 암호문이 발견된다. 추파카브라로 변신한 책벌레가 입수한 엽서를 통해 연극의 개봉 시기와 장소, 패스워드를 획득하고 그 비밀노트를 읽은 책벌레와 고양이엄니는 아아디야가와 개머리판을 따돌린다. 그리고 노트를 이용해 재계를 협박하겠다는 아이디어로 둘만 따로 추파카브라의 조교 행세를 해서 삼족오 극장에서 연행되는 연극을 관람하기에 이른다.
개머리판은 두 사람의 배신을 알고 아아디야가를 공범으로 체포한 후 트롤 경비대장에게 보고를 하는데 경비대장은 그를 이단심판관들에게 소개해서 마뷸러스의 진실을 폭로한다. 그 시간에 마뷸러스 변형주의자 측이 부리는 좀비가 유치장을 습격하여 아아디야가를 데려간다.
한편, 삼족오 극장에서 늑대인간들에게 변형주의자로 오인된 책벌레는 극장 지하에서 고문을 당한다. 변형주의자들의 명단이 적힌 수첩을 찾기 위해 극장에서 변형주의자들과 싸움이 붙은 삼족오 극장 경호부대인 프톨레마이오스 사 하청 용병단인 늑대인간들은 책벌레를 두고 도망친다.
개머리판은 모든 진실을 들었지만 정의보다 충성심과 승진의 보상에 기울어 변형주의자들이 가장 나쁘다고 결론내린다. 경비대원들과 이단심판관들은 변형주의자들을 잡기 위해 극장을 습격하고 그들을 삼족오 극장에서 구속한다. 그러나 변형주의자들은 그들의 우주관에 입각해 폭사를 감행하고 개머리판도 이에 휩쓸려 죽는다.
아아디야가는 이제껏 사기를 친 책벌레와 화해하지만 경비대를 통해 조교들을 검거하고 화형하기로 결정한 마뷸러스 관계자들에 의해 철창에 갇힌다. 책벌레는 탈출하여 일상으로 돌아간 중에 자신을 버리고 은신해버렸던 고양이엄니와 다시 마주치게 된다.
청부업자인 구울에게 추파카브라의 살인을 사주한 것은 변형주의자들이었고 추파카브라의 수첩은 고양이엄니가 가지고 있었으며 책벌레와 고양이엄니는 마뷸러스 해체 양식을 목격한 결과 지옥으로 갈 운명이었다.
개요를 정리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린 소설이 처음인 것을 솔직히 적겠다. 일부러 모두가 찾고 있는 추파카브라의 수첩 내용의 비밀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개요에서 밝히지 않았다. 맨마지막에 나오니 소설의 끝을 읽은 독자는 알 것이고 모르는 분은 직접 확인하실 기회를 남긴다.
소설을 몇 번씩 읽으면서 다시 느낀 게 이 소설은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비밀이 까고 까도 또 나온다. 그래서 그 비밀을 마침내 알게 되는 과정이 복잡한 미스터리 소설의 전개를 좇아가는 것 같은 인상이 깊다. 실제로도 미스터리들로 구축된 세계관이고 유쾌한 문체와 분위기가 일관되지만 내용 자체만 두고 보면 꽤 디스토피아적이다.
인공거미 같은 인공종족과 늑대인간, 뱀파이어, 구울, 사스콰치, 골렘, 미노타우르스, 인간, 마도사(마법사, 마술사, 연금술사) 등 판타지계 등장하는 온갖 전설과 허구의 종족들이 총 동원하지만 한데 어울려 무대를 형성하는 까마귀 시는 얼핏 보면 지금 현실 세상을 은유하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은 배제하고 작품에 드러난 표면에만 충실하고 싶다.
우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도시명, ‘마뷸러스 해체 양식’이라는 콘텐츠 명등이 재밌다. 스파이, 배신자, 사기꾼, 연쇄 범죄, 회사에 얽힌 음모, 도시 전체를 지배하는 정부와 정책이 선택한 악마와의 계약 등 온갖 부패가 넘치는 이 도시가 낳은 고도의 문화양식 역시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채무를 변제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다.
결국은 까마귀 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모두가 지옥행으로 운명지어져 있고 영혼이 없는 것들이나 영혼의 주체가 사라진 껍데기, 또는 마뷸러스라는 유령회사처럼 진짜 유령만 떠돌고 도시만 빚 없이 깔끔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해체’ 양식이란 말 자체에 이미 도시의 운명이 숨겨져 있다.
채무(자본)와 영혼(가치, 정신)을 바꾸는 중개자 역할에 소위 마도사, 강령술사 등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판타지 세계의 아이러니다. 마법, 연금술 등은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갈고 닦는 기술이 아닌가.
거기에 사이비인 영혼소환술자들이 끼어들었다고 해서 마도사와 사이비 간에 정의가 한쪽으로 기우는가. 사이비가 이미 가짜를 내포하는 단어니 마도사에게 정의의 저울을 조금 기울일 법도 하지만 작가는 개머리판을 통해 정의도, 맹목적인 충성심과 보상에 대한 기대로 흠집을 내서 가차없이 비판한다. 개머리판을 통해 보여지는 것은 둘 사이에 특별히 한쪽이 더 정의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판타지 세계는 판타지보다 현실을 재현한 것에 더 가깝게 느껴지지만 사견으로 일소하고자 한다.
주인공인 책벌레 즉 인공종족이 노예 상태에서 자유인으로 권리를 부여받는 과정이나 호문쿨루스가 소수의 지적 주체로 분류되어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거나 자발적인 권리 투쟁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그 자격을 인정받고 증명되어야(골렘은 자기 변호를 할 수 있어야만 시민권을 획득)한다는 대목은 눈길을 끈다.
캐릭터로 활용된 인간 외의 종족들에게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증명해야 주어지는 자유권이란 점이 상충되는 것 같아 또 다른 아이러니인가 갸웃거리게 된다. 이와 관련된 또다른 대목은 호문쿨루스가 적은 확률로 시민들과 준하는 똑똑한 지성체라서 강제 해산을 당했다는 부분이 반만 진실이라고 살짝 언급되어 있다. 이 부분은 마치 어떤 내용을 전개하려다 멈추고 거죽만 건드린 느낌이라 아쉽다. 다른 소설에서 본격적으로 진전된 세계관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투명벽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예전에 4차원에서 3차원을 바라보면 마치 영화에서 필름이 상영되는 걸 보는 것과 같다는 글을 읽은 것이 떠올라 좋았다. 순식간에 그 부분만으로도 SF로 전환되었다가 바뀌는 느낌이라서 신선했다.
‘마뷸러스 해체 양식’이 문화 콘텐츠의 이름이라는 점과 관련해서 어수선하고 긴 리뷰의 마지막을 정리하고자 한다.
문화 콘텐츠의 역할은 무엇인가? 비리와 음모를 가리기 위한 정부의 전술 무기인가, 아니면 스스로 영혼을 납세하기 위해 짜여진 덫인가, 이 소설에선 별 생각 없이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고 즐기며 열광하는 독자들에게 일종의 경각심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