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는 장아미 작가의 단편 〈꽃불〉의 상편과 하편을 완독 후 작성했습니다. (하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죄’를 지은 적이 있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고 답할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한 적이 없으며 설령 갖고 싶다 마음먹더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다. 누군가를 깊이 미워할 수는 있으나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그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을 단숨에 벌고 싶은 마음에 사기를 치지도 않았고, 하물며 무단횡단도 하지 않은 채 살아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죄’가 없다.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선에서.
그런 당신은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는가. 사회적 규범을 어기지 않았다면 그것을 느끼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지은 것처럼 행동하며 산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가 불필요한 순간에도 습관처럼 나오고, 정상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것에 나를 맞추어야 한다. 타인과 다름은 잘못이며, 정해진 인생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용서받지 못한다.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죄를 짓지 않았지만 죄를 양산하고 심지어 모두가 자기 감시를 습관화하고 있다. 온라인에 단편적으로 전시되는 타인의 최고의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어야만 한다는 압박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세상에는 죄가 차고 넘친다. 죄의 사전적 정의는 ‘양심이나 도리에서 벗어난 행위’이거나 ‘잘못이나 허물로 인하여 벌을 받을 만한 일’이지만, 지금 곳곳에 만연한 ‘죄’의 감정은 그것과 다르다. ‘착한 마음’이라는 잣대에서 진심으로 우러나는 ‘죄의식’과 작은 것에서 가책을 느끼는 선량함도 일동의 죄책감이지만, ‘죄’라는 말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광범위하게 남용된다. 생김새, 먹는 것, 눈치, 성적, 가치관, 규범, 때로는 입는 옷의 모양까지, 사람들은 남이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죄’를 규정한다. 타인의 외형, 의견, 삶의 방식과 그가 속한 사회적 위치는—종종 그것이 ‘기준 미달’로 여겨질 때 ‘죄’가 된다. 물론 그것은 잘잘못을 가릴 수 없는, 가려서는 안 되는 개인의 특성이다. 그러나 단지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적 전형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죄’를 받는 사람은 늘어가고 있다.
혹자는 과거와 지금의 죄책감이 다른 양산을 보인다고 말한다. 과거의 죄책감이 타인의 정죄와 판단으로 발생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그것으로 자신을 옭아맨다는 것이다. 이 말이 결과론적으로는 옳지만, 모든 죄책감의 시작은 ‘타인’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남’이 기대하는 어떤 이상을 충족할 의무가 있다는 듯, 끊임없이 올무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상’을 조금도 닮지 않아도 될 자유가 우리에게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만들어진 죄악’ 중 가장 보편적이고도 만연한 것은 외형의 다름이다. ‘개성’’은 수용하지만 ‘장애’에는 관용이 없는 이곳에서 남과 다르게 태어남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죄로 여겨진다. 남들보다 무언가 하나 덜 있거나 더 있는 사람들, 남들과 완전히 다르게 생긴 무언가 있는 사람들. 남들과 완전히 다른 경로로 생각하는 사람들.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적으로 죄인의 낙인을 받는다.
이는 조금도 죄가 아니다. 한 사람의 형용은 가치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특성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도 죄를 가진 사람이 태어난다. 모멸과 상처를 미래로 점지당한 아이들이 태중에서 빛으로.
나는 첫 숨을 쉬는 순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
장아미 작가의 소설 〈꽃불〉은 주인공 ‘희’도 그런 사람이다. 서술자는 등장에서부터 그가 ‘죄인’이었다고 말한다. 첫 숨을 쉬는 순간부터, 이 세상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희의 피부는 여러 번 벗겨졌다. 허물을 벗는 뱀처럼. 이제 와 희의 얼굴은 턱 아래에서부터 왼눈썹에 이르기까지 검붉은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얻은 흉터 같았다. 그 때문에 희의 왼눈은 늘 반쯤 감겨 있고 왼 이마 위로는 한 뼘 넘게 털이 자라지 않았다.”
큰 화상을 입은 듯 희의 얼굴은 허물이 벗겨져 있다. 회임한 여자들은 “제 자식이 저렇게 흉한 몰골로 태어나면 어쩌나 근심”하고 연거푸 눈을 씻는다. 희에게는 괴롭힘과 멸시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생의 전반에 죄가 깔린 시간을 보낸다. 탄생부터 모욕받는 이의 삶을 감히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희는 그 고통을 공감받지 못한 채, 오히려 마음까지 상처입으며 살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모든 슬픔의 근원인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희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악공이 나타난다. 희는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괴롭힘을 당하던 중이었다. 홀연히 나타난 악공은 희에게 폭력을 가하던 이들의 영혼을 집어먹는다. 작가는 이 악공의 신비함을 통해 희를 잠시 환상으로 불러낸다. 악공은 희가 태어난 수수께끼 같은 공간 ‘갓뫼’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 양, 그에게 관심을 보인다. 영혼을 맛보고 기이한 물건을 들고 다니는 악공이 희의 인생에 찾아온 이유는 그에게 변화를 주기 위함이었다. 둘은 우연히 만났지만, 그 한 번의 접촉이 희에게는 기이한 경험이 된다. 희는 악공이 내민 면경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진경’이라고 불리는 거울은 희의 얼굴을 비춘다. 그 안에서 희는 자신의 외모가 ‘수려함’을 발견한다. 악공은 희에게 그가 괴롭힘 당하는 이유는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다름은 어떤 ‘혐오’스러운 형상이 아닌 ‘수려함’이다. 악공은 희의 내면에 숨은 빛을 처음 밖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환상 속에서, 영혼을 먹는 악공의 입으로, 현실에 없는 메시지를 전한다. 희는 직관적이고 단편적인 외모로 인간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마주한다. 악공은 “인간의 눈으로 신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는 없는 법”이라며 희가 인간과는 다른 존재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희의 내면에 있던 아름다움은 단순히 인간적인 ‘수려함’이 아니라 초월적인 신으로서 발산하는 빛이었다. 악공은 희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그의 존재를 한 차원 높은 것으로 만든다.
신비감이 더해진 채로 길을 떠난 희가 다음으로 만난 건 악공과 달리 지극히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초면부터 “이제 보니 너 참 흉측하게 생겼다”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설화는 자못 희에게 친절한 듯보인다. 설화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희를 데려간다. 떠돌이 신세인 희를 거두어준 설화는 선한 인물로 보인다. 설화의 연인 홍이는 희를 못마땅해하며 “병신 새끼”라고 한다. 첫 등장으로만 보자면 설화와 홍이의 인물됨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어느 밤의 대화를 엿들으며 희는 설화와 홍이가 모두 같은 성정의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파악한다. 그리고 악공의 면경을 떠올린다. 그 면경에 반사되던 자신의 얼굴과 저들의 얼굴이 얼마나 다를까. 희는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외면이 아닌 내면에 집중하며 그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상기한다.
작당과 모의가 풍기는 불길함 안에서 희는 자신의 본질을 각성하기 직전까지 오고 그의 눈앞에는 다시금 환상이 펼쳐진다. 희가 본 두 번째 환상은 자신의 엄마다. 악공과 달리 희의 엄마는 꿈과 같은 분위기에서 등장한다. 희는 어머니에게 묻는다. “어머니, 저를 왜 낳으셨어요?” 짧은 평생에 걸쳐 그가 답을 찾지 못했던 하나의 질문에서 분노와 슬픔, 억울함과 외로움이 교차한다. 희의 엄마는 희를 자신이 ‘선택’했다고 말한다. 이 담담한 고백에는 희의 존재를 향한 어떤 단죄도, 동정도 없다. 희가 세상에 나온 건 자신이 했던 수많은 선택 중에 하나였다고, 그러나 그것이 가볍지 않았으며 많은 것을 감내하고 통과한 순간이었다고 말하며 희의 엄마는 그를 위로한다.
선화와 홍이처럼 지극히 날카로운 현실의 비수를 감내하며 희가 꾸는 꿈은 그 탈출구가 곧 ‘불’의 형상으로 화할 것임을 암시한다. 〈꽃불〉 상편의 분위기는 내내 음침하고 붉으며 불길하다. 마치 “이름으로만” 불려야 하는 희의 각성이 머지 않았다는 듯.
울음, 울음, 애도의 꽃불
〈꽃불〉 하편에서 희는 내면의 꽃불에 점점 가까워진다. 그는 살면서 가장 큰 신불을 마주하기 직전에 가장 큰 배신감을 맛본다. 공동체에서 자신을 챙겨주는 줄로만 알았던, 그리고 사랑의 감정을 품었던 설화가 작전 중 희를 배신하고 도망한 것이다. 희가 배신 당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분량에서 독자는 희가 살던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한 나라의 흥망을 가늠하는 것은 뭇백성의 삶이 얼마나 윤택한지, 그들이 얼마나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는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또다른 약자인 아이들을 사지로 내몰며 연명한다. 그들은 곳간을 털고 재산을 약탈하기 위해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 불길을 아이들의 손에 맡긴다. 이 나라에는 분명한 망조가 깃들었다.
설화는 계획대로 정해진 집에 방화하고 그 집에서 나가며 희를 버린다. “병신 주제에”라는 설화의 말에는 ‘병신’이 누군가를 좋아할 수 없고 누군가가 ‘병신’을 좋아할 수도 없다는 비웃음이 담겨 있다. 희는 곧 자신이 속했던 집단의 모두가 그날 아침부터, 어쩌면 그가 처음 그들에게 찾아갔을 때부터 이런 결말을 예상했으리라고 짐작한다. 한 개인을 향했던 배신의 감정은 이내 공동체로 확장된다. 세상에게 버림받았다는 상투적인 말이 이 순간 희에게는 가장 가슴아픈 말이었으리라. 그곳에서 잘해주던, 때로 희를 격려하던 아무개도, 심지어 사랑하던 설화도 근본적으로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생존 수단으로, 언젠가 목숨을 건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 자기 대신 조금 더 먼저 죽어줄 사람으로 희를 대하고 있었다.
다행히 희는 불꽃의 신이었기에 불길은 곧 희의 몸을 타고 꺼진다. 아니, 희의 몸 안에 오히려 작은 불씨고 깃든다. 곤히 잠든 희는 설화의 배신을 맛본 다음날 한 아낙을 만난다. 이 아낙은 희의 평생에 걸쳐 쌓인 모욕과 비난에 결정적인 불꽃을 당긴다. “저 몰골을 좀 보라지. 어휴, 끔찍하기도 해라”라는 아낙의 말은 소설의 초반과 중반에 등장한 폭력과 배신보다는 오히려 한참 혐오의 강도가 약하다. 아낙은 지나가듯 희에게 말했지만, 희에게는 그것이 참을 수 없는 인내의 한계를 흘러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이었다. 희의 작은 마음에는 이런 오욕의 말이 조금씩 모여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남이 보기에 별것 아닌 순간에, 그러나 희에게는 천불 같은 고통이었던 바로 그 날에 터져버린다. 그것은 “단 한 번도 쏟아낸 적 없는 분노이자 원망, 슬픔의 발현”이다.
끝까지 희를 “괴물”이라고 칭하는 아낙은 희의 입김 한번에 재가 된다. 희는 살인 후 환희를 느낀다. 그리고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불사르며 자신의 꽃불을 키워간다. 이 장면에서 희가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거두는 것이라 냉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희의 불꽃에 사그라든 그들은 정말 ‘무고’할까. 그들 중 몇은 희와 같은 사람을 모욕했을 것이며, 또다른 몇은 희와 같은 사람을 조롱하고, 이용하고, 배신하고, 경멸했다. 실상 희를 괴롭힌 수많은 이가 ‘불특정 다수’였다. 특정할 수 없는 이들의 입에서 혐오의 불꽃이 나와 희의 심장을 수없이 살랐다. 그 순간을 생각한다면 그처럼 냉소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희의 살인은 수천 번 죽었던 자신에 대한 복수이다. “나는 왕이야”, “나는 신이야”라고 되뇌이며 희는 살생한다.
여기서 신령한 악공이 다시 한번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식사인 영혼을 마련하기 위해 희의 살인을 부추긴다. 그는 단편적으로 희에게 나쁜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희의 본성 역시 고민한다. 그의 내면에는 더 많은 살인을 향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공은 희에게 악한 행동만을 제안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공은 ‘정말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희가 진정으로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우쳐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희의 발걸음을 옮긴다.
희는 진짜 자신이 죽여야만 했던 그들을 죽인다. 설화도, 홍이도, 그리고 그 집단에서 그를 배신했던 모든 사람들도. 악공은 희의 분노가 다했음을 감지하고 그의 불을 끄기 위해 더 큰 불을 만든다. 불은 자신이 태울 수 있는 것을 전부 집어먹었을 때 사그라든다. 희의 복수는 끝났고, 그의 영혼은 악공의 피리 안에서 조용히 잠들게 된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태우던 크고 뜨거운 불길이 잡혔다. 평화가 찾아왔다고 하기에는 세상에 너무 큰 상처를 남긴 채로.
마치며
타인에 대한 무지는 내가 그와 상관없다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희를 향한 세상은 오해투성이였다. 누구도 희를 이해하지 않았고 그의 삶을 이해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전락시켰다. 희는 그런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 채로,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도 모른 채로 짧은 시간을 살았다. 그리고 신으로서는, 자신의 본성으로서는 찰나를 살았다. 그러나 작은 마음이 감내하기에는 세상의 혐오가 너무 컸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너무도 망가져 있었다.
한 번 타올랐던 숯은 불꽃을 기억한다. 겹겹이 생긴 마음의 나이테 사이로 타인의 무수한 모욕이 자리잡았다. 그 모욕은 아이의 마음을 태우고 꼼꼼히 그을렸다. 그렇게 알맞은 정도의 숯이 되었을 때, 무심코 비수처럼 날아온 아낙의 말은 단단히 말린 심지에 당겨진 최초의 불과 같았을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태워진 숯은 이제 다른 불꽃을 기억하는 화신이 된다. 이 분노가 죄라면 차라리 세상을 살라버리겠다는 듯이.
모든 것이 타버린 세상에서는 어떤 존재도 죄가 되지 않는다. 희를 달래던 악공은 이를 잘 알았으리라. 그리하여 차라리 희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 태울 때까지 영혼을 집어먹고 있었으리라. 희는 물의 영혼이 된다. 상처만을 준 세상에서 작은 피리로 피신한 희에게 긴 밤을 채워준 꿈은 커다란 물이었다. 시원하고 부드럽게 희를 감싸는 물웅덩이가 한없이 썼던 그의 인생을 중화한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왕에게 “불의 의미”를 묻는다. 그러나 왕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삶’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한낱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고 판단”한 채 짧은 삶을 살다 죽는다. 그러니 거대한 화마의 뜻을 알아챌 수 있을까.
소설 〈꽃불〉은 이 작은 인간의 시야를 넓혀 화마의 시작점을 말해준다. 신의 관점에서 불꽃의 가장 작은 씨앗을 보여준다. 불이 가장 처음, 미미한 것을 집어먹으며 커질 때에는 물 한 바가지면 그것을 끌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태울 정도로 커진 불은 그것이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먹어야만 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알 수 없는 신불 역시 작은 물주머니 하나면 꺼질 수 있었다. 새까맣게 탄 숯불에 누군가 차가운 물을 부으며 위로했다면 이 불은 누구의 목숨도 빠앗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정죄도, 죄악도 없이 또다른 평화를 맞이했을 것이다.
오늘도 삶의 곳곳에서 불씨에 심장을 내맡기는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들은 모두 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언제든지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신은 불꽃을 태우지만 사람들은 소리를 지른다. 가슴을 치고 거리로 나온다. 그들이 무서워 보이고 불쾌할 수 있지만, 그들은 단지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뿐이다. 우리의 불편함만으로 그들의 고통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을 태우고만 싶은 마음으로, 고통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전에. 그렇게 무고한 심장이 화마에 휩싸이기 전에, 우리는 그 불을 충분히 끌 수 있다. 창고를 뒤져 물이 새지 않는 튼튼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자. 그리고 커다란 바다 깊은 곳에서 가장 시원한 물을 퍼내자. 곧, 당신의 곁으로 어떤 상처의 불꽃이 지나갈 것이다. 그에게 단 한 번의 진심을 주자. 어떤 모욕도 없이 깨끗하고 시원한 마음을 신중하게 골라내기만 하면 된다. 상처입은 숯이 연기를 내며 조금 타오르겠지만, 그 열기만 참아내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이마저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가 태운 공평한 잿더미의 나라를 볼 것이다. 태곳적부터 잔뜩 달구어진 꽃불의 신에게 진심으로 시원한 마음을 건네자. 그의 명을 받아 타오를 하나의 불꽃이 온 세상을 태우기 전에.
그러므로 “후세에 거듭 망국의 기로에 섰을 때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이 기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