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품을 평가한다든가, 작가에게 이러쿵저러쿵 조언 해드리는 짓은 할 수 없다. 솔직히 그럴 수 있는 분들이 부럽기도 하다. 나는…. 저 따위가 감히요?
나는 나 혼자 쓰고 읽는 것이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입장은 아니다. 그런 입장으로 글을 쓰며 행복해 하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부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의 마음에 도달하고 싶어서 글을 쓰고, 내가 느꼈던 행복감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하지만 그게 늘 안 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글 쓰신 분과 동등한 입장에서 리뷰글을 쓸 수 없다.
또한 나는 글쓰기 동료가 없다. 내가 글을 쓸 때 어딘가 삐끗하는 부분이 있고, 그 삐끗한 지점에서 독자들이 “에이 글이 엉터리다. 그만 봐야겠다” 하며 떨어져나가리란 건 알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왜 문제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나는 내 글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다른 분 글에서 뭔가 배워보려는 의도로 리뷰글을 쓰는데, 그렇다보니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미리 양해하고자 긴 서론을 풀었다.
(이건 앞서 쓴 두 편의 리뷰글에서도 했던 소리다.)
리뷰 공모를 하셨는데 일기장 한 페이지 북 뜯어 놓은 것 같은 글을 받아보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근래 내가 가장 의아하게 여기는 건 캐릭터다.
나는 내 캐릭터들을 좋아한다. 나름대로 매력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매력이란 건 내 뇌내망상일 뿐이고,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문제점은 나도 충분히 자가진단 할 수 있다.
캐릭터의 매력을 전달하는 방법은 클리셰를 이용하거나 작품 내에서 서술해내거나 두 가지가 있을 텐데, 나는 둘 중 어느 하나도 다 못 하는 것 같다.
보자마자 한 눈에 딱 드라마가 연상되는 인물관계도를 이용하는 수도 있겠다. 트위터 존잘러들이 흔히 업로드해주시는 소위 “연성”이란 것이 이런 기법을 많이 활용하는 것 같다.
혹은 인기 있는 캐릭터 요소(이걸 모에요소라고 해도 되려나)를 활용하면 그 즉시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와 기대감이 높아지게 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번 리뷰글에서 다루기도 했었다.
캐릭터의 매력을 작품 내에서 서술하는 요령이란, 빌드업이라고도 불리는 서사쌓기를 해 내는 것이다. 나는 빌드업 쪽을 선호하지만 클리셰활용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게 없으면 시동 걸기가 어렵지 않나 싶고,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빌드업도 어렵지 않을까 한다.
나는 클리셰 이용도 빌드업도 둘 다 잘 못 한다. 요컨대 내 문제는 인물의 캐릭터요소나 관계 요소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시동」도 걸지 못하면서, 시동이 걸리지 않은 상황에서 쌓는 빌드업도 신통치가 않다는 것 아닐까.
문제는, 「어째서」 신통치 않은지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른 작품들을 보고 뭔가 연구해보려고 겸사겸사 리뷰글도 써보려고 하지만, 늘 벽에 부딪친다. 지난번에 썼던 리뷰글에서도 넌지시 밝힌 바가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다들 좋아하는 캐릭터에게 감흥을 못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다. 다들 좋아하시는 캐릭터의 활약을 보면서도 이 캐릭터가 왜 좋지? 왜 이런 게 매력 있다는 거지? 다음에 이 캐릭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하나도 안 궁금하고 하나도 안 기대되는데? 하고 의아해한다.
캐릭터가 사랑 받는 이유를 몰라 갸웃거리며 한 줄 한 줄 작품을 읽어 나가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캐릭터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이 캐릭터와 비교해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이 정도 캐릭터가 사랑 받았다면 내 캐릭터가 기회를 얻지 못한 건 조금, 불공평하지 않나? 약간 억울한 기분이 들고는 한다.
그치만… 다른 사람들은 다들 매력 느끼는 캐릭터들이란 말이지? 그리고 내 캐릭터는 다들 재미없어하신단 말이지? 다른 독자들이 느끼는 매력을 나 혼자서만 느끼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내 문제점, 내 병증을 지적하는 현상이지 않을까? 다들 내 캐릭터에서 매력을 못 느끼는데, 나 혼자 내 캐릭터를 좋다고 하는 건 얼빠진 착각 속에 살고 있다는 뜻이지 않나?
그렇다보니 근래 들어서는 늘 이 퀴즈를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애써보려는 중이었다. 대부분 실패했다.
이번 작품도 무엇보다 캐릭터의 매력이라는 측면에 무게를 두고 읽어보게 되었다. 글의 어느 지점에서 캐릭터의 매력이 느껴질까? 요즘 소설 추세라고 하면 딱 봤을 때 팟 하고 느낌이 와야 승부가 될 것 같아서, 딱 봤을 때 팟! 하는 게 있을까? 가 나의 관찰 포인트였다.
역시, 잘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본작의 피리악공 같은 캐릭터….
불쌍한 주인공을 괴롭히는 무뢰배가 나타난다. 누가 보더라도 짜증나는 악당들로, 주인공을 괴롭혀 주인공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이입하게 하는 것이 작중 역할일 것 같다. 그리고 처단 당할 것이 예고되어있다. 이후 이야기 진행이나 새로 등장할 캐릭터 어필에 따라, 이 악인들이 어떻게 처단되는지가 결정될 터이다.
본작의 무뢰배의 경우, 뒤이어 등장할 피리악공의 어필을 위해 등장한다. 당연한 수순으로 피리악공에게 처단당하는데, 그 양상이 초현실적인 호러풍이며, 피리악공의 초월자적 어쩌구를 형성해준다.
이렇게 어필되는 피리악공은…
“하여간~ 없다니까” “어라? 하기야~ 옳거니. 참으로 귀여운 아이로구나. 그래 그래.”
식으로 고풍스럽게 술 취한 말투를 쓰는 유려한 캐릭터다. 이런 캐릭터를 많이들 좋아하시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네 목을 비틀어 억지로…” 같은 잔혹한 말도 쓰는 무서움도 갖추고 있으면 더 좋아하시는 것일까? “하지만 널 단죄하고 싶지는 않구나”식의 오만한 자비심을 베풀면 더 좋아하시는 것일까?
그리고 국왕이 등장한다. 옷차림을 이상하게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 그런데 행색이 이상한 것 치고는 꽤나 정석적인 왕 캐릭터였다. 부부관계도 아주 건강?하고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이번 이야기의 교훈…까지 멋들어지게 늘어놓는 국왕전하이시다. 캐릭터가 멋진 말을 해야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는 것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아마 피리 악공은 캐릭터 유형을 활용하는 케이스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저 피리 악공이 내 취향과 안 맞을 뿐이려나? 사실 나는 압도적인 강자 캐릭터(거기에 아름다움까지 겸비한)를 거북해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 그런… 압도적인 상대 앞에 주눅들고 알아서 져주는 것이 내 인생 패턴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단지 내 취향문제에 불과할까? 그런데 이런 캐릭터가 보통 인기있고 사랑받지 않나? 그럼 이런 캐릭터를 불호하는 것이 내게 불리한 점이지 않을까? 작가로서의 결함일까?
그럴지도. 인기 아이템을 거부하는 짓일 테니.
국왕은 캐릭터 유형이란 측면으로 재단하기는 좀 어려운 것 같다. 순전히 작품 말미에 멋있는 마무리멘트를 하는 역할을 할 뿐인 캐릭터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마무리 대목에서 휙 등장하면 너무 뜬금없으니 미리부터 나왔던 것일까? 그리고 기왕 미리 나오는 김에 나름의 캐릭터 어필을 해서 이야기에 기여하도록 했던 것일까?
캐릭터가 내게 매력 어필을 해냈는지는 둘째치고,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문장이 매우 유려하다는 점이다. 패턴 비슷한 문장만 남발하는 내 솜씨와 비교되어서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문장의 아름다움이 없었다면, 국왕(이야기상의 역할은 마무리멘트를 하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이 일찌감치 등장한 효과도 약화됐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국왕이 일찌감치 등장한 효과」가 뭐였나고?
문장과 관련하여 눈길이 갔던 건 관능묘사였는데, 이 관능묘사는 국왕과 왕비의 행위로 처음 등장한다. 국왕이 꽤나 정석적인 왕 캐릭터인 걸 감안하면 방탕한 듯한 묘사가 특이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글을 다 읽고 나서 돌이켜보면 국왕이란 캐릭터를 종잡을 수 없게 하고, 여기서 몽환적인 느낌도 일어나는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글을 읽어나가는 시점에서는, 굳이? 뭐하러? 이것은 꼭 필요한 베드씬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 일단 무척이나 탐미적이었기 때문에 꼼꼼한 감상을 유도하는 힘을 발휘하는 건 틀림없었다. 작품의 몽환성을 높여주니 불필요한 베드씬이라고 비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리하여, 내가 파악한 바 국왕이 일찍부터 등장한 효과는 「꼼꼼한 감상을 유도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관능묘사가 이야기에 기여했던 대목은 역시 설화와 홍이의 정사에서였다. 어린 연인의 격정과 방탕함에는 묘한 문학적 효과가 발휘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특히 프랑스 만화 『쌍브르』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최근 들어서는 여기에 조금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다.
몇몇 작품들에서 부정적인 인상을 받은 경험(강력한 문학적 효과에 편하게 기대려는 게으른 작법으로 느껴졌다)도 있었고, 나도 어린 연인의 방탕함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써먹어보려던 적이 있었는데, 「헛폼만 잡았다는 실망감」만 느낀 일이 있어서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다시 또 생각을 고치게 되었다. 역시, 어린 연인의 격정과 방탕함에는 묘한 문학적 효과가 있는 게 맞다. 더구나 옆에 방청객(=희)이 있는데 잉챠잉챠하는 그 야생적 풍경이라니. 관능을 더 짙고 어둡고 동물적으로 꾸려주는 상황설정이다. 더구나 초라하게 내팽개쳐진 희의 심리에도 한 걸음 더 이입해 들어가게 된다.
무뢰배들에게 괴롭힘당하고(주인공을 불쌍하게 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작법으로 인식되어 널리 활용된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불쌍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피리 악공의 거울에 얼굴을 비춰볼 때 까지만 해도 난 희에게 시큰둥했다. 하지만 없는 존재처럼 취급되고 부끄러움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상황설정이 제시되고 나니, 희의 병폐적 짝사랑과 비틀린 성장과정이 내게도 어필되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이야기 전개는 하편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작품은 일종의 빌런탄생기였다. 희가 불귀신이 되어서 선악 구분 없이 사람들을 불태우고, 이윽고 홍이를 불살라버리는 대목에서는 내 안의 인셀남이 환호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 점에서 “네가 나을 게 뭔대?”하고 대드는 설화를, 희가 쿨하게 불사르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던 점은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설화 같은 캐릭터가 싫지는 않지만, 그와는 별개로 설화가 희에게 대들 자격은 없으니까.
작가님은 희가 완전히 악인이 되진 않길 바라셨을까? 하지만 이미 무고한 민간인들을 불사른 주제에, 설화에게만 약해지는 희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희를 움찔하게 한 설화의 발언이, 내게는 너무 적반하장으로 느껴진 탓이다.
물론 이후 전개에서 희는 자기 행태에 회의감을 느끼고 사태를 중단시키려고 해야, 피리 악공이 나와 초월자적 면모도 보이고, 희는 희 나름대로 신화적인 자기소멸을 행할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게 설화의 적반하장 발언으로 촉발되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차라리 설화를 향한 비틀린 애정이 희의 폭주를 막았거나 하는 편이 내 취향에는 더 좋았을 것 같다. 물론 비틀린 애정이 발동하는 건 설화를 불태우고 나서도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에는 “내 안의 무언가”가 환호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야 캐릭터의 매력이 생성되는 것이려나 싶다. 그게 내 경우는 하필 인셀놈이었다만… 그래도 때로는 내면의 음습한 놈이 고개를 들게 하고, 그것 때문에 독자가 혼란스러워지게 하는 것도 소설의 힘일 테니까.
나는 내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내가 창조한 캐릭터에게 환호한다. 그런데 내 안의 「누가」 환호했을까? 사실 내 안의 청중 중에, 다른 누구에게도 없는 독특하고 창의적인 유형은 없을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화마로 변한 희에게 환호한 인셀남은 다른 누군가에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 작품의 내 캐릭터에게 환호하는 청중도 마찬가지이다. 이 청중은 다른 독자들에게도, 어느 누군가에게나 있을 터다.
이 청중을 “A”라고 하자. 내 캐릭터는 내 안의 A들을 환호케 한다. 하지만 다른 독자의 A에게는 도달하지 못한다.
A는 누구일까? A는 왜 내 캐릭터에게 환호할까? 이런 것들을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독자의 A들에게도 내 캐릭터를 어필할 수 있도록, A청중 공략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