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는 재로도, 먼지는 먼지로도 될 수 없기에 공모(감상)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달나라에 꽃비가 내리던 날 (출간 계약에 의해 비공개 전환됨) (작가: 사피엔스, 작품정보)
리뷰어: NahrDijla, 22년 6월, 조회 51

※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피엔스 작가님의 <달나라에 꽃비가 내리던 날>은 디스토피아, 그 중에서도 에코 – 디스토피아 장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러프하게 살펴보자면 디스토피아의 시발점인 유토피아라는 SF의 하위 장르는 일종의 완전 세계를 목표로 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하며 이상적인 세상입니다. 하지만 작품의 역사적으로 그 특징으로 말미암아 정적인 세계를 지닌다는 비판을 받았죠.

에코토피아는 지구의 문제를 인식하여 이를 바탕으로 세워진 유토피아 작품 군입니다.이 하위 장르의 특징은 성장을 부정하는 것 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유토피아라는 이상 세계를 토대로 환경 친화적인 정책을 통해 발전된 사회를 그려냅니다.

디스토피아는 이런 유토피아의 반대되는 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가 현재의 사회, 정치, 경제 문제들이 해결되었거나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효율적인 기제들을 가지고 있다면, 디스토피아는 이런 문제들이 심화되어 잘못되어버린 사회를 묘사합니다.

소설의 세계에서 에코 – 디스토피아의 징후는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전통적인 농사 방법으로는 정상적으로 작물을 키울 수 없는 지구의 환경, 두 번째는 달의 개척이나 유로파의 개척, 그리고 레지드론의 인공지능 ‘트래픽’의 학습 단계에 운영 등에, 마치 소비재처럼 사용되는 소외자들의 존재와 이로 인해 부각되는 계급 간의 격차, 세 번째는 (아마도) 왕판 건설이나 황라 농영등 거대 기업체에 팔려나간 땅을 통하여 종속된 듯 보이는 빈부격차의 심화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직, 간접적으로 드러나며 우리의 인식을 재고케 합니다.

<달나라에 꽃비가 내리던 날>의 매력임과 동시에 디스토피아적 문맥은, 이러한 문제점들이 우리의 현실이 갖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인지적 소외((cognitive estrangement)로써 작동하여 세태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해 줍니다.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상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의 가족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막대한 상속세를 내야 하기에, 집을 팔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집의 가치는 높았기에 많은 사람들, 특히 건설업체인 왕판 건설이 노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야생초가 가득 피어있던 집에 추억이 있던 가족들은 이를 건설업체에 팔고 싶지 않습니다. 집을 허물고 건물을 새로 지어 올려 추억이 사라질 판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상속세를 낼 능력은 없기에 집은 팔아야 해서 사람을 구합니다. 한 명은 풀씨 알레르기가 있는 노인이었고, 한 사람은 마치 집과 야생초 밭을 잘 지켜줄 부부였습니다. 가족은 고심 끝에 부부에게 시세보다 싼 값에 팔게 됩니다. 그러나 부부는 왕판건설이 집을 사들이기 위해 연기한 배우들이었고, 이내 집은 허물어지게 됩니다.

작 중의 핵심적인 노붐(Novum)은 레지드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레지드론은 작 중 현실의 아이러니의 집합체이기도 합니다. 집값이 너무 올라 집을 구할 수 없어 일종의 대용 집으로 이용된다는 점. 그리고 주인공의 어린 시절 이용 경험들은 ‘트래픽’의 베타테스터처럼 이용되어, 추후 이주해올 ‘돈 있는 사람’들의 쾌적한 이용의 토대가 되어 준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이는 자본에 의해 소외되고 타자화 된 사람들을 조명합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터전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터전의 상실은 대물림되어 자손에게로 이어집니다. 부를 대물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막대한 상속세는 살 곳을 찾아 어쩔 수 없이 레지드론을 살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집은 대개 정착의 의미를 지닙니다. 한 곳에 고정되어 삶을 영위한다는 점은 그런 의미를 지닙니다. <달나라에 꽃비가 내리던 날>은 여기에 더해 야생초라는 존재를 통하여 환경적인 의미와 추억의 의미를 더합니다. 그 것은 사람다운 삶의 최소한의 무언가 입니다. 인간은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노인 강수호는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발 디디고 살아야지, 민들레씨도 아니고.

그런 점에서 레지드론의 부유는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 하는 사람들을 비춰 보입니다. 물론 럭셔리 등급의 레지드론은 인간다운 삶의 한 편을 보여주겠지만, 소외된 자를 위한 레지드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방도 화장실도 없어, 음식을 시켜먹어야하며, 샤워는 변기에 부착된 세면대에 물을 받아 간단히 해결해야 하고, 그들의 삶은 럭셔리 등급의 삶을 위해 선행적으로 이용될 뿐이니까요. 이 사람들은 지구에서 태어났으나 땅에 발 디딛지 못해 달로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부평초처럼 흔들리며 떠내려 오는 삶은 인간답기를 꿈꿀 뿐입니다.

 

자연이 살아있는 공간은 할머니의 집은 인간다운 삶의 최후의 보루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생초들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에게 그리 주목 받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 쓰임새가 없다면서요. 그러나 할머니의 집에서 야생초들은, 고들빼기김치, 민들레 잎 샐러드, 제비꽃 화전 등 사람에게 소박하지만 소중한 존재로 격상됩니다. 특히 자연이 메마른 달의  공간에서 이곳에선 자연이 존재하고, 추억이 존재합니다. 이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을 물 한잔만 받았다는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단 뜻은, 결말에 이르러 야생초 화원이 27루나라는 적지 않은 돈을 받는 다는 점에서 대조 됩니다. 장례식 날, 주인공의 아이들이 티 없이 뛰놀던 자연은 더 이상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주인공이 묻었다는 타임캡슐은 소중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이곳을 투영합니다. 할머니의 집에 묻어둔 타임캡슐은 끝내 회수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사람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추억조차 희미해져 버린 것은 거대 자본에 짓밟힌 뒤입니다. 아마도 그 후로도 주인공은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중하게 생각한 무언가가 무너진 이후의 삶을 상상해본다면 어떨까요. 소설은 인간다움의 상실과 자본에 천천히 침식해가는 현실을 다룹니다. 혹은 이미 자본에 침식당한 삶을 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의 유해를 마당에 뿌렸으나 그 곳은 더 이상 닿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재는 재로도, 먼지는 먼지로도 될 수 없는 곳. 사피엔스님의 <달나라에 꽃비가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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