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는 모두에게 영웅이 될 기회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평범한 회사원이 초능력을 얻거나 보통의 대학생이 사람을 살리는 등의 스토리텔링을 읽다 보면 ‘혹시 나도?’라는 생각에 괜히 손을 쥐었다 펴게 된다. 처음에 이 평범한 사람들은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변신을 했다. 그래도 ‘능력’을 쓰는 순간에는 멋있어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구한다. 그들은 변신하지 않으며, 여전히 보통의 사람이지만, 어찌됐건 지구를 구한다.
김청귤 작가의 〈살기 좋은 도시, 이츠 대전〉 속 ‘대전’이라는 공간은 언뜻 보기에 사소하다. 우리나라의 허리에 위치하는 보통의 도시, 아니 보통은 아닌 도시. 중심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빵집을 품고 있는 ‘잇츠 대전’은 ‘eats 대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음식이 유명하다. 하지만 대전이 아무리 유명하다고 한들 서울만큼 일상적일까.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라는 점은 미뤄두고서라도, 모든 미디어에 가장 자주 노출되는 도시다. 주요 방송국과 롯데월드, 남산타워. 홍대, 강남역 등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은 대부분 서울에 있다. 그러나, 정말 서울이 그렇게 중요한 도시일까. 또는 그렇게 대단한 도시일까.
생각보다 서울을 모르는 사람은 많다. 우리나라에는 서울을 완전히 아는 사람보다 겉으로만 아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이런 상황을 단순히 ‘아 그렇구나’라고 받아들이지 말고 조금 더 생각해보자. 우리가 은연중에 쓰는 말들에는 ‘서울중심적’인 사고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의도 면적의 몇 배’처럼 단위뿐 아니라 일상적인 용어에도 서울은 숨어 있다. 하지만 ‘서울’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에게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 서울을 몰라도 불편한 것은 없다. 물론 수도로서의 서울이 위태로워진다면 나라가 함께 흔들리겠지만, 일상의 영역에서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는 개인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서울을 남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서울중심적인 생각이 재생산되고 있는 지금, 세상의 멸망을 가장하며 ‘포브스 선정 가장 안전한 도시’ 1위로 ‘대전’을 꼽은 작가가 있다. 아니, 가장 안전해야 하는 도시는 ‘서울’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 당신. 서울은 너무나 위험한 곳이다. 끝없이 사람을 토해내는 지하철역과 큼지막한 건물, 넘쳐나는 자동차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을 지켜줄 먹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음식이 세상을 구할 뻔한 이야기
김청귤 작가의 단편 〈살기 좋은 도시, 이츠 대전〉은 이경희 작가의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을 인용하며 시작된다.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과 배경을 공유하는 일명 ‘조상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김청귤 작가가 선택한 장소는 대전이다. 작가는 이미 땅에 묻힌 조상들이 좀비가 되어 되살아난 시대(그렇다 그건 진정 아포칼립스다)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 대전에는 조상 좀비가 접근하지 못한다는 새로운 설정을 추가한다. 의외로 대전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든 건 대단한 안전망이나 견고한 장벽이 아니다. 단지 “성심당의 튀김소보루와 두부와 칼국수”다.
사람도 생명체도 아닌 음식들 때문에 좀비가 몰려오지 못했다는 말은 이 소설의 어디에도 쓰이지 않았지만, “돈이 없어도 물자가 넘쳐나 언제든지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있는” 대전은 풍족한 도시다. 풍족하기 때문에 그들은 ‘좀상님’의 등장에 아랑곳않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 추측컨데, 이런 풍족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재가 ‘음식’ 아니겠는가. “맛있는 건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니까”. 대전에는 튀김소보루 말고도 맛있는 음식이 많다. 작가는 마치 대전의 가이드가 된 것처럼 그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소설 초반에 묘사한다. 조상 좀비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심당이 보우하신 것이다. 그러나 성심당 빵을 사기 위해 기차에서 쏟아져 나온 외지인들 사이로 ‘현지인’이자 주인공인 소영이 옮기는 발걸음은 사뭇 다르다. 소영은 ‘포장마차’로 향해 ‘할머니’가 말아주는 국수를 먹는다. 겉으로 주목받는 성심당과 그 가게의 메뉴들을 지나쳐 현지인이 고른 것은 소박한 국수 한 그릇이다. 소영은 대전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인 것처럼 여기며 소보로빵을 껴안은 사람들과 조금은 다르다. 소영의 몸은 뻣뻣이 굳어 있고 어딘가 다친 모양이다.
소영은 현지인으로서 진정한 대전을 가장 잘 말해줄 수 있는 인물이다. 작가는 성심당을 향해 달려가는 외지인들과 그들이 느끼는 안도감, 그리고 소영의 사소하고 일상적인, 조금은 어색한 움직임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과연 대전이 살기 좋은 도시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차에서 익명의 사람이 외친 “대전은 무사해요!”가 공허하고 갑작스럽게 들리는 것도, 성심당 빵집 봉투를 하나씩 들고 대전역을 나가는 외지인들의 움직임이 기계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은 대전이 살기 좋다는 구호가 단지 ‘잇츠 대전!’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소설의 끝까지 읽으면 김청귤 작가가 단순히 대전을 안전한 도시로 표현하기 위해 이 소설에 끌고 오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소설의 중반부까지 일 년여의 시간을 보내며 소영은 자신이 왜 대전에 있지 않았는지, 왜 본가를 떠나 있었는지를 절감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랬습니다
“소영아 빨래해놔” “여보 밥 줘” “소영아 동생 밥차려줘” “엄마 나 물” “여자애 방이 이게 뭐야” “어휴, 저걸 누가 데려가나” “살림 좀 배워” “누나 나 라면” “여보 술안주좀 해줘” “소영아 그만 먹어라” “밥을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지”라고 소영에게 날아드는 잔소리와 텍스트로 읽기만 해도 피로해지는 요구사항은 ‘살기 좋은 도시’ 대전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뒤바꾼다. 이런 소음은 소영 개인보다는 ‘여성’이라는 특정 성별을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룡점정으로 “아이고 우리 아들, 사과 깎아줄까?”라는 대사를 넣음으로써 작가는 소영뿐 아니라 독자의 분노도 자극한다. “집구석에 사지 멀쩡한 사람이 네 명이나 있는데 일하는 사람은 둘 뿐이다”. 차라리 좀상님이 낫겠다 싶겠다는 소영의 탄식은 사람이 좀비보다 더하다는 인식마저 드러낸다.
하지만 이런 탄식이 터져나오는 곳이 비단 대전뿐이랴. 여성을 향한 ‘빨래’, ‘밥’, ‘살림’, ‘설거지’의 요구와 ‘여보’, ‘누나’, ‘엄마’로서의 책임, ‘여자애’로서의 정상성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도처에 깔려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게다가 소영이 사람보다 낫겠다고 생각하는 ‘좀상님’들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좀상님’의 유교적 업적이 궁금하다면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을 읽어 보라) 소영의 집안에서 축적되는 피곤은 ‘댓 댓 유교걸’이 K-유교를 견디는 현실을 실황중계하듯 비춘다. ‘살기 좋은 도시, 잇츠 대전’이라는 구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효녀” 소영은 집에서 뛰쳐나온다.
“사람이 없을 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소영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을 원했다. 그래서 ‘살기 좋은 도시’를 선택했고 그곳에서 따뜻한 국수를 먹었다. 하지만 소영이 안전지대라고 생각했던 대전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았다. 조상님보다 더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영은 사람에서 도망치기 위해 일어난 순간까지도 아빠의 밥을 차리고 “살 빼려면 운동해야지”라는 헛소리를 소화하느라 기력을 쓴다. 가까스로 집에서 나온 소영이 택한 곳은 대전 유교의 중심, 뿌리공원이다.
어쩜 이렇게 남근적인 공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성씨별 조형물’이라는 이름만 해도 괴이하다. 뿌리공원 홈페이지에서 이것저것 발췌한 작가의 노고에 감동하여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더욱 가관이다. 물론 선대의 사람을 공경하고 그들의 인생을 존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어찌 문중별로 상징물을 나누어 숭배할 생각을 했단 말인가. 조형물의 모습은 위로 쭉 뻗은 것이 남성 권력의 상징물 같다. 우리나라의 ‘뿌리’는 예로부터 여성을 도구화하며 다듬어졌으니 그렇게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족보에는 여성이 오를 수 없었고, 지금도 자손이 여성의 성을 따르는 것에 사회적 시선이 곱지는 않다. ‘효’라는 말은 적당한 선을 넘어 여전히 누군가를 착취하는 방향으로 변형되었고, 그것은 대체로 여성 노동력을 동원하는 쪽이었다.
이런 K-유교의 상징물이 한데 모여 있는 뿌리공원에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하다. 소영은 ‘사람이 없는 곳’을 적절히 골랐지만 대전에서 사느라 좀상님이 창궐하는 시대라는 것을 잠시 잊은 것 같다. 중얼중얼 남자를 욕하는 소영에게 조상님의 영혼들이 떼로 몰려온다. (당연히 그들은 전부 남성이다) 소영은 자신의 울분을 토해내듯 그들에게 절규한다. “소추소추” “섹스섹스” “제사 좆까”라는 반유교적인 말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조상들은 말세를 외치며 혼란스러워한다. 결국 우주가 도와주고 나서야 뿌리공원은 잠잠해진다.
소영의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자극적인 말에는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감정이 모두 담겨 있다. 단순히 전위적인 우스갯소리로 결말을 넘기기에는 그 비명이 꽤 통쾌하다. 21세기에는 비행자동차로 출퇴근하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알약을 먹을 줄 알았는데, 겨우 제사상을 차리지 않겠다고 절규하는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으며 개운해하는 상황이 비통하기도 하다. 조상님이 땅에서 기어나와 무섭게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살기 좋은 도시’로 도망쳤더니 그곳에는 조상보다 더한 인간들이 있고, 집에서 도망쳤더니 유교의 정수를 먹고 자란 진짜 조상들을 만났다. 어쩌면 ‘K’가 붙어 우리나라를 상징해야 마땅한 건 ‘POP’이 아니라 ‘유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나라에 ‘불효’의 안전지대란 없다.
김청귤 작가는 ‘효’가 최근 획득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작품 안에 잘 녹였다. 누군가를 갉아먹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문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져야만 한다. 우리나라의 ‘충’과 ‘효’는 남을 공경하고 존중하는 문화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면서부터 크게 변질되었다. 지금 한국의 ‘효’는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남아야 할 알맹이는 사라지고 관습과 규율이 빽빽히 얽힌 껍질만 남은 상태다. 그 껍질을 효로 착각한 사람들이 이제껏 ‘효’를 숭배하고 있다. 그들은 무엇이 효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노동력을 낭비하는 ‘제사’라는 풍습을 겉보기에만 성대하게 치르고, 그 안에 진짜 남아야 하는 마음을 읽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보며 낙담하기만 하는 것이 옳을까. 우리의 상한 마음을 애써 일시적인 통쾌함으로 시원하게 하기 위해 작가는 이 소설을 썼을까.
그러니 조금 더, 유토피아
〈살기 좋은 도시, 이츠 대전〉은 분명히 아포칼립스이며 디스토피아인 동시에 재앙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대전이라는 지명을 들어 K-유교의 현실을 여실히 비판하는 데에 그쳤다면, 독자들에게 다층적인 메시지를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헤맨 소영이 조상에게 비명을 지르며 끝나는 소설의 결말을 찬찬히 곱씹다 보면 ‘그래도 여기는 살만 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소설 속 세계보다 여기가 좋다는 안일함이 아니다.
분명히 지금도 남성중심주의를 비롯한 악습이 있다. 과거에는 그것이 훨씬 심하게 사회적인 관습으로 녹아 있었다. (이 관습이라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지!) 그러나 그 안에서 뒤틀린 ‘뿌리’에 저항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는 세대의 움직임이 있었다. 유교와 남성을 숭배하던 조상들이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며 세대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선대로부터 이어지던 악습은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동시에 조금씩 끊어지고 있다. 당연히 우리 세대에도, 미래에 분명히 사라질 악습이 존재한다. ‘좀상님’들이 무덤을 열고 다시 기어나오지 않는 이상, 세상은 조금씩 바뀐다.
청귤 작가의 소설이 재앙처럼 보이는 것이 다행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 잠든 조상들이 걸어다니던 과거와 분명 다른 세상에 산다. 여전히 여자와 어린아이, 동물을 차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개선된 점 또한 존재한다. ‘고작’ 이런 세상에 만족하기에는 김이 빠지고 답답하다. 그러나 답답함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이 바뀌어야 할지 우리가 분명히 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뿌리가 더는 필요없는, 그러나 존중과 배려는 남아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소영의 절규를 그치게 할 것이기도 하다.
서울보다 안전할 줄 알았던 대전, 그러나 어디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 놓인 소영은 좀상님이 기어나오지 않은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감사하게도 그 시대에 살고 있다. 겨우 지켜낸 이 작은 유토피아의 퇴보를 막기 위해, 좀상님이 부활해도 끄떡없을 안전한 세계를 위해. 진짜 살기 좋은 ‘잇츠 어스(Earth)’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소영의,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뭉쳐 있는 작은 응어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우리는 작은 무덤을 파고 있는 힘껏 그 낡은 관습을 묻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기어나오지 못하도록 밀봉해야 한다.
설령 다음 세대의 누군가가 그것을 끄집어내 재난과 멸망을 상상하더라도, 현실의 우리는 안전할 수 있도록. 그 안에서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쉬도록. 우리의 세상이 안전하도록.
지금은 작은 것이 우주를 구하는 세상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