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일부 들어 있습니다.
‘도서관’이라는 단어에는 뭔가 신비로운 매력이 있다. 신비로움이라는 정서는 대개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낯설고 새로운 사물,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바라볼 때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이니, 책을 멀리하고 도서관을 멀리해 온 우리네 일상을 반성해 볼 일이기는 하지만, 도서관이라는 낱말이 그런 묘한 매력을 지니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도서관은 인류 지성이 발달해 온 시간과 더불어 매우 오랜 역사를 지녔다. 고대 도서관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립이 기원전 3세기에 이뤄졌다고 하니, 책을 집필하고 수집하고 보관하는 인간의 습성이 그로부터 2300년이나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습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책을 모아 보관하는 인간의 행동에는 해당 종이 지니는 고유한 본능과도 같은 측면이 존재하고, 이는 개구리가 겨울잠을 자는 것이나 다람쥐가 먹이를 모아 보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특히 다 먹지도 못할 먹이를 볼주머니 한 가득 채워 넣다가 집에 게워내고 또 새로운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먹이 그릇 주위를 배회하는 햄스터의 모습은 인간과 정말 유사하다. 이때 인간이 눈에 불을 켜고 받아먹으려는 것이 배를 채워줄 양식이 아닌 마음의 양식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햄스터보다 고상해 보일 수 있겠으나 햄스터만큼 귀엽지는 않은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책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인간의 행위를 습성으로 간주하려는 이유가 또 있다. 말 그대로 그것은 정말 습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기념할 만한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안전하게 보관해 두려는 습관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죽어서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무덤에다 온갖 부장품을 함께 묻는다(내가 알기로 이 분야 탑 of 탑은 진시황이다). 현대에 들어서 인간의 생활 양식은 말도 못 하게 바뀌었고, 무언가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습성 역시 디지털 문명에 걸맞게 변모했다. 그대들 스마트폰 용량에 차고 넘치도록 쌓여 있는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들, 언제 다시 볼지 몰라도 일단 누르고 보는 즐겨찾기 목록과 스크랩북, 삭제했다가 괜히 나중에 큰일날 것 같아서 꾸역꾸역 모아두는 최종파일, 최최종파일, 지인짜최최최종파일…… 등등.
그런데 놀라운 일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일단 버리기 아쉬워서 모아두기 시작한 것을 내가 죽고 몇 년 뒤, 몇 십 년 뒤, 몇 백 년 뒤에 다른 누군가가 찾아 보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모아두었던 것들을 그들이 찾아 보고는 뭔가 더 새로운 발상을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더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현생 인류가 지금에 이르게 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단순한 토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우리도 지각하지 못하던,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본능이 꿈틀대고 있는 장소이며, (다소 비약이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우리가 도서관이라는 단어 앞에서나마 잊고 지내던 종의 본능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게 될 때, 몸과 마음에 두근거림과 설렘이라는 반응이 일어나고 그것을 우리는 ‘신비로움’이라고 읽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 여기까지 리뷰와는 다소 무관한 데다 사족만 긴 장광설이었다.
그럼 이제 각설하고 어디서 본 것이 분명하지만 그 구성 및 전개 방식과 변주는 흥미로웠던 작품, 위래 작가의 「죽이는 것이 더 낫다」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작가는 SCP의 스토리텔링을 오마주하고 있는데, 보고서 형태의 구성 방식, 무언가 초자연적인 현상 혹은 사물의 존재, 그리고 그것을 관리감독하는 어떤 기관이라는 설정이 그러하다. 다른 원형이 존재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떠올린 것은 SCP-1074, 일명 ‘스탕달의 악몽’이라고도 불리는 오브젝트였다. 나는 이것을 유튜브를 통해 단편영화로 재구성된 영상으로 처음 접했는데, 어떠한 사물(SCP-1074는 그림)을 단순히 일별하는 것만으로 인간이 정신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는 설정이 「죽이는 것이 더 낫다」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SCP-1074의 원천 텍스트일 것임이 분명한 스토리텔링은 이탈리아 영화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의 『스탕달 신드롬』이며, 이는 1989년 출간된 이탈리아 정신의학자 ‘그라지엘라 마르게니’의 동명의 저서를 원작으로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천에는 프랑스 작가 스탕달과 1817년 이태리의 어느 교회에서 그가 겪은 경험이 존재한다. 요는 이렇다. 어떤 예술 작품을 보고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극도의 흥분 상태를 넘어 졸도하거나 호흡 곤란을 일으킬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인간의 한 정서적 체험을 기록한 텍스트를 기반으로 인간 심리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시도가 이뤄졌는데, 그것이 곧 공포 영화와 괴담 등 호러 장르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고? 보기만 했는데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그림이라니 너무 무섭잖아!
그렇다면 우리가 보기만 해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그림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티븐 킹은 『죽음의 무도』에서 “좋은 공포 이야기는 상징적인 수준에서 작용하면서, 허구의 사건들(때로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이용해 우리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린 진정한 두려움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이야기”라고 말한 바 있다.
스탕달 증후군은 실제 존재하는 심리 현상으로서 연구되고 발표되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어떤 미스터리와 호러의 소재로 차용되는 기저에는 인간의 마음에 작용할 수 있는 무엇으로부터 내가 또는 우리가 받게 되는 영향력을 통제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자리해 있다. 즉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온전히 나만의 자유로운 사고에 의한 결과인가? 아니면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어떤 외재하는 존재로부터 받은 영향력에 의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소설 「죽이는 것이 더 낫다」에서 뉴욕 윌스트리트 시청 앞 공원의 어느 벤치에서 발견된 의문의 책은 잠깐 읽기만 하는 것으로 독자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광기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처음에 그 책의 위험성을 지각한 사람들은 그 책 자체에 사람을 광기로 물들이는 어떤 메커니즘이 숨겨져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가령 사람을 최면 상태에 빠뜨리는 특정한 코드나 문양의 나열이라든지, 혹은 신비주의에 입각한 마술적인 주문이 새겨져 있다든지, 저주가 내려졌다든지 하는 식으로. 하지만 위래 작가가 시도하는 오마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주는 바로 책이 지닌 ‘신비’의 정체에서 드러난다.
“그 책(그리고 그 텍스트)은 신비가 아니었다. 신비는 바로 그 책에 담긴 사상이었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스탕달 신드롬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는 공포의 한 갈래와 그 기원을 거리낌 없이 있는 그대로, 문자 그대로 ‘까발리고’ 있다. 우리는 책 읽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왜? 그것이 나를 어디로 어떻게 데려갈지 모르니까!
그 책에 담긴 사상은 단 몇 줄만으로 사람을 홀려서 어떻게든 살해에 가담하지 않으면 사족을 못 쓰는, 정말이지 몹쓸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사상의 전파력이란 도저히 무시 못 할 것이어서, 처음엔 단 한 권의 책으로 일개 도시에 내보여졌던 사상이 삽시간에 복제와 번역, 연설과 방송 등으로 확산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사상은 전파된다. 성경이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 구텐베르크가 일으킨 인쇄술의 혁신이 기여한 공이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또한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 ‘세계사’라는 이름의 교과서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두려움은 책과 비슷한 유형의 기능을 하는 모든 매체에 대한 두려움을 수반한다. 즉, TV는 바보상자일 뿐이고, 뉴스는 옐로저널과 유언비어만을 퍼트리는 사회적 종양이고, 게임은 사이코패스나 폐인을 낳는 마약과 같다는 믿음을 양산하는 두려움인 것이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 지금 보고 있는 영화, 지금 듣고 있는 음악 등이 나를 현재의 나로서는 상상하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의 또 다른 ‘나’로 바꿔 놓을지 모른다는 상상은 그 즉시 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꺼 버리고 저만치 던져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섬뜩하다.
한편 인간이 지닌 ‘책 읽기’에 대한 두려움, 매체의 영향력에 잠식당하는 데 대한 공포를 상징화한 책이 뉴욕 한복판에 나타났는데, 정작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젖히고 인류를 절멸의 위기로 몰아 넣는 일에는 다시 한 번 ‘정부’가 있는 힘껏 발 벗고 나서게 된다는 전개는 고전적인 클리셰로서 편집증적 음모론을 상기시킨다. 무슨 일만 생기면 “이게 다 정부 탓이다”를 시전하는 것은 비단 한국인만의 ‘종특’은 아닐 것이다. 음모론은 사실상 정부가 있는 나라라면 어디에든 존재한다. 편집증이 자기 수준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을 말 그대로 ‘편집’을 통해(때로는 망상까지 동원해서),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면, 정부에 대한 음모론의 발생은 정부가 그만큼 대중 앞에 ‘비밀스러움’을 고집하는 탓이며, 비밀은 필연적으로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야기하는 탓이다. 음모론은 불가해한 세상 일을 보다 손쉽게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지만,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음모론을 채택하는 데는 다소 주의가 필요하지 싶다. 이야기가 너무 쉬워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매체가 지니는 가공할 만한 파급력과 정부의 무능력,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3단 콤보로 독자를 밀쳐 나락으로 떨어뜨린 뒤에, 작가는 마치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뒤늦게 ‘로프’의 존재를 귀띔해 준다. 무기력한 절망감에 빠진 인류에게 기사회생의 기회를 제공하는 동아줄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의 기관이다. ‘SCP재단’과 정확히 동일한 역할을 하는 듯 보이는 이 기관은 ‘수서관’이라 불리는 요원들을 파견해 특정한 책을 수색 및 확보, 처리하는 행태를 보인다. 바벨의 도서관은 의문의 책 말고도 인류에 위협이 되거나 신비하다는 등의 이유로 특수하게 다뤄야 하는 책이 더 존재한다는 작중 세계관을 암시하는 동시에, 인류에게 여전히 불가해한 공포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다는 고무적인 메시지를 암시한다.
자, 그래서 다시 도서관이다. 그것은 인류가 절멸의 위기에 맞서기 위한 유일한 무기인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은 일찌기 보르헤스가 고안해 낸 놀라운 상상의 산물로서, 무수히 많은 책이 꽂혀 있는,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바벨의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들에는 현존하는 언어로 구성할 수 있는 모든 문장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것은 언어만 다를 뿐 동일한 문장의 무수한 반복일 수도 있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감탄사나 부사 등 문장 성분의 나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분명 유의미한 문장이 존재하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죽을 때까지 샅샅이 책을 뒤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도서관이라는 존재가 인류 최후의 무기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적어 넣는 한 단어, 한 문장, 한데 모아 보관하고 있는 기록과 생각들이 밑거름이 되어 언제가 될지 모르는 위대한 발견의 날을 조금씩이나마 가까워 오게 하리라는 믿음. 그것이 바로 역사 이래 인류가 공포에 맞서 온 방법이고, 종의 보전에 이바지해 온 본능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도서관’이라는 단어에는 뭔가 신비로운 매력이 있다.
이상, 우리가 그토록 책을 읽지 않는 데도 나름의 변명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러준 소설, 위래 작가의 「죽이는 것이 더 낫다」 리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