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를 무척 좋아합니다. 전쟁터는 곧 최첨단 과학의 실험실입니다.(외골격, 기억 이식, 웜홀 등) 그리고 폭력의 현장에서 꽃 피는 인간애는 언제나 좋은 영감을 줍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재미있는 스페이스오페라는 대체로 미국산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만큼 미국인들이 우주에 대한 관심이 많기 때문이죠.
한국에서 글을 쓰는 건 장르를 불문하고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SF는 특히 그렇습니다. 추리, 로맨스에 비해 저변이 너무 부족하거든요. 어쩔 때는 써야 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느낌마저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과학은 너무 단편적이고 획일적이어서 상상력을 발휘하기 힘들죠. 연구의 폭이 매우 좁다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입니다.(한국은 너무 작은 나라입니다.) 알파고 쇼크 이후로 굉장히 많은 실험실에서 ‘인공지능’이라는 제목을 붙인 프로젝트를 내놨습니다. 그래야만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영향력은 과학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기계의 인간화, 인간의 기계화, 기계 윤리 등 AI에 대한 이슈가 널리 퍼지죠. (참고로, 제1회 한국과학문학상 응모자의 절반 이상이 AI 소재로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2010년대에 알파고가 있었다면, 2000년대에는 황우석이 있었습니다. 지금 기억하기로도 당시에 수많은 복제인간 소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배아복제에 대한 윤리적 이슈가 사회 전체를 휩쓸었죠. 그런데 <아마존 몰리>는 십 년이 지나서 다시 황우석을 불러 들였습니다. 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가는 ‘도시 괴담’의 형식을 통해 재치있게 황우석을 따돌리고 있습니다.
‘상상력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슈에 매몰되지 않고, 작가 마음 속에서 자연스레 들려오는 목소리를 발화하려면 숙성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마존 몰리>는 언뜻 실험 윤리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추리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SF의 조건을 완벽하게 성취했습니다. 단성 생식이라는 과학적 요소가 사건과 긴밀하게 호흡하고 있죠.
당시에도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과학적 지식을 통해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있어도, 과학적 태도까지 견지하기는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과학적 태도’라는 것은 ‘거리두기’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과학지 기자인 화자는 주인공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주인공의 말을 반쯤은 믿어주고, 반쯤은 보류해 두죠. 작품의 마지막까지 이러한 태도는 유지됩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은 결론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그건 과학자의 태도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황우석의 논문에 이의를 제기한 행위는 소위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습니다. 그만큼 연구윤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굉장히 희박했습니다. 결국 황우석을 비난하는 여론이 득세하긴 했습니다만, 팩트가 증명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왜 밥상을 걷어차느냐고 고발자를 욕했습니다.
이제는 황우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됐습니다. 게다가 복제인간이 아닌, 무려 ‘단성 생식’이라는 기발한 소재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연구 기반도 부족하고, SF 작품도 부족한 한국 땅에서 이만한 성취를 이뤄내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좁디 좁은 땅에서 겨우 가능성을 찾아낸 것이죠. 황우석 이후 10년, 작가가 그 세월을 온전히 체득한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