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의 기록자들> 리뷰. 스포없음. 공모(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공모채택

대상작품: 자취의 기록자들 (작가: 창궁, 작품정보)
리뷰어: 낮은말을낳아, 1월 25일, 조회 41

<자취의 기록자들>은 죽은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의 유지를 잇기 위해 모험하게 되는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직중 세계관에서 ‘기록’은 인물들의 정신의 근간이 되는 요소입니다. 그들은 기록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소망을 전하고 타인과의 유대를 쌓아가죠. 할아버지가 봤다고 한 ‘최초의 섬’, 그리고 ‘궁극의 기록책’을 찾아, 믿음을 간직한 소녀는 길을 떠납니다. 자취을 남기면서 말이죠.

자취의 기록자는 단 하나의 외국어나 외래어도 쓰이지 않은 소설입니다. ‘자취’, ‘기록’ 같은 한자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인물이나 지명은 많은 곳에서 순우리말을 가져다 썼습니다. 필자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철학자 다석 유영모 선생이 노자의 <도덕경>을 오로지 순우리말로 번역하여 <늙은이>라는 명저를 만들어낸 것처럼, ‘한국형 판타지’라는 수식이 부끄럽지 않은 작품입니다.

만연체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작가가 워낙 간결체 위주로 다작을 하는 사람인지라 퍽 익숙해보이지는 않습니다. 간결체 작가의 자취가 이따금, 그리고 다발적으로 출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경써서 집필한게 보이는, 수려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작품의 동화적인 분위기를 더욱 감칠맛 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죠.

소설의 분위기로 말하자면 상술했던 것처럼 ‘동화적’입니다. 그림 형제의 동화나 안데르센의 동화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는 직접 확인해보셔도 좋습니다. 반반일 수도 있겠네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러모로 충격을 받아 폰을 던지고 싶었던 대목이 몇어개 있었습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하렘이라는 태그에도 속지 마십쇼. 각설하고, 어쨋든 감동을 주는 작품입니다. 예.

“희망은 기다리는 것이고, 기다리면서 바라는 것이고, 기다리고 바라면서 언제든 절망을 마주할 준비를 하는 가냘픈 믿음이다. 희망은 저버리는 것이고, 거는 것이며, 놓는 것이고, 기대는 것이니, 희망은 본질적으로 불안 할 수밖에없고, 희망한다는 것은 불안해한다는 것이었다. 소망 역시 희망과 비슷하게도, 저버리지만 걸진 않고, 놓을 수 있지만 기대진 않는다. 소망은 절망에 맞서는 억센 믿음으로서 꺾일지언정 불안해하지 않는다. 소망은 이뤄내는 것이고, 이뤄 내면서 믿는 것이고, 이뤄내고 믿으면서 절망에 부딪히는 것이다. 희망은 절망과 어깨를 나란히하지만, 소망은 늘 절망과 싸우고, 절망은 희망의 숨통을 쥘 순 있어도 소망을 흔들진 못한다.이 서로 닮은 듯 다른 두 믿음은 기록장이들의 섬세한 손길 아래 구별되어 한 소녀의 마음에 내재 돼 있었다.”

필자는 위 구절이 본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부제가 <소망과 유대의 기록>인 것도 같은 맥락이죠. 소녀가 가지고 있던 마음은 할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는 두루뭉술한 희망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를 재회하면서 소망을 전승받게 되었고, 모험을 통해 이 소망은 다시 자신의 소망으로 발전됩니다.

글-기록이라는 것은 결국 남에게 드러내기 위해 쓰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필연적으로 읽어줄 타인을 요하게 됩니다. 적어도 일기장을 제외하면 그렇습니다. 그 사이에서 사람 간의 유대가 피어나고 소망은 생명을 이어나갑니다. 다만 이 소망은 타의에 의해 짊어지는 짐같은 것이 아닌,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소망일 것입니다.

기록은 과거를 전하기에 유대가 되고, 미래에 전하기에 소망이 됩니다. 진실된 기록을 믿음으로써 소망과 유대의 기록은 완성됩니다. 많이 뜬금없지만, 말그대로 감상문이니까, 역사학도를 지망했던 저로서는 정말 뜻깊은 작품이었습니다. 역사도 결국 기록이고, 후대가 읽어 도움이 되길 바라는 소망을 통해 우리는 옛 사학자들에게 유대를 느끼지요. 투키디데스, 헤로도토스, 이븐 할둔, 특히 사마천에게서요. 주인공의 일화가 전설로 남거나, 어딘가에 기록되어 남는 장면들을 보면 마치 역사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것 같아 기뻤습니다.

작가의 작품을 죽 읽어온지도 꽤 되었습니다만, 대부분의 작품이 읽는데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워낙 가독성에 신경을 많이 쓰는 작가이기도 하고, 기본기가 탄탄해서 옥의 티랄까 멈칫하게 되는 문장이 좀처럼 없습니다. 안 하던 장르에, 만연체, 무無외국어, 무無외래어까지. 작가 역량 모르모트 그 자체로 보였던 작품이었는데 정말 재밌었네요.

언제나 집필에 힘써주시는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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