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믿지 않는 시대의 좀비 공모(비평)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지속 가능한 죽음으로부터 (작가: 위래, 작품정보)
리뷰어: 오나선, 22년 1월, 조회 770

혁명을 믿지 않는 시대의 좀비

 

많은 경우 좀비는 노동자의 은유다. 좀비는 생각을 갖지 않고 육체를 움직인다. 좀비의 기원이 된 부두교에서 사제들은 시체를 부려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로 활용했다. 좀비를 무산계급 노동자로 해석하는 소설은 이미 여럿 나왔다. <지속 가능한 죽음으로부터>는 아예 좀비 노동에 기반을 두는 ‘Z테크’로 Z경제를 만들었다는 점이 색다르다. 작중 세계가 밀레니엄과 유사한 문명을 유지하려면 전기 등의 동력원이 필요한데, Z경제는 좀비의 노동력으로 발전소를 가동한다. 화력 발전처럼 환경 오염이 없으므로 지속 가능한 경제답게 과연 친환경적이다. 다만 효율이 나쁘다. 신축 저택에서 냉난방을 가동하려면 적어도 여섯 구의 좀비가 있어야 한다. 좀비가 부족하면 급하게 사람이라도 쳇바퀴를 돌려 동력을 생산해야 한다. 좀비가 없는 상태는 곧 가난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영혼을 뽑힌 이들을 사역하며 경제를 지탱한다. 비효율적이고 위태로운 돌려막기다.

‘여정’이 일하는 상조회사 ‘지속가능한죽음’은 좀비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죽은 사람을 안식으로 보내는 우리의 상조회사와 달리 이곳은 산 사람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보낸다. 지속가능한죽음이 자랑하는 특허 기술로 뇌를 뽑으면, 뇌는 의식을 유지하되 몸만 좀비가 되는 상태를 만들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죽음을 자발적으로 찾는 사람들은 생명을 팔아 지출을 없애고 생산에 복무한다. 뇌만 남는 고객들에게 회사는 메타버스 세계를 서비스한다. 회원들의 의식을 메타버스 세계의 요양원에 업로드하는 방식이다. 새로운 가상세계는 그들에게 안녕을 약속한다. 이곳은 점점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으로 발전할 것이다. 회사가 앞으로 충분한 부를 축적하기만 한다면, 아마도.

생명은 얼마짜리일까. 건강하고 힘센 사람은 노동 효율이 좋은 좀비가 되므로 시장가치가 높다. 그러니까, 좀 더 비싸게 팔린다. 우리 사회에서 생명권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가치여야 하지만, 현실에서도 무형의 가치가 환금 가능한 대상으로 재편되는 경우는 이미 허다하다. Z테크는 우리 사회에서 그리 멀지 않다. 권리나 가치와 같은 시장경제 바깥의 영역을 시장의 원리로 규율하고, 시장의 영토로 포섭하는 일은 신자유주의가 매우 잘하는 작업이다. 줄어드는 파이에서 자기 몫을 확보하지 못한 자는 시장 밖에 있던 가치라도 닥치는 대로 팔아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우리 세계에서 경제 성장이 둔화된 1970년대를 기점으로 표면에 드러났다. <지속 가능한 죽음으로부터>의 Z테크는 좀비로 인해 문명이 파괴되다시피 한 뒤에 등장했다. Z경제에서 살아있음은 재산이다. 재산은 사고 팔 수 있다. 생명까지 거래 대상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Z경제는 우리가 아는 신자유주의의 찬란한 미래다.

신-자유주의는 이름대로 개인의 자유를 약속한다. Z경제에 강제는 없다. 다만 이들이 보장하는 자유는 자본주의 경제와 관련된 경우로 한정된다. 사고, 파는, “자본가가 이윤 획득을 위하여 생산 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 사회 경제 체제”에 이바지해야 한다. 생명을 팔고자 하는 예비 좀비 노동자들은 영혼을 잃을 자유, 좀비가 될 자유, 동력원이 되어 죽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노동할 자유가 있다. Z경제의 구성원은 모두 자유로운 주체다. 따라서 자유롭게 자신을 착취한다. 이들은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한 방식으로 자유롭다. 어떤 자유가 더욱 자유로워질수록 다른 자유는 더욱 이운다. 착취는 아래로 흐른다. 작중 상대적으로 취약한 무연고자가 가족들(갑자기 무연고자를 입양한 가족들)에 의해 좀비가 되었듯이. 일자리를 알선해준다는 말에 넘어간 지원자가 강제로 좀비 바이러스를 주입당했듯이. 나아가 타인을 착취할 여유가 없는 사람은 결국 마음대로 희생할 수 있는 한 사람, 자기를 착취한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 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Burnout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자기 뇌를 스스로 바친 좀비들, 먹지도 죽지도 못한 채 열두 시간씩 쳇바퀴를 돌리는 시체들, Z경제의 톱니바퀴들은 활활 타오르다 못해 완전히 물화物化된 존재다. 거래 대상으로 대상화된다는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물화이고, 그리고 인격 없는 몸뚱어리가 된다는 SF적 의미에서 물화다. Z경제는 생명 자원을 불균등하게 분배하여 마지막 자본주의 문명에 빛을 선사한다. 구성원을 살라 만든 회광반조의 빛이다.

자원 없는 자유는 실제로는 부자유나 다름없다. 정확히는 그보다 나쁘다. 자유롭다는 착각을 이용해 탈취를 은폐하기 때문이다. Z경제는 가난이 희생자들의 머리를 후려치도록, 그래서 제 손으로 뇌를 토해내도록 유도한다. 지속가능한죽음 회사도 이 점에서 결백하지 못하다. 더군다나 자기 착취의 기회조차 아무나에게 제공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자유롭다는 착각도 얻지 못했다. 가짜 자유조차 불균등하게 편재된다. ‘좀비 없고 연고 없는 불우한 청년들’은 의사에 상관없이 자동으로 회사에 회원으로 가입된다. 가입 혜택은 뇌를 적출당해 좀비가 된다는 것.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을 입으면 뇌가 뽑힌다. 회복할 수 없는지 여부는 회사가 판정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탈취로 축적된 부는 상위 계급이 지위를 굳건히 하는 데 쓰인다. Z경제 사회에 찰랑거리는 좀비 노동력은 고요히 증발하여 천상계에 고인다. Z경제의 상층부에 위치하는 경제 엘리트는 좀비 암리타amrita를 마셔 불사의 권력을 획득한다. 지속가능한죽음의 백장호 대표는 좀비 생산으로 대박을 냈다. 그리고 국제적인 대기업 코튼베리에 회사를 매각해 (아마도 상당한 대금을 받으며) 이력을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여정은 회사가 국제 기업이 된 후에도 여전히 상조회사의 직원이다. 심지어 지부장으로 승진한다. 여정이 승진 축하 선물로 받는 생화는 그가 Z경제 윗층에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자원이 지독히 부족한 세상에서 살아있는 꽃은 부의 상징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자원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축하하기에 적절한 기념품이다.

그러나 현실에 노조가 있듯 Z경제에도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탈취에 저항하기 위한 대안은 연대와 혁명이다. 좀비를 노동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좀비해방전선을 이루었다. 쇠사슬을 끊는 자는 노동자 자신들이어야 하겠지만 좀비는 의식이 없으므로 저항할 수도 연대할 수도 없다. 좀비해방전선이나 좀비킬러는 그들을 대신해 싸운다. 작중에서 밝혀지듯 싸우기로 마음먹은 사람들과 좀비 단계를 눈앞에 둔 젊은이들, ‘좀비 없고 연고 없고 불우한 청년들’은 상당히 겹친다. 이들은 좀비 알바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그대로 고독사한 사람을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이들에게는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미래이므로. 여정과 함께 일하던 ‘보라’는 이런 좀비해방주의자의 일원이다. 보라의 어머니는 빚을 갚기 위해 자진해서 좀비가 되었다. 보라는 지속가능한죽음이 국제 기업으로 규모를 키우는 사태를 막기 위해 회사에서 사용하던 좀비를 해방시킨다. 이에 휘말린 여정은 “네가 풀어놓은 좀비 때문에 뜯어먹힐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보라에게 반박한다. 이를 재반박한다면, 폭력 시위는 폭력 진압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 저항은 폭력적으로 변한다. 다만 한쪽의 폭력은 은폐되고 다른 쪽의 폭력은 도마에 오를 뿐이다. 작중 보라가 풀어준 좀비들이 자기 뇌를 먹고 사망했을 때, 재판관은 풀려난 좀비들을 심판하지만 회사는 심판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판대에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먹은 기자들은 해당 사건을 자살이라고 축약한다. 코튼베리의 회장 호레이쇼 존슨은 이를 “새로운 시대를 위한 발전에서 필요불가결한 사건”이라고 평한다. 좀비를 해방하려는 사람들은 연일 시위를 이어가고, 경찰력은 시위대를 향해서만 발동된다. 좀비 산재 피해자들은 법을 통해 개인적으로 항의해야 정당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법의 언어는 이들의 편이 아니다.

연대는 두 명만 모여도 이룰 수 있다. 두 명은 손을 맞잡을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혼자서는 연대가 불가능하다. 두 명은 최소조건이다. 여정은 좀비 떼 사이에 고립된 상태에서 보라를 만났지만, 보라는 여정을 떠나고 여정은 보라를 버린다. 여정은 보라가 극단적이고 진지한 해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정이야말로 좀비 사태에서도 자신의 승진을 생각하며 착취가 지극히 정당화된다고 믿는, 극단적인 신자유/Z경제주의자다. 여정과 보라 둘이 이뤘을지도 모르는 연대는 신자유/Z경제에 패배한다. 기실 이 소설에서는 해방주의자들이 혁명하고 테러하는 이유가 제대로 다뤄지지도 않는다. 그들의 구호는 고의적으로 누락되어 있다. 이 소설은 균형이 기울어진 현장을 기울어진 서술로 묘사한다.

연대와 혁명을 추구하던 이들은 패배한 대가로 마지막 보루였던 뇌를 빼앗긴다. 폭력 진압으로 부상당하고 그대로 뇌를 적출당한다. 나아가 보라가 해방했던 좀비들의 뇌는 “자신들의 위장에서 발견”된다. 뇌를 먹은 좀비는 사망한다. 좀비들이 의식하진 않았겠지만, 이는 시체에 깃든 가짜 생명마저 포기하는 일이다. 파종하려고 보관해둔 씨앗을 먹어치우는 일이다. 가뭄에 배를 곯다 앞날을 포기한 이들이 그런 선택을 한다. 좀비도 배를 곯다 죽을 수가 있을까? 아니면 지옥의 아귀처럼 영원히 배고파하며 영원히 고통받을까. 어찌됐든 좀비화의 고통은 일방향이다. 사람은 죽거나 좀비가 되지만,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거나 좀비가 다시 사람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Z경제의 세상은 언젠가 반드시 좀비로 가득찰 것이 뻔하다. 생명 자원은 점점 희소해진다. 생명을 파종할 생명이 사라지고 있으니까. 이곳은 자기 발밑을 먹어치워 기반을 없애는 착취의 세계다. 멸망의 첫 번째 기수는 인플레이션이다. 좀비가 증가하며 좀비 노동의 가치는 감소했고, 메타버스로 옮겨간 회원들은 가상세계에서마저 아르바이트를 찾는 처지가 된다. 낙수효과는 없다. 희생자들은 다음 착취로 향한다.

이 글을 쓰려고 지속 가능한 죽음을 구글에 검색했더니 ‘에덴낙원메모리얼리조트’라는 장소가 나왔다. 나는 그 이름이 SF 단편소설 제목인 줄 알았다. 인구 포화 시대의 인공적 죽음을 다루는, 혹은 가상현실로 영혼을 업데이트하는 시대를 다룰 줄 알았다. 찾아보니 그냥 현실에 존재하는 건물 이름이었다.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새로운 리조트형 봉안당’이다. 봉안당은 시신을 화장한 뒤 유골을 안치하는 곳이다. 어떤 기사는 이곳을 “부활 소망하는 성도들을 위한 안식처”라고 불렀다. 애초에 상조회사부터가, 익숙해져서 잊고 있을 뿐, 죽음을 비즈니스로 삼는 곳이다. 죽은 자의 죽음을 거래하는 미래는 이렇게나 가까이 있다. 물론 우리 세상에 좀비는 없다. 좀비가 자기 뇌를 먹는 사건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뇌를 위장에서 발견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배고픈 사람은 뇌가 아니라 위장의 명령에 따른다. 린다 티라도가 쓴 [핸드 투 마우스]에는 ‘부자 나라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민 여성 생존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핸드 투 마우스는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넣는 빈곤한 사람의 모습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의 비루한 몸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먹을거리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다.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는 자에게 생명은 이처럼 비싸고 쓸모없다. 먹지도 죽지도 않는 좀비 노동자로 일하는 쪽이, 가짜 자유와 누추한 안녕을 맛보기라도 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혁명을 믿지 않는 시대에서는.

덧붙여, 작중 생략된 부분에 의문이 있다. 좀비 동력에는 생고기 등이 필수적인데 생고기를 생산하는 축산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사육된 가축 이외의 동물이 있을 리도 없다. 먹지도 않을 생물을 키울 여유가 없을 테니까. 좀비를 움직이려면 생고기 또는 칼로리가 필요한데, 좀비를 먹이는 영양분은 대체 어디서 올까? 축산업은 잘 되고 있을까? 본능적으로 영양분을 습격하는 좀비를 축산업에 활용하기는 힘들 텐데, 전부 사람의 손으로 처리하고 있을까? 고기는 어디서, 누구에게서 나올까? 지속가능한죽음은 어떻게 지속 가능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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