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의 모든 일이 비가역적이다.
상처는 낫는다. 그러나 시간이 필요하며 흉터가 남는다. 흉터를 없앨 수는 있지만, 그를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하다. ‘상처를 치유하는 동안의 나’는 ‘상처가 나기 전과의 나’와 다른 행동을 한다. ‘흉터가 남은 나’와 ‘흉터가 생기기 전의 나’는 다르다. 흉터를 없애기 위해 지불한 비용은 돌아오지 않는다. 거시적으로, 점근적으로 그 흔적이 사라질 수는 있겠으나 미시적으로는 비가역적인 셈이다.
그렇게 거의 모든 일이 비가역적이다. 좀비 바이러스 또한 그렇다. 이 경우엔 거시적으로도 비가역적이다. 한 번 감염된 사람은 돌아올 수 없다. 바이러스에 휩쓸린 세계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평형을 찾겠지만, 그것은 새로운 평형이다. 이전의 평형과는 다르다.
본 소설 <지속 가능한 죽음으로부터>에서 등장하는 “Z테크”는 새로운 변혁이자 평형이다. 이는 독자인 우리가 멀리서 보기에도 많은 분란을 일으킬 법하다. 사회의 동력원을 바꾸는 모든 혁명은 사람의 삶을 영구적으로 바꿨지만 이 Z테크는 더욱 특별하다. 우선 좀비라는 개념이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져있고, 그것이 생리적 혐오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기존 변혁과 다르다. 낯선 것이 아니라, 혐오스러운 것이다. 더해서, 모든 기술이 그렇지만, Z테크도 태생적 리스크를 안고 있다. 바로 좀비가 사람을 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위험은 도외시되곤 한다. 기존 문명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상황에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Z테크가 특별한 점은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좀비 바이러스가 사람의 많은 것을 비가역적으로 부숴놓지만, 운동성은 남겨둔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좀비가 되어도, 육체는 남는다. 혈육도 예외는 아니다. 좀비가 될 잠재성이 있는 모든 것들이 곧 자산이다. 그러나 가족조차 없는 이들은 어떻게 하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떠올린다. 사람은 빈손으로 나지만, 적어도 빈손은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
자기 자신의 육체를 재테크의, Z테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상조회사 ‘지속가능한죽음’은 스타트업으로, 회원들의 뇌를 적출하고 남은 육체를 좀비로 만들어 동력원으로써 대여한다(뇌가 없어도 좀비가 구동 가능하다는 것은 일단 수용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뇌는, 정신은 어디로 가는가? 메타버스로 간다. 이렇게 비가역성을 수용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것은 가상의 삶이다.
가상이란, 그것이 내포한 복잡성과 상관없이 전제가 어긋나면 곧바로 따라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들은 땅에 발을 디디고 있지 않다. 공중에 지어진 누각이 얼마나 아름답건, 그것은 여리다. 우리의 삶은 단단한 만큼 우리에게 실재하는 위협도 단단하다. 단단한 위협을 피해 사람은 여린 삶과 여린 고통의 세계로 간다. 그것은 보통 망상이라고 불린다. 좀비 바이러스와 메타버스가 그 망상을 실존하게끔 한다. 그러나 그런 망상의 실현은 비가역적이다.
이렇듯 삶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이 비가역적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은 살면서 자신이 수용할 비가역성을 선별한다. 가끔은 그 비가역성이 어떤 영향을 초래할지 알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자신이 알 거라고 생각했던 영향마저도 오판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비가역투성이의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일은 고개를 숙이는 일이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대로 순응해야만 한다. 비가역성을 제대로 선별해야 한다.
2.
본 소설의 주인공, ‘주여정’은 어떤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다. ‘지속가능한죽음’에 속한 그녀는 위험을 맞이했다. 야간 근무를 하던 도중 좀비가 풀려난 것이다. 그녀는 좀비를 피해 도망친다. 그러던 와중, 회사에 돌아다니는 좀비들이 여정의 회사, ‘지속가능한죽음’의 회원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의문이 이어진다. 대체 누가?
진상은 머지않아 드러난다. ‘연보라’. 여정의 부사수였던 사람이 저지른 짓이다. 보라에게는 그렇게 할 만한 사상과 행동력이 있었다. 사건은 벌어진 채다. 보라가 해방한 좀비들은 언젠가 그 육체에 담겨 있었던 뇌를 집어삼킬 예정이다. 여정은 안전하다. 그러나 위험이 가신 것은 아니다. 목숨의 위협이 실직의 위기로 치환되었을 뿐이다. 여정이 실직하게 된다면, “서로 다치고 병들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자신의 가족”에게로 가야만 한다. 여정은 주어진 재료를 파악하고 기지를 발휘해 문제를 봉합한다. 모든 일은 해프닝으로 마감되고, 여정은 고속승진을 하게 된다.
여정은 게임에서 승리한 것이다.
보라가 시작한 게임이었다. 여정은 휘말렸다. 보라는 판돈을 걸었고, 실패한다. 여정의 기지로 균열은 봉합되었고, 실재하는 위험은 추상적 문제로 화한다. 추상적인 건 잊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잊는다. 그리고 살아간다. 보다 커다란 게임의 승자가 정해지고, 승자는 권리(라고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행사한다. 세계는 보다 정적인 평형을 맞이한다. 흐름에 순응한 여정은 보상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게임이 단순히 놀이라는 뜻은 아니다. 규칙과 승리 조건과 자유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게임이다. 삶 또한 다르지 않다. 삶은 게임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삶을 부여받은 그 순간부터 게이머다. 세계는 게임판이고, 모두가 각자의 칩을 쥔 채로 무조건 게임에 참여해야만 한다.
게임에서 수를 무를 수는 없다. 게임의 단계 단계가 모두 비가역적이다. 당신의 선택은 영구히 족적을 남긴다. 그 선택을 잊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선택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계속 ‘폴드’만 외칠 수도 없다. 판에 앉아있는 한 참가비용을 지속적으로 지불해야 하고, 계속 죽기만 하다가는 언젠가 판돈을 다 소모할 것이다. 우리는 비가역성을 제대로 선별해야 한다. 단순히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흐름을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잃어가다 죽는다.
승리하지 못한 보라는 어떻게 되었나? 당연히 ‘다음 게임’을 시작했다. 그러나 판돈을 잃은 자는, 판돈을 딴 자에 비해 불리하다. 보라는 더 커다란 게임에서 다시 패배하게 된다. 그렇게 모든 판돈을 잃는다. 폭력 시위에 참가한 보라는 강제적으로 뇌를 적출당했다. 결말부에서 상조회사 레드캔의 이러한 행보는 다소 거칠게 느껴지지만, 상흔 이후의 세계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우리의 현실에도 폭력 진압이 존재하고 있으니.
3.
좀비를 다루는 많은 매체에서, 좀비는 인간에게서 운동성을 제외한 기능을 제거하고 조작된 일차원적 욕구를 부여하는 전염병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이 인간과 꽤 동떨어져 있음을 느낀다. 인간의 운동성은 인간과 불가분이지만, 그 자체로는 인간성을 내포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우리가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낯선 존재였던 좀비는 어느 새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그래서 어떤 창작자들은 좀비의 성질을 비틀기도 한다. 이미 좀비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친숙해진 탓이다.
조금 거리를 둔다면 어떨까? 좀비 자체가 아니라, 좀비로 인해 일어날 일들에 눈을 돌린다면 어떨까? 좀비는 개인에게 위협으로 작용하고, 진압되지 않은 좀비 사태는 사회도 위협할 것이다. 그 상황은 기대와 의문, 긴장의 연속이다. 우리는 그 상황에 놓인 인간을 본다.
여기에서 조금 더 거리를 둔다면? 좀비 사태가 남긴 상흔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지속 가능한 죽음으로부터>는 그런 케이스다. 좀비 이후의, 정확히는 Z테크 등장 이후의 세계를 서술하고 묘사한다. 이야기는 여정 개인이 처한 위험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그것에는 그다지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위협이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는 점과 위협의 해결이 다소 단속적이라는 점이 개인적으로 아쉽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세계의 가능성들은 지켜볼 만하다. 좀비를 동력원으로 하는 이러한 사회는 멀리서 보기에 좀비-펑크, 리빙데드-펑크 따위로 불려야겠지만,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에겐 그저 기술의 일환일 것이다. 이러한 Z테크 직후의 세계에서 그럴싸한 사업 하나가 제시되고, 그를 중점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회사의 이름은 ‘지속가능한죽음’이다. 본디 죽음이란 단발적이다. 단속적이다. 지속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은 좀비 바이러스라는 특이점과 좀비가 되지 않은 인간의 욕심이다. 좀비가 된 인간에게는 그런 욕심이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은 이미 그럴 능력을 거세당했으므로. 오직 산 자만이 해낼 수 있다. 특히 자신의 뇌를 적출하고 육체를 대여한다는 것은 산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어쩌면 굉장히 용기있는 선택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자발적인가? 더 좁은 세계의, 더 많은 규칙을 수용해야 하는 ‘미니게임’만을 반복하게 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 온전히 그들의 선택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그 미니게임은 미니게임을 플레이하는 자들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미니게임은 가상이다. 더 큰 범주의 게임에 속해 있을 뿐이다. 미니게임은 언제든지 폐지될 수 있다. 보라라는 개인의 간단한 시도만으로 모든 것이 무너질 뻔했던 것처럼. 물성을 한없이 저버릴 수는 없다.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만큼 연약하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보다 더 내어줬을 뿐이다. 희박한 약속 하나에 의지하여 사람들은 여린 미니게임에 천착한다.
이런 미니게임에 천착하게 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발생하게 되는 순간이 변혁의 때다. 변혁이란 게임의 규칙이 바뀌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변혁은 선별적이고, 변명을 필요로 한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어 제로섬이 아니라 플러스섬으로 바뀌었더라도, 생산되는 것 이상을 누군가가 가져간다면 다른 누군가는 손해볼 수밖에 없다. 바뀐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 혹은 규칙이 바뀌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소외된 자에게 선심 쓰듯 내줄 자비. 그것이 미니게임이다.
이러한 거대한 흐름에 누군가는 저항한다. 이상적인 규칙을 부르짖으며 현재의 규칙이 영속적이진 않다고, 우리는 이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 그러나 메인스트림 앞에서 개인은 하잘것없다. 보라의 비명은 공허한 전자적 출력일 뿐이다. 그 비명은 유의미하게 가 닿는 일 없고, 비명을 마주한 주인공에게도 떠올리지 않을 것에 불과하다. 판돈이 적은 자가 게임에서 온전히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게임을 지속하는 건 흐름에 거스르지 않는 이들이다.
소설을 읽은 뒤, 좀비 바이러스라는, 우리의 삶에서 멀리 떨어진 대상은 이렇게 유비로써 우리에게 정착한다. 그러나 그 낯섦은 사라지지 않는다. 거부감은 퇴색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연스레 수용해왔던 그 변혁들이, 좀비 바이러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은 당신이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고 있는가? 자신이 어떤 흐름에 속해 있는지 인식하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이 게임을 지속하고 싶다면, 고개를 들지 않도록 하라. 흐름에 거스르지 마라. 규칙에 순응하라. 누군가는 입을 잃은 채 비명을 지르고, 그 비명이 외면 받는 세상이니…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삶을 지속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