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에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일본 드라마 <트릭>을 본 사람이라면 서예가인 주인공 어머니가 자주 했던 이 말을 기억할 것이다. <서예의 비밀>은 말 그대로 글씨가 지닌 ‘신비한 힘’에 관한 이야기다.
명필로 소문난 유 대감은 슬하에 연년생 남매가 있다. 오빠 정이와 달리 여동생 연이는 서예에 관심이 많아서 나중에 아버지처럼 명필이 되는 것이 소원이다. 하지만 남녀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다고 믿는 아버지 유 대감은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업인 서예를 아들인 정이에게만 가르치고 딸인 연이에게는 가르치지 않는다. 아버지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있던 연이는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장소에서 이 집안의 남자들에게만 전수되는 특별한 힘의 정체를 알게 된다.
글씨로 무엇이든 살려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아버지와 우연히 아버지가 글씨로 호랑이를 살려내는 광경을 보고 자신도 글씨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딸. 그러나 딸에게는 자신의 힘을 물려줄 수 없다고 여기는 아버지와 딸이라도 능히 그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맞서는 딸의 이야기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여성 독자가 있을까. 그런데 알고보니 그 힘은 아버지만의 것이 아니었다. 집안 대대로 남자들에게만 전수되는 특별한 기술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진짜 비법은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특별한 재료였고, 심지어 그 재료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것이었다.
부재하는 어머니,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아버지, 유순한 성격의 오빠, 강인한 성격의 여동생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영화 <샹치>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능력과 어머니의 능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더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결말도 어쩐지 비슷하다.
분명한 차이는 <샹치>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직접 전수받은 아들의 이야기인 반면, <서예의 비밀>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직접 전수받지 못하고 몰래 독학해야 했던 딸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심지어 연이는 아버지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아버지가 못하는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라며 무시했을 게 분명한) 수예나 언문 등을 접목해 새로운 경지에 이른다. 여자도 남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줌과 동시에, 남자의 길만이 정도(正道)가 아님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만들어낸, 담 위로 뛰어오르는 호랑이를 보고 마음이 설렜던 소녀는 스스로 호랑이가 되어 담을 넘고 아버지도 넘는다.
무엇보다 나는 어머니 숙영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남편을 능가하는 재능을 지녔으나 여자라서 세상에 나올 수 없었던 실력자. 참다 못해 집을 나온 후에도 자식들이 걱정되어 자식들의 주변을 지킨 어머니. 이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지닌 숙영은 자아를 실현하고 싶은 욕구와 어머니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현대의 워킹맘들과 비슷하다. 그런 숙영이 집을 떠나있던 20년 동안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전보다도 단단한 사람이 되었는지 그 비밀을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