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장르를 명명하는 것부터가 스포일러가 되겠네요. 읽고나서 정말 충격을 받은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리뷰와 작품 중 읽는 데 우선순위를 두지 않지만, 이 작품 만큼은 작품을 읽고나서 리뷰를 읽으시길 권유드립니다. 저는 앞선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고 작품을 읽었는데, 소설까지 완독 후엔 리뷰를 먼저 읽은 것이 후회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능하신 아카라트여, 영원한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라고 해도 소용 없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코즈믹 호러와 좀비의 결합입니다.
일반적으로 좀비 장르에서는 사회가 붕괴되고 야만화가 되어가는 삶에서 어떻게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연명시키는 가가 주요한 스토리입니다. 대개 우리는 집단으로써 결정을 하게 되고, 이는 일종의 축소화된 사회가 됩니다. 이 지점에서 후지타 나오야는 좀비 사회학에서 워킹데드의 사례를 끌고 오며, ‘신자유주의적인 정신을 이끌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시청자가 직면하는 것은 리더의 고뇌에 찬 선택이나 결단이고, 살아가기 위해 타자를 죽이거나 먹거나 하는 윤리적인 부담감까지 짊어져야 한다는 리얼리티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이런 약육강식이나 결단의 고뇌를 비극적으로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작용을 합니다. (중략) 하지만 현실에 좀비는 없습니다. 좀비라는 가공의 설정이 심리적 경향성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치라는 측면에서 설명된 미국으로 보자면 좀비의 아포칼립스는 건국 신화로의 귀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소규모화된 정부는 다양한 인종들과 함께 좀비라는 적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이러한 스토리는 미국 전통적인 가치관인 ‘자치’에 대한 노스텔지어와 이어져있습니다. 개척 시대에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자치했던 것이 건국 신화로서, 또한 미국이란 나라의 아이덴티티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좀비 이야기는 그것을 미래에 다시금 재현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이 지점에서 ‘공격하는 좀비’는 정부의 적이며, 동시에 ‘공공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비의 공포는 이데올로기화된 채로 사회적일 수 밖에 없으며, 그 것은 사회의 비틀린 거울이기에 환상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환상 속에서 좀비들은 대개 악의 세력으로 규정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좀비를 우리의 연장으로 조형함으로써 악으로 명명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킵니다.
즉, 보통의 이데올로기화된 좀비와는 달리 이 소설에서는 좀비라는 존재에서 공포라는 인간적 면모를 조명합니다. 더욱이 죽게 된다면 무조건 좀비가 되는 현상 하에 우리와 좀비의 관계는 멸망으로부터 연명해간다는 입장에서 차이보다는 동일성에 가깝습니다.
로지 잭슨은 악의 개념으로 타자화되는 대상들은 차이를 악으로 명명하는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함축한다고 보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즉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인식하는 이데올로기적 차이에 의하여 그 것이 악의 대상으로 명명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연적 혹은 세속적 질서 속에서는 타자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이 차이라는 지점에 주목해 살아있는 자와 죽음에서 도망친 자들을 전복합니다.
이 소설에서 좀비는 죽음에서 도망친 존재들 그 자체입니다. 영혼은 죽음 후 코즈믹 호러스러운 형용할 수 없는 존재를 영접한 후, 도망쳐 이미 생체활동을 중단해 썩어갈 수 밖에 없는 신체로 돌아와 이 삶을 연명시키기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존재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좀비라는 대상으로 죽음의 공포를 다시금 환기해내며 현실의 경계를 해체합니다.
일반적으로 환상문학이 타나토스와 에로스를 통해 사랑이라는 범주에서 이 경계를 해체한 것과는 달리, 이 소설은 코즈믹 호러라는 독자 체험적 영역에서 경계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장르를 전복시킵니다. 이에 최기숙 교수님의 환상에서는 ‘문학에서 죽음이나 낯선 이계는 주인공을 세계와 격리시키지만, 동시에 영원의 이면으로 안내한다’고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원의 이면으로의 이행이 자신의 내면 세계로의 진입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과는 달리, 이 세계는 영원하고 형용할 수 없는, ‘인지를 초월한 고통’의 영원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점에서 전복의 위치를 재확인 할 수 있습니다.
러브크래프트는 환상적인 것의 근거는 작품이 아니라 독자의 독특한 경험에 있으며, 그 경험은 공포이어야 한다, 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최기숙 교수님은 환상에서 ‘죽음과 같이 근원적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의 경우, 그 것은 불안의 정서를 추방하는 동시에 끌어들이는 이중적 반응을 유도’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좀비의 존재는 죽음의 표상으로써 죽여야할 존재로써 불안의 정서를 추방하나, 이 작품에서는 코즈믹 호러라는 장르를 통하여 이중적으로 공포를 환기합니다.
그런 주제적인 특징 상 코즈믹 호러의 작풍은 대개 기이하고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묘사하며, 그 끝에 인지를 초월한 존재를 제시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그런 존재가 좀비입니다. 일반적으로 재해의 이미지에 가깝게 묘사되는 좀비와는 달리, 이 소설의 좀비는 그보다는 기이한 무언가에 가깝습니다.
좀비들은 기본적으로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처럼 보이는 행동을 나타낸다. 특히 성대가 기능을 한다면 비명을 지르거나 울부짖는 소리를 내는 것은 거의 공통적인 사항이었다. 산 사람을 찾아내지 못햇을 경우에는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한 자리에 주저앉아 얼어붙어 있거나, 미친 듯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가는 곳 없이 배회하거나, 나무나 전신주 등을 부여잡고 움츠린 자세로 불안한 듯이 사위를 두리번거리거나, 담이나 바닥 등에 엉거주춤 손을 대고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이 움찔거리는 몸짓을 보이는 등등의 행동거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보고 있지면 좀비들에게 습격 당하는 입장에 있는 산 사람들보다 좀비들이 더 겁에 질려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사람을 인식하면, 마치 우리더러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감정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듯이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로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서는 산 채로 마구 뜯어먹었다. 꼭 살아있는 것을 섭식하는 것이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해결책이라 믿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좀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개채들은 인간 외의 생명체들, 예로 식물이나 물고기, 곤충, 김승 같은 것들까지 뜯어먹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오로지 살아있는 인간만을 원하게 된다. 꼭 살아있는 인간 외의 생명체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학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일단 사람을 공격해 뜯어먹다가 사냥감인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 묘사에서 보이는 주요한 테마는 공포입니다. 그러나 이 공포는 현상으로 제시될 뿐, (아직까진) 공포의 원인이 설명되지 않은 현상으로써의 공포입니다. 이 지점에서 좀비들은 공포의 담지자로써 타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것을 관찰하는 대상으로써는, 기괴한 현상처럼 보일 뿐입니다. 즉 좀비가 지배하는 현실은 이 공포의 분위기를 답습한 기묘한 공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인간이 죽으면 바로 좀비가 된다는 설정은 이 공포의 대상이 자신이 될 수 있음을 함의합니다. 그런 지점에서 좀비는 나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가 되며 이 기묘한 공포는 나로까지 확장됨과 동시에 타자와 나가 분리될 수 없는 절망감으로부터 공포는 확산됩니다.
결론적으로 죽음에서 도망치다는 좀비라는 장르를 코즈믹 호러라는 장르와 결합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다시금 환기해낸 작품입니다. 재해로써의 좀비라는 포멧을 선택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좀비가 아닌, 피해자로써의 좀비라는 테마를 위해 작품은 죽음과 좀비라는 설정을 밀접하게 연결함으로써 독창적이고 새롭게 이야기를 구성해냈습니다. 즉 장르의 클리셰를 적당히 비틀면서도 장르의 기본에 충실한 그런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