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각주가 된 사상을 각주로 표현하다 비평

대상작품: 초고의 끄트머리에서 (작가: 김밀세,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1시간 전, 조회 14

포스트모던 이후의 문학적 조건은 보통 거대서사의 붕괴를 전제로 한다. 사회주의, 진보의 필연성, 인류의 단일한 해방 등등, 이런 것들이 ‘이미 실패한 기획’으로 처리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실패를 아는 인물을 내세워 기획을 재가동한다. 소우주의 아버지 소우진은 소련 붕괴 직후에도 사회주의 활동을 지속한 인물이다. 소우주 자신도 스타하노프 운동의 실패를 거론하면서도, ‘만인이 소우주’라는 평등주의적 명제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그 명제가 틀렸다고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어째서 실현 불가능한지를 각주로 분해하고, 그럼에도 “가능성을 믿기로 결정”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각주’를 통해 보여준다.

 

[사회주의 혁명만큼 급진적인 실험]

이 소설에서 가장 급진적인 형식 실험은 단연 각주다.

일반적으로 각주는 본문을 보조하는 종속적 장치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각주는 본문과 동등하거나 때로는 우월한 서술자가 되고, 어느 때는 연달아 달리며 쌍소멸을 통해 세상을 바꿔놓기도 한다.

이 소설은 세 가지 종류의 각주를 혼용한다.

첫째, 학술적 형식의 각주.

“김영래, 「수원 영통 법조타운의 형성과 해체…」, 『한국근현대지역사연구』 제47집…”처럼 실제 논문을 흉내낸 각주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없는 논문의 서지정보를 있는 것처럼 기재함으로써 허구의 세계에 실재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학술 담론 자체를 패러디한다. 독자는 이 각주를 실제로 검색해서 확인하려는 충동을 느끼거나 실제로 그렇게 검색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순간, 속았다는 걸 깨달으면서 동시에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험을 한다. 이것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둘째, 피세주의 직업적 각주. 화자 피세주는 능력 감정사로서, 사람의 머리 위에 ‘각주’를 달아 능력을 측정한다. 그의 직업은 곧 소설의 형식이다. 소설 속 각주는 피세주가 그 세계에 붙이는 주석이며, 동시에 소설 밖의 독자가 읽는 각주다.

셋째, 자율적 발화자로서의 각주. 세계 붕괴 장면에서 각주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노라”를 달고, “볼츠만 두뇌”나 “현금 가치”에 대한 설명도 하고, “E=mc²” 계산을 수행하며, “나도 소우주입니다”라고 자기 정체성을 선언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잠시 정비하며 각주라도 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며 자신을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제안까지 한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위 각주를 무시하라”의 반복이다. 이 각주는 소설 안에서 네 번 등장한다. 특히 맨 처음에 능력을 측정할 때 나온 것은 피세주가 ‘나는 두 번째 각주를 달지 않았다’ 라고 본문에서 서술하면서 곧바로 기이함을 유발한다. 그리고 “무시하라”는 명령이 각주에 달려 있다는 것은, 그 명령 역시도 각주이므로 무시될 수 있다는 순환논리를 만든다. 이것은 러셀의 역설의 서사적 변형이며, 소우주의 자기갱신(집단 폐기와 업데이트) 능력의 구조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미 실패한 사상을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

각주란 무엇인가. 본문이 미처 담지 못한 것, 혹은 담기를 거부당한 것이 밀려나는 자리다. 활자의 위계 안에서 각주는 작다. 글씨도 작고, 놓인 자리도 아래다. 독자는 각주를 읽지 않아도 본문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각주는 본문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사회주의는 각주에 산다.

소우주의 아버지 소우진의 이념적 전력은 본문에서 직접 서술되지 않는다. “사노맹 사건 공동정범 이하 6인. 15년 형 선고”라는 기사 문구가 흘러가고, 그것이 그의 사회주의 역정을 대신한다. 소우주가 스타하노프 운동을 거론하는 장면도, 예리가 “관심 없어”라고 잘라버리는 대화 속 여백에 끼어 있다. 사회주의는 이 소설의 본문 안에서 정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비스듬히, 말 그대로 각주의 문법으로 존재한다.

이 선택은 정확하다. 사회주의는 실제로 역사의 각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를 관통하던 거대한 이념이 소련의 붕괴와 함께 본문에서 밀려났다. 이제 그것은 역사 교과서의 하단, 혹은 실패 사례 연구로서만 인용된다. 이 소설이 사회주의를 각주의 자리에 배치하는 것은 그 역사적 위치를 형식으로 수용하는 행위다. ‘이미 본문이 아닌 것’을 본문인 척 복원하지 않는다. 각주로서, 그러나 각주로서 존재하게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각주는 조용히 있지 않는다.

쌍소멸로 1부터 12까지 연달아 달린 각주는 사실상 본문을 대체하는 독백이다. <소우주에 대한 어느 명제> 에서는 본문의 문장보다 긴 부연묘사를 한다. 착륙 장면에서는 본문이 문장을 미완으로 끊고 각주가 그 결론을 가로챈다. 화성의 적기를 분해하는 각주들은 ‘적기(赤旗)·적기(적기조례)·적기(알맞은 때)’라는 언어유희를 통해 붉은 깃발의 의미를 홀로 증식시킨다. 본문이 허락하지 않은 발언권을 각주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소련은 화성에 도달한 적이 없다.” 이 문장은 각주[6]에 있다. 그리고 그 각주 바로 위의 각주[5]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소우주가 스스로를 소련 시민으로 정의한다면, 소련이 화성에 도달했다는 명제를 반박할 사람은 말 그대로 희박하다.” 사실 확인과 의지의 선언이 같은 형식적 공간, 즉 각주 안에 나란히 놓인다. [5]와 [6]은 번호 하나 차이다. 역사적 사실은 그것을 부정하는 의지와 동등한 크기의 각주로 존재한다. 이 배치가 이 소설의 핵심이다. 실패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의지도 지워지지 않는다.

소우주의 능력 — “이뤄져야 할 것들이 이루어진다” — 은 당위를 현실로 전환하는 힘이다. 그 능력이 구현한 것이 화성의 붉은 깃발이다. 자연법칙을 위반하며 흔들리는 깃발. 본문은 그것이 어째서 흔들리냐고 놀라고, 각주는 그 불가능성의 실현을 아무렇지 않게 납득시키고 심지어 자조적 개그도 치며, 그것을 전부 기록한다. 각주라는 자리가, 불가능과 실현을 동시에 수용하는 유일한 공간이 된다.

이것이 이 소설이 사회주의에 각주를 부여하는 방식의 핵심이다. 각주는 본문의 아래에 있지만, 본문이 끝난 자리에서 계속된다. 각주는 보류된 언어다. 지금 당장 본문이 되지는 못하지만, 삭제되지도 않은 것. 이미 실패한 사상을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는 그 사상을 본문의 자리로 복권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다. 각주의 자리에서 끝까지 버티겠다는 것이다. 지워지기를 거부하며, 번호를 달고, 거기 있는 것.

피세주라는 이름 — 각주를 다는 자 — 이 주인공인 것도 이제 달리 읽힌다. 그는 세계에 각주를 다는 자다. 본문이 처리하지 못한 것들을 아래에 붙여두는 자. 그리고 그것이, 이 소설이 역사에 대해 취하는 자세다. 역사의 본문이 사회주의를 지웠을 때, 이 소설은 그것을 각주로 복원한다. 본문으로 되돌리지 않고, 각주이지만 지워지지 않고 보이는 각주로.

 

[telling보다 showing, 또 다른 실험]

실험은 각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착륙 순간을 묘사하는 이 대목은 문장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공동에 난 나선을 갉아먹으며 합금의 표면을 타고 달리는 추진제였던 열기가 점차 점차 흩어지며 고도계의 바늘에 떨리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고, 으레 나야 할 소리가 고막에 전해지나 그 질감은 사뭇 가벼워 다른 행성에 발을 딛는다는 환희가 고양되어 두려움을 압도하니, 두 우주비행사는 시선을 교환할 새 없이 각자 기도문을 읊고 들이마실 숨에 대해 고대해보고, 역할을 다한 연료와 산소의 용기는 무인지대로 방기되어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지면과 충돌할 예정인데, 와선을 그릴 모습이 포물선을 따를 우주선의 운명과 대비되어 인류를 위한 도약을 내딛기 위한 대가에 대한 숙고를 불러일으키는 일 없이 소우주는 연착륙을 단언하는데, 소유즈 호에 합승한 피세주는 호흡 곤란을 걱정하니, 산화철과 규산염 조각들이 은은한 열기에 달궈지는 착륙장에서 먼저 발을 내딛는 사람은

이 문장은 여기서 끊긴다. 결정적 정보를 언급하는 역할을 각주로 넘기기 위해서.

이 대목에서 박태원의 단편 <방란장 주인>이 떠오른다.  <방란장 주인>은 소설 전체가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또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는 단어 823개, 쉼표 93개, 세미콜론 51개, 대시 3개로 이루어진 문장이 있다. 이 소설에서의 착륙 묘사는 그러한 형식 실험의 계보 위에 있다.

여기서 잠시.

이 소설의 문체는 telling보다 showing에 극단적으로 의존한다. 그런데 그 showing이 통상적인 의미의 묘사나 장면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 소설의 showing은 각주, 수식, 형식적 형식, 발화자 표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긴 문장 역시 동일한 원리다. 착륙의 과정은 연속적이며 동시다발적인 작동에 의한 사건이다. 문장 부호로 잘리지 않는 하나의 긴 흐름이 바로 그 연속성을 문법적으로 구현한다.

만약 이 장면을 내 방식처럼 telling에 집중한 짧은 문장들로 분절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이런 식이 될 것이다.

공동에 난 나선을 갉아먹으며 합금의 표면을 타고 달리던 추진제로 인한 열기가 점차점차 흩어졌다. 고도계 바늘이 떨었다.

소리는 났다. 늘 들어왔던 그 소리가 고막에 전해졌다. 두려움은 있었지만, 다른 행성에 발을 딛는다는 환희가 고양되어 그것을 압도했다.

역할을 다한 연료 탱크와 산소통들이 조용히 몸을 던졌다. 만유인력이라는 가장 평등한 법칙 앞에, 그것들은 와선을 그리며 낙하할 터였다. 포물선으로 비행을 이어갈 소유즈 호와는 전혀 다른 결말로.

두 우주비행사는 각자 기도문을 읊고는 시선을 교환할 새도 없이, 지구의 공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들이마실 것에 대해 고대했다.

소우주는 연착륙을 단언했고, 피세주는 호흡곤란을 걱정했다. 하지만 정작 산화철과 규산염 조각들이 은은하게 달궈져 있는 착륙장에 먼저 발을 내딛는 사람은 피세주였다.

문장을 분절시키면 쓰는 이의 해석이 더 많이 개입하게 된다. 반면 원문의 긴 문장은 독자가 어디서 멈춰서 의미를 구성할지를 각자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이 소설이 긴 문장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각주가 짊어진 것]

이 소설이 각주라는 형식을 선택한 것은 필연적이다. 각주는 보조적인 것, 부차적인 것, 본문에 수렴되지 않는 언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본문을 잠식하고 전복한다. 이는 역사의 ‘주류서사’에 수렴되지 않는 것들 — 패배한 사상, 좌절된 실험, 이름 없이 스러진 관계들 — 이 실은 역사의 동력이었다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동형이다.

피세주, 즉 각주를 다는 자는 그 자신이 하나의 메타포다. 세계를 기록하고 주석을 달지만, 주석이 달리는 존재이기도 한 인물. 그가 마지막에 우주선을 향해 달리며 외치는 것은 신념의 발화가 아니다. 그것은 몸이 내지르는 소리, 행위 자체다. 가능성을 믿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가능성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초고의 끄트머리에서, 이 소설은 완성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미완성 속에서 다시 쓰여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우주가 있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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