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inevitable.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죽음에서 도망치다 (작가: 녹차빙수, 작품정보)
리뷰어: 탁문배, 21년 11월, 조회 94

바야흐로 좀비의 계절입니다. 이건 개인적인 감상인데, 사실 저는 브릿G에서 개최하는 많은 공모전 중에서 ZA문학상을 가장 중요한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당연히 그런 건 없고, 제가 처음 브릿G에 발들였을때 진행중인 공모전이 ZA였기 때문일 뿐입니다. 아무튼 가을이 오면 뭔가 써볼까 생각하는데 늘 어영부영 하다가 망작만 생산하거나 마감을 못맞추거나 합니다. 좀비와 저는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사랑했다.

 좀비 아포칼립스라고 하면 썩은 시체가 달려들어서 물어뜯고 피도 철철나고 하니까 호러 같지만, 진짜 호러 장르로서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루는 경우는 요즘에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별로 무섭지가 않아요. 분명히 사람들이 때거리로 죽어나가고, 실제로 일어나면 벌벌 떨겠지만 아마겟돈이나 투모로우 같은 재난물을 보고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좀비는 딱 그 재난의 포지션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세대의 좀비물은 실제로는 그런 재난에 따른 휴먼드라마 내지 스릴러, 사회비판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좀비는 엄연히 걸어다니는 시체고, 시체는 곧 죽음이며 죽음이란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입니다. 무덤 아래 고이 잠들어 있어야 할 죽음이 나를 죽이려 달려든다는 강렬한 이미지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건, 어차피 끝에 가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강력한 타성이 작용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죽음에게 그것이 받아야 마땅할 두려움을 보이도록 합시다.

 

 The spoiler! The spoiler!

 

 좀비는 J. R. R. 톨킨이나 돈법사가 만든 개념이 아니므로 특별히 정석적인 설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모종의 바이러스 등 질병으로 해석하는 편이 흔한데, 저는 특히 라오어의 기생생물 설정이 마음에 들더군요. 거기다 전세계가 진짜 판데믹에 신음하는 통에 요즘 좀비물에서 국가차원의 감염병관리에 대한 디테일이 급상승했는데, 본 작품에서는 그런 게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유 불문하고 사람이 죽으면 좀비가 됩니다. 그리고 제목에서도 나타나듯 바로 이 점이 작품의 핵심입니다. 본작에서 좀비는 질병도 뭣도 아닌 그냥 자연(혹은 초자연)현상입니다. 그래서 초반부부터 특별히 좀비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사고로 다친 사람임에도 응급수술중 사망하자 바로 좀비가 되어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질감과 으스스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부분이었습니다만, 사실 여기서부터 이것이 일종의 코스믹호러라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습니다.

 좀비사태가 재난이고, 그것도 아포칼립스급 재난이라고 볼 때 좀비아포칼립스는 일종의 재난극복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극복하는지 여부는 작가의 성격에 따라 갈리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등장인물들이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좀비에게 물리면 안 돼, 쉘터의 방어벽이 뚫리면 안 돼, 배신자나 약탈자들에게 당하면 안 돼. 그렇게 해야 살아남아서 다시 좀비가 없는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어. 그러나 여기서는 좀비화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무슨 이유로 죽든, 당신은 좀비가 됩니다. 그러니 되도록 안 죽도록 해 보세요. 무리겠지만.

 그러면, 에피쿠로스가 말한 대로 살아있는 나와 좀비가 된 나를 분리시키는 것은 어떨까요? 어차피 죽고 나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될텐데, 내 시체가 좀비가 되어 돌아다니는 것쯤 모종의 장기기증(?) 정도로 생각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탈출구를 정서적으로 봉쇄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이곳의 좀비들은 감정을, 그것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28주후 시리즈의 좀비들이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나에게 달려드는 썩을(썩은?) 것들이라면, 본작의 좀비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차 절망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딱한 피해자 포지션에 가깝습니다.

 저로서는 읽으면서 아, 이거 절묘한 장치인데? 하고 감탄했는데, 사실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존재를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 괴담에는 프로복서나 이종격투기 선수의 유령 대신 흰 소복입은 여자귀신이 나올까요? 그 존재가 느낀 공포, 절망, 원한에 나도 모르게 이입하게 되거든요.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일 수도 있구요. 요즘 많은 언데드들이 스탯만 올리느라 잃어버린 미덕이죠.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의 좀비들이 오랜만에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작품 속의 사람들도 공포에 질렸지요. 공포에 질린 나머지 공포와 하나가 되려는 자들이 나오고, 그렇게 호러는 코스믹호러가 되어갑니다.

 본 작품은 위의 참신한 설정을 바탕으로 좀비물에서 골치아픈 문제 두 가지를 깔끔하게 털어버렸습니다. 다 썩은 시체인데 어떻게 움직이는가? 영혼의 개입에 의한 초자연현상입니다. 사람이 좀비가 되는 경로는 무엇인가? 그냥 죽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것은 다른 면에서도 묘수였습니다. 장르 자체가 전복되는 것을 보는 것은 참 짜릿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저로서는 그걸 아주 완전히 뒤집어놓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비교적 친숙한 K-좀비아포칼립스 상태입니다. 알게 모르게 항시 준전시상태인 대한민국에는 좀비사태 발발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철조망 뒤에 식량과 탄약이 짱짱하게 쌓여있는 군부대가 전국에 깔려 있거든요. 본작에서도 그런 군부대특히 병참의 중심인 탄약창를 중심으로 전국에 띄엄띄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아둥바둥 살고 있지요. 그럭저럭 아직 중앙행정력도 미치는듯 하고요. 그래서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은 비인간적인 실험을 감행하고, 거기에 반발한 반란군이 트롤링을 감행하고, 사태에 순응한 사이비종교가 포기하면 편하다면서 빠른 전멸을 유도합니다. 디스 이스 코리아 스타일.

 여기서 문제는 이 모든 상황을 주인공이 1인칭 시점으로 직접 체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불과 수일이라는 시간 안에요. 사실 작중의 수일이라는 시간 자체보다는 141매라는 분량의 압박이 더 큽니다. 그동안에 주인공은 이 모든 배경과 사건의 진상에 접근해야 하는데, 주인공이 동시에 여러 장소에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다른 등장인물이 나타나서 대사를 통해 주인공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중반 이후로는 심하게 반복되요. 특히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간 가죽옷의 경우에는 그곳이 연설을 시작하기에 좋은 상황이나 장소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인물들의 대사가 길어진 대신 사건과 상황은 단축되었습니다. 주인공이 경험하는 대신 들어서 이해해야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어쩐지 주인공이 다리에 총을 맞거나 결국 그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는 절박한 상황도 그 무게감을 제대로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예전에 시나리오 작법서를 보니 주인공은 수동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더군요. 저는 원칙따윈 믿지 않습니다만 주인공이 상황을 주도하는 입장이 아닐 때 나타나는 효과는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 작품은 배경 설정이 낯설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필요할 수는 있습니다. 사건 대신 대사가 많아진 것도 그런 설정을 독자에게 드러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조심스러운 주장입니다만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요?

 저는 심폐사 한 사람은 좀비가 된다는 작중인물의 말과 총구로 둘러싸인 수술실 에피소드 이후로 죽으면 좀비가 되는 현상이라는 배경을 이미 받아들였습니다. 드래곤이 공주를 잡아갔다는 문장 이후로 날개도 있고 앞다리도 있는 진화론적으로 석연찮은 파충류의 존재를 수인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허무주의적 종교에 의한 파국과 주인공의 절망이라는 결말까지 치닫기 위해 어느 정도로 디테일한 설명이 필요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까지 많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단편 소설이라면요. 설정은 소설의 뿌리 운운하는 말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지표면에 드러내야 하는 설정이 아니라면 굳이 시간을 들여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전쟁피난민들 때문에 자연발생한 깡통시장의 창설비화와 주요 취급품목을 알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그냥 전쟁고아 소매치기 소년 하나로 퉁치고 넘어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죠.

 말뚝에 묶여 비명(고함이 아니라)을 질러대는 좀비들과 나도 죽으면 좀비가 되어서 걸어 다닐 수 있냐고 묻는 어린이의 이미지는 강력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도래한 죽음의 땅과 그 죽음 뒤에 도사리고 있는 초월적 공포도 매력적이구요. 그런데 약간만 더 뻔뻔하게 밀고 나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좀비영화 하면 자꾸 뭐시깽이 오브 데스 하는 이름을 붙이는 데서 알 수 있지만, 좀비는 죽음 그 자체의 메타포로서 아주 좋은 대상입니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 피해다니는 그러나 결코 피할 수 없는 대상이 팔다리를 장착하고 우리를 쫓아오는 거죠. 그것도 마치 죽은 뒤의 나 자신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극동에서 황제라는 명사의 근원이 된 시황제도 그렇게나 죽음을 피해 달아나려 했지만 그 자신도, 자신의 제국도 정해진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여간 죽는 건 진짜 무섭다니까요. 우리가 가진 죽음에 대한 무지를 감안하면, 죽음 뒤에 허무만이 있고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차라리 자비로운 생각인듯 합니다.

 , 진짜 여담인데, 아는 분들은 다 아시는 호러 맛집 SCP재단(SPC는 빵집이므로 오타에 유의)에도 그런 개념적인? SCP가 있습니다. 작품을 재밌게 읽은 분들은 그것도 한 번 찾아보시면 즐거울 것 같습니다. 방금 뒤져보니 SCP-2718이군요. 이런 건 늦은 밤에 읽으면 참 좋죠. 잠도 안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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