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감상은 유티아 작가의 장편소설 〈오독〉의 25회차 ‘第 二篇-7’ 연재분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오독(誤讀)은 ‘잘못 읽음’을 가리키는 한자어다. 살면서 우리는 어떤 것을 잘못 읽을까. 보통은 책이나 글 등 ‘텍스트’로 이루어진 매체를 ‘읽는다’라는 행위와 연관 짓는다. 하지만 우리가 오독할 수 있는 건 비단 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은 때로 타인의 말이나 행동, 또는 삶을 잘못 읽기도 한다.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단정하는 행위로 오독의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쩌면 글을 잘못 읽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잘못 읽음으로써 발생하는 문제가 훨씬 크고 다양하다. 게다가 지금은 모든 것이 범람하는 시대 아닌가. 양적으로 비대해진 정보의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 없이 오독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텍스트와 정보가 범람하는 지금, 오독은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남의 의도를 잘못 해석해서 벌어지는 문제가 비단 지금에만 있는 건 아니다. 예로부터 현재까지 오독은 아주 많은 사건을 낳았다. 연인의 서신을 잘못 해독하거나, 왕이 신하의 간언을 잘못 알아듣거나 친구가 서로에게 해준 조언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은 인간종이 발생한 이래 끊이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오히려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오가던 서신은 더 많은 오독을 낳지 않았을까.
여기 ‘이물(異物)’의 능력을 오독한 아이가 있다. ‘행동’을 서술하기에는 오해가 자연스러운 말이지만, 이 소설은 ‘잘못 읽음’을 논하고 있으니 아이의 행동을 오독이라 표현해본다. 어느 날 서고에 나타난 한 존재가 아이에게 글자가 쓰인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겉보기에 매우 아름답고 어느 한 군데 흠잡을 곳조차 없다. 희게 늘어진 머리는 먹이 튄 붓처럼 끝부분이 거뭇하다. ‘그것’을 사람들은 ‘책망량’이라 부른다. 글을 먹으며 산다는 망량에게 아이는 가장 적절한 식사를 떠올린다. 자신의 하나뿐인 누이에게서 사랑을 뺏어간 누군가가 쓴 글.
인간은 쉽게 약속을 하고 저버리지
유티아 작가의 〈오독〉은 ‘책망량’이라는 존재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사건을 연달아 다룬다. 제목과 부제 모두 한자어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훌륭한 동양풍의 분위기를 형성하며 꼼꼼하고 바른 문장으로 상황을 이어나간다. 긴 이야기의 서막을 여는 것은, 뜻밖에 한 사내의 죽음이다. ‘금목’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출신이 천하나 배움에 뜻이 있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날 윤이라는 이름의 책쾌가 그에게 책을 하나 건넨다. 티 묻지 않은 표정으로 윤이 내민 책은 잘 알아볼 수 없으나 귀한 것이라고 했다. 금목은 애물단지 같던 물건과 귀한 책을 교환한다. 유티아 작가는 소설 안에서 은근한 긴장감과 공포를 형성할 줄 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런 작가의 장점이 드러난다.
금목은 “책이 입을 슬쩍 여닫는 것은 미처 보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운수 좋게 교환을 했다는 것에 들뜨고 만다. 금목이 알지 못하는 책의 정체는 소설의 초반, 일종의 ‘서스펜스’를 형성한다. 금목은 모르는 책의 불길한 비밀이 스스로 입을 여닫는 책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장면은 이후 벌어지는 신비한 사건들이 책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암시를 준다.
금목은 이후 홀연히 나타난 어떤 사람을 만난다. 아니, 소설에는 ‘그것’이라고 쓰여 있으니 ‘무언가’로 바꾸어 보자. 금목이 만난 ‘무언가’는 그의 장부를 읽고 있다. 외양 묘사로 보아 범상하지는 않은 사람 같다. 이후 금목이 쓴 장부의 내용이 서서히 지워진다. 어딘가 빠지고 삭제된다. 그리고 금목이라는 사람의 영혼도 책과 같이 지워지고 빠지고, 삭제되더니 드디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금목의 이야기에는 특별히 아내인 만희의 이야기가 병치된다. 여느 여성과 같이 집에서 아이를 보면서 사는 그녀는 언제부턴가 금목이 이상해지고 있음을 눈치챈다. 금목은 그렇게 눈치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가 자고 있는데도 일부러 깨울 정도의 목소리로 말하고, 아내에게 말하는 태도도 영 비뚤다. 하지만 금목은 이 소설 안에서 다양하게 해석되는 캐릭터다. 가족에게는 짐짓 상전처럼 말할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비천한 신분에 속한다. 이런 다양한 층위의 교차를 주목해야 한다. 그런 금목에게 닥친 일은 너무나 황당하다. 도둑으로 몰린 것이다.
장부에서 사라진 글자는 다름 아닌 물건의 이름이었다. 그것도 큰 값이 나가는 물건. 게다가 그 물건은 어떻게 된 일인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당연히 금목의 주인은 그를 의심했고 만희와 아이 금호는 비참한 일을 겪게 된다. 하지만 금목이 범인이 아니라는 점은 이야기의 진행에서 수상하게 보이는 한 사람으로 인해 충분히 증명된다. 그렇다면 금목의 글씨는 어째서 없어진 걸까. 그건 ‘책망량’이라는 존재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반드시 책만 먹는 것이 아니란다. 먼지 먹은 오래된 글귀와 곰팡내 나도록 묵은 먹은 내게 별식 중의 별식이며, 사람이 묻어나는 글은 그 중에서도 최고로 치지.”
책망량은 ‘사람이 묻어나는 글’을 최고로 여긴다. ‘사람’이 묻어난다는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마음’, 또는 ‘성향’이 드러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쉽다. 금목은 장부를 쓰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장부에 그의 ‘마음’이 가장 기울어져 있다. 그뿐 아니라 장부에는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금목의 주인과 그가 가진 욕심, 그런 주인의 물건을 빼앗으려는 제3자, 그리고 글쓰는 걸 좋아하는 금목의 수수한 즐거움.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 있는 게 장부였다.
물건이 변하여 된 도깨비 ‘망량’이 사람의 마음을 먹는다는 건 흥미로운 설정이다. 물건으로서 감지하지 못하는 마음과 감정에 망량이 끌리는 이유는 조금 더 작품이 진행되어야 알 수 있겠지만, 그것이 ‘책’망량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책은 사람의 마음이 가장 섬세하게 들어간 물건이다. ‘마음’이 없다면 책을 쓰는 의미는 없다. 책 안에는 마음과 마음이 충돌하거나 서로에게 스며드는 다채로움이 있다. 어쩌면 다른 물건이 아니라 ‘책’이 변하여 된 망량이기에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갈구하는지도 모른다.
복잡다단한 심정을 삼키는 망량의 습성은 금목에서 이채로 이야기가 넘어가며 더욱 강조된다. 이채는 누나가 자신에게 주던 사랑을 다른 남자가 뺏어간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던 와중, 서고에서 나타난 책망량을 만난다. 망량은 아이에게 자신을 길들이라고 하며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부추긴다. 망량의 고요하고 진중한 제안에 이채의 마음은 흔들린다. 그는 자신만이 망량에게 줄 수 있는 글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누이의 연애편지다.
금목의 장부와 마찬가지로 미정이 모아둔 서신에는 가장 맑은 사랑 이야기가 쓰여 있었을 것이다. 상호 간에 오가는 연애의 감정은 편지에 고스란히 담긴다. 과연 사람의 ‘마음’이 묻어있다고 할 만한 물건이다. 망량은 또 이 편지의 글씨를 삼킨다. 별미 중의 별미였을 것이다. 다른 편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뺏긴 사내가 죽어간다. 그는 자신이 감출 수 없던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에는 이채의 여정이 나온다. 금목-미정-이채로 이어지는 사건이 촘촘한 갈래길을 만들며 뻗어간다. 망량은 사람의 영혼을 먹고 배부르다. 그에게는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도, 손해를 감추려는 생각도 없다. 망량을 이용하는 것, 망량을 탐내는 것, 망량을 쫓아버리는 것은 모두 ‘사람’일 것이다. 미물이 변해 만들어진 삿된 것이라도 사람은 사소한 것에 휘둘린다. 때로는 사사로운 상황에 휘둘려 가장 소중한 사람이 가장 아끼던 것조차도 가져다 바친다. 그렇기에 미정의 사내가 죽는 장면은 아주 허망하고 슬프다. 어느 때보다 축복받아야 하는 시기에 죽음을 맞는다는 건 독자들이 느낄 수 있는 최고치의 애절한 감정을 선사하고, 그렇게 두 번째 이야기도 끝난다.
아이는 망량의 능력을 오독했다. 다른 이의 마음을 먹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마음 역시 앗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간과한 채. 이채는 망량에게 손을 건네고 말았다. 망량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여러 번 등장한 경고처럼 그것은 단지 삿된 것일 뿐일까. 앞으로 밝혀질 것이 더 많은 이 이야기에서 이채는 어떤 마음을 독자들에게 보여줄까. 그리고 그가 망량을 믿는 것은 오독일까, 아니면 정독일까. 망량의 생명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망량과 사람 중, 삿된 것은 어느 쪽일까. 망량은 얽히고설킨 마음의 타래를 풀어나가는 쪽일까, 끊어버리는 쪽일까.
꼬리를 무는 질문 가운데 확실한 마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소설의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읽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채의 등에 바싹 붙어 함께 여행을 떠나고픈 마음은 단단한 진실로 남아 있다. 슬프고, 한편으로 궁금한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맺으며
‘망량’으로 불리는 도깨비를 소설에 등장시켜 환상성을 더한 이 작품은 성공적인 출발을 마쳤다. 독자로서 큰 기대를 거는 작품이다. 사람의 감정을 먹고 사는 것은 가장 효과적으로 인간을 휘두르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사람을 휘두르는 데에 능숙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작가’이다. 유티아 작가는 단연코 망량보다 훌륭하게 독자의 마음을 삼킨다. 혼미하여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의 매력이 매 회차에서 느껴진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의 글에서 먹향이 스치는 건 신기한 일이다. 어디에도 먹을 흘린 자국은 없다. 시간여행이라도 한 것처럼 나는 이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책쾌의 상자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서고에서 망량의 모습을 찾으려 애쓴다. 노여워하는 상단 주인의 얼굴을 상상하며 나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는 대목에서는 줄행랑을 놓고 싶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온 마음을 담아 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망량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오싹하다. 《오독》은 무더운 이 여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시원한 소설이다. 더 많이, 더 확실히 사람을 휘두르고 때로 매만지고, 멀리서 관망하는 망량의 모습이 이 소설에서 다채롭게 뻗어가기를 바란다.
마음을 먹는다. 글을 먹는다. 속절없이 망량에게 마음을 뺏기는 기분은 잘못 읽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