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이유와 변질되는 목적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작가: 허지행, 작품정보)
리뷰어: 냉동쌀, 21년 6월, 조회 36

나그네쥐는 레밍으로도 알려져 있는 작고 귀여운 설치류입니다. 툰드라 지방에 살기 때문에 몸집이 대체로 큰 편이고, 여느 설치류가 그렇듯 집단으로 생활하며 먹이가 부족해지면 대규모 이동을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 귀여운 설치류는 다소 꺼림칙한 특징을 갖고 있는데, 바로 집단자살입니다. 그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때때로 대규모로 이동 중인 나그네쥐 무리가 한꺼번에 절벽으로 몸을 던지는 모습이 목격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나그네쥐는 군중심리의 대명사로 비유되곤 합니다. 이 작품은 그런 나그네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 우화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공원에 모여 줄을 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줄을 선 목적이 명확한 이들은 첫 세 명뿐입니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왜 줄을 서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 따라 서 있을 뿐입니다. 세 사람이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고 하죠? 사람들은 줄을 서는 이유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세상사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향이 있는 것도 같고요. 그러나 때로는 일을 일으킨 뒤에 이유를 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 속담에, 이유와 연고는 어디든 붙일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품 속 나그네쥐들은 일단 행렬에 참가한 뒤에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온갖 이유를 붙이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앞뒤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듯하지만, 사람에서 사람으로 거치며 전달되는 정보는 왜곡되고 변질됩니다. 줄을 서는 목적이 처음과는 달르게 변질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명확한 이유도 없이 군중심리에 휩쓸려서 줄을 선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비이성적인 행위를 변호하듯 이유를 짜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짜낸 이유와 그 근거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고 허황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행태를 우리는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판단할 때,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교육받습니다. 그러나 정작 어떻게 비판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지는 좀처럼 배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교육의 헛점을 비집고 탄생한 것은,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비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모순적인 듯하지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기도 합니다.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비이성적인 사람은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일에 감정적으로 휩쓸립니다. 자신이 접하는 정보가 사실인지, 근거가 명확한지, 자신이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 맞는지는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이내 그것을 부정합니다. 이성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이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한 비이성적인 행동에 어떻게든 이성적인 근거를 붙이려고 합니다.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너무 길군요. 그냥 나그네쥐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나그네쥐 한 마리가 합리적인 체하는 이유를 만들어내면, 그것을 지켜보는 또다른 나그네쥐가 다가와 그 이유를 똑같이 따라합니다. 그러나 모방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생기고, 합리적인 체하는 또다른 이유가 생겨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 현실에서 벗어난 자기들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옆사람의 행위에 따라 어디로든 따라갈 수 있는 수백 마리의 나그네쥐 떼가 탄생하고 맙니다.

작품 속에서는 그런 나그네쥐들의 도착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현실이라고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한 나그네쥐들은 늦든 빠르든 결국엔 파멸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같이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감시의 대상이 되면서 판단의 대상이 됩니다.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무작정 따라하거나, 밀려드는 정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작품 속 나그네쥐와 같은 결말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니만큼, 어떤 일이든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근거를 합리적으로 따져보고, 이성적인 결론을 내린 뒤에 행동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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