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인간보다 한 차원 위의 존재를 믿는다. 어떤 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사람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건을 맞닥뜨릴 때, 기적과 이사(異事)를 바란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종종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따위의 말로 견딜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살아가지”.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운 시간이 있다. ‘잘 되게 빌어 주세요’,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이 신앙과 무속의 범주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듯, 무심코 우리는 하늘과 땅의 신을 숭배한다. 사실, 그들이 있기를 바란다. 사는 동안 당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번 한 번만 어떻게 안 될까요.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너는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잖아
과학과 이성이 지배한다고 하는 지금에도, 신의 목소리를 듣고 점괘를 내어주는 무당이 있다. 철학관과 작명소에서, 손금과 이름으로 미래를 봐준다는 이들이 지금도 복채를 받는다. 현실의 인간관계를 사주와 팔자를 통해 풀어낸다. 그러니 상상과 가상의 이야기인 소설 안에서는 좀 더 자유롭게 신을 보아도 되지 않을까. 꿈에서, 또는 현실에서 귀신을 보는 스토리텔링은 지금까지 사랑받는 환상적 요소이다. 주인공은 자신에게만 보이는 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으며,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그들’은 복잡한 이론의 밖에 있다. 작가에게는 창작에 편리함이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귀신이 등장하는 순간 기존의 지식과 배움은 흩어진다. 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을 뛰어넘는 재미와 상상이 작품 안에 가득해진다.
비단 소설 장르뿐 아니라 시나리오나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몇 해 전 영화로 흥행한 《신과 함께》 시리즈는 사후세계의 심판을 다루고 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동양의 방대한 상상력과 인간의 삶을 조화롭게 결합한 연출로 편당 천만 관객 이상을 동원했으며 후속 작품을 시리즈로 제작 예정이다(2021년 6월 기준). 드라마로는 《대박부동산》, 《경이로운 소문》이 각각 퇴마사 겸 공인중개사와 악귀 사냥꾼을 다루었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경이로운 소문》은 OTT 플랫폼 넷플릭스에서 국내 스트리밍 순위 1위를 장기간 유지했을 뿐 아니라 2021년 TV 쇼 부문 월드랭킹 8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쯤 되면 지금은 사람보다 귀신이 더 인기가 있는 시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공연 예술계도 마찬가지이다. 대학로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뮤지컬 〈전설의 리틀 농구단〉은 따돌림을 당하던 주인공 수현이 15년째 학교에 묶인 귀신들을 만나며 시작한다. 현재 인기리에 공연 중인 뮤지컬 〈명동로망스〉도 명동 행정복지센터의 9급 공무원 선호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로망스 다방에 들어서면서부터 기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들. 보이지 않아야 마음이 놓이는 것들을 다루는 이야기는 지금도 만들어지는 중이다.
이필원 작가의 단편 〈성주〉도 마찬가지이다. 소설 속 순영은 “사람 아닌 것의” 목소리를 듣는다. 언니의 죽음과 여성으로서 겪는 부당한 일들. 그 안에서 “내가 계속 살 수는 있나” 하는 망연자실함이 있을 때 순영에게 들린 것은 하나의 목소리였다.
‘성주’라는 제목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대표적으로 성의 주인이라는 뜻이 있고 부가적으로 집을 지키는 ‘성주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언뜻 보기에는 사람의 이름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은 ‘성주신’에 관한 내용이다. 집을 지키는 성주신. 무언가를 지킨다는 속성은 굉장한 무게를 가진다. 예로부터 성주신은 집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신이었다. ‘지키다’라는 동사를 꾸미는 ‘든든하다’라는 형용사는 행위의 묵직함을 잘 드러낸다. 앞서 언급한 영화 《신과 함께》의 2편에서 배우 마동석이 연기한 성주신을 떠올려보자. 든든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사람은 ‘든든한 것’이 홀연히 사라졌을 때 불안함을 느낀다. 든든하게 보장되던 내일이 사라지는 순간, 든든하고 안전한 나의 경계 안으로 무언가 침투하는 순간, 든든하게 내 옆에 있던 사람이 부재하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한다. 〈성주〉의 초반에는 주인공 순영의 삶에서 든든하게 서 있던 두 가지가 홀연히 사라진다. ‘언니’와 ‘첫 직장’이다. 언니가 죽은 이유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직장을 잃은 이유는 명확하다. 순영의 잘못이 아니다. 당연히 모든 시대에 문제적인 사건이 “요즘 되게 민감한 문제”로 치부되었다. 한 사람이 분명히 느낀 수치가 없던 것으로 되어 버렸다. “황금비율로 기가 막히게 말아진 소맥”을 기가 막힌 사람에게 부어버린 순간, 순영에게 ‘든든’했던 모든 사람이 등을 돌렸다.
그런 순영에게 손을 내민 사람, 아니 신이 있다. “전주이씨 정종대왕 무림군파 후손의 집을 수호하는 터주신”이다. 본래 영적인 소리를 들을 수 있던 순영이 터주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놀랄 이유는 없었다. 다만 순영은 터주신에게 뜻밖의 부탁을 받는다. 성주신의 부탁은 성줏대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뜬금없는 부탁이다. 하지만 순영도 제안할 것이 있으므로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 성주신은 순영을 돌보아 주기로 한다. “저를 돌봐주는 신은 없습니다”. 성주신에게 담담히 말하는 순영의 모습이 위태롭다. 지지대 하나가 부러진 폭풍 속 나무처럼. 성주신은 그런 순영에게 같은 온도로 답한다. 자신을 도와준다면 그녀를 돕겠노라고.
욕심 많은 귀신과 홀연한 소년
성주신의 부탁을 따라 순영은 성줏대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두 명의 사람을 본다.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다. 인간 외의 기운을 뿜는 두 인물을 순영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순조롭게 성줏대를 찾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된 인물은 이물을 포함해서 총 다섯이다. 순영과 그의 언니, 성주신,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 “꿈에서 내가 또 혼자였어”라는 말로 시작하는 소설이기에 작품의 전반에 외로움을 심화하는 매개가 명확히 존재하는 것이 좋다. 고조되는 외로움의 감정이 있을 때, 그것을 해소하는 성주신의 존재가 강조된다. 순영이 회사에서 나오는 장면은 쓸쓸함보다는 허탈함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순영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언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언니는 ‘홀로’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듯하다. 그 이유를 작품 안에서 밝혀주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중요하다. 설정을 단단히 하면 이야기가 더욱 곧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순영이 아는 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언니’의 캐릭터는 다양하게 잡힐 수 있다. 속으로는 곪은 게 많지만, 순영을 위해 참고 견디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것이 폭발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언니의 속을 긁어댄 요소는 무엇일까. 언니의 죽음은 어째서 외로워야 했을까. 순영은 아마 언니에게 많은 것을 의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언니의 죽음은 그러므로 순영의 마음에 커다란 공간을 만든다. 이런 식으로 ‘외로움’이라는 키워드의 곁가지로 언니의 캐릭터를 뻗어가 보면 소설의 초반을 채울 수 있는 소재가 툭툭 튀어나올 수 있다.
작품의 길이와 중심이 되는 인물의 전사를 진중한 필체로 찬찬히 늘려가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초반부의 중심은 ‘순영의 언니’에게 주어진다. 그렇다면 후반부의 무게는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그 답은 ‘남자아이와 그 어머니’에 있다. 순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 둘은 귀신일 것이라는 암시가 작품의 후반에 등장한다. 이 결말을 좀 더 극적으로 바꾼다면 어떨까. 전혀 두 인물이 수상하다는 암시가 없이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심지어 아이는 음침한 곳 없이 해맑다면, 결말의 반전은 확실해질 수 있다. “그들에게 그림자가 있었던가?”라는 순영의 말에서 독자들이 오싹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반전이 필요하다.
아이와 엄마에 대한 전사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다. 혹시나 연작인 〈처마 밑의 지킴이〉가 둘의 전사이지 않을까 싶어 읽었지만, 대체로 순영의 이야기였다. (〈성주〉가 〈처마 밑의 지킴이〉보다 뒤쪽의 시간대를 다루는 것 같아 그렇게 예상했다. 만약 〈처마 밑의 지킴이〉에 나오는 인물 중 〈성주〉의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있다면 두 이야기의 관계를 좀 더 면밀하게 할 필요가 있다) 남자아이와 아이의 엄마는 ‘인간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신비한 인물로 보였다. 그렇기에 이 두 캐릭터를 잘 잡는다면 후반부의 무게가 적당히 잡힐 수 있을 것이다. 결말 역시 다채롭게 변할 수 있다.
중요한 키워드는 ‘귀신’과 ‘부재’, 그리고 ‘채워짐’이다. 작가는 자신이 가장 자유롭게, 그리고 매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귀신’이라는 소재를 들어 순영의 인생 단면을 조명한다. ‘신’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짜내는 작가의 글에서는 즐거움이 느껴진다. 창작자의 즐거움은 독자에게도 전해지기 마련이다. 〈성주〉는 작가가 신화적인 이야기, 특히 동양의 가택신에 얽힌 민간신앙을 어떻게 스토리텔링과 문학으로 풀어내는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아주 확실하고도 재미있는 방법으로.
순영은 성줏대를 찾아 성주신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으스스한 기운의 남자아이와 대화를 나누던 중 잠에 빠진다. 다시 깨어난 순영은 모종의 변화를 느낀다. “이제 그는 혼자이되 혼자가 아니었다”라는 말은 순영에게 성주신이 함께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순영은 소리 내어 웃는다. ‘든든해서’ 나오는 웃음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부재로 만들어진 공허는 다른 존재로 채워진다. 부탁을 들어주는 과정을 이용해 작가는 독자의 마음에 작은 채워짐을 선물한다.
간혹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 때, 그리고 마음의 지지대가 사라졌을 때 이 소설이 생각날 것 같다. 작게 비나이다, 읊조려서 천지신명의 힘을 빌려야만 다음 걸음을 뗄 수 있을 때. 배우 마동석 같은 근육질의 성주신이 아니더라도 잔잔한 울림을 줄 수 있는 기이한 친구가 필요할 때 이 소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지금 그런 공허에 사로잡혔다면, 이 든든한 성주신을 만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