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니스트>(2003)의 스핀오프입니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윌로우엘름’ 중위의 이야기이고요. 소설의 결말이 영화의 결말에 자연스럽게 맞닿으며 페이드 아웃됩니다. 그러니까 원작 영화와 이 이야기는 도착점은 같지만 인물이 지나는 심리적 경로가 정반대인 구조를 갖고 있는 거죠. 전체적으로 익숙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엇갈리는 주변 풍경의 온도차는 이런 전략이 매우 유효했음을 방증합니다.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벌써 짐작하셨겠죠. 맞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이건 ‘호젠펠트’의 이야기예요. 영화에서 내내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슈필만’이 결말부에 마주친 바로 그 ‘착한 군인’이죠. 그런데 이 인물을 그저 착하다는 수식어 하나로 눙치기는 많이 아쉬워요. 잔혹한 학살의 도구로 살기를 거부했던 이들이 마냥 착하기만 해서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닐 테니까요. 전쟁과 광기의 극한에서마저 인간으로 남기를 택한 이들에게는 저마다 긴 사연과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로 주목해야 할 이야기도 이렇듯 알려지지 않은 이들 사이에 숨어있을지 모르죠. 실제로 비슷한 주제의식을 반영한 작품들이 최근에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덩케르크>(2017), <저니스 엔드>(2018), <1917>(2020)과 같은 작품들이 그렇죠.
윌로우엘름 중위는 교사일 때 힘들어하던 제자 ‘모나’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기억을 아프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소외된 모나에게 먼저 다가가 도와주겠다 약속했던 윌로우엘름은 결정적 순간에 가해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모나를 지키는 데 실패하고 맙니다. 교장은 윌로우엘름이 모나만 편애한다며 여러 사람 앞에서 요란하게 질책하고, 이후 모나는 교실 창문 밖으로 스스로 뛰어내립니다. 윌로우엘름은 ‘그런 일까지 책임질 수는 없지 않느냐’는 교장의 위로에 허탈한 거부감을 느끼죠.
나는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 나는 모나의 선택 이전에 내 말을 책임져야 했다고 생각해. 그러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애한테 희망을 안겨준 다음 다시 빼앗았다고 탓해도 되지 않을까. 그게 당신에게 더 이득이지 않을까. 그때는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왜 지금은 마음을 잘 추스르라고 달래는 거지. 같은 장소, 같은 사람, 같은 생각. 변한 거 하나 없는데. 나는 멍하니 의문했고, 머지않아 답을 찾았다. 아, 내가 당신과 한편이구나.
중요하고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약자를 도울 수 있는 지위를 가졌음에도 결국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과거는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니까요. 윌로우엘름은 주둔군 장교로서 현지 거주민을 심문하고 필요에 따라 처분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옳은 일을 할 각오만 되어 있다면, 그 제한적 권력을 이용해서 무고한 이웃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것이죠. 하지만 윌로우엘름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가 꽤 양심적인 교사였음에도 끝내 모나를 구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골 채소 가게 주인 ‘요아힘’을 홀로코스트의 위협에서 구해내는 데 있어서 그의 인도적인 성품은 그리 쓸만한 게 못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요아힘이 무사하기만을 기도하는 것뿐이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교사든 군인이든, 평범한 직업인이자 생활인으로서 지탱해야 하는 일상이 있었을 테고, 무엇보다 그들 자신의 생명도 소중하니까요. 같은 이유로, 윌로우엘름이 운 좋게 후방에 배치되어 홀로코스트에 적극 가담하지 않을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도 개인 차원에서는 모두 이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용서되는 건 아닙니다. 그건 윌로우엘름 본인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죠.
나는 모나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어본 아마도 첫 번째 사람이었지만 결국 내가 보인 성의도 거기까지였다. 나는 고작 호통도 넘어서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라 모나와 더 함께 하지 못했다. 비겁해서, ‘도와줄까?’라는 말을 끝까지 책임지는 대신 그 애를 지나친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어쩌면 세상이 요지경인 건 다들 나 같아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때 교장과 학부모가 무서워서 멈췄고, 지금은 총살, 수용소, 고문 같은 게 두려워서 손 놓고 있듯이, 다른 사람들도 그랬을지도.
이야기의 후반부에는 한 세계를 뒤덮는 참극이 그럭저럭 선한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어가는 메커니즘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앞으로 나서야 할 때 도리어 물러났던, 사소하고 어쩔 수 없게만 여겨졌던 뒷걸음들이 쌓이고 쌓여 종국에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적 비극을 빚어낸 거죠. 그때 간신히 기득권에 들어가 침묵하고 외면하고 순응했던 이들이 작게라도 용기를 보태어 스스로 옳다고 믿었던 행동에 나섰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상은 또다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약자는 어느 사회에나 반드시 존재하니까요. 적어도 선한 표정을 짓고 혐오에 동참하는 기만은 다시 저지르지 말아야겠죠.
(다 쓰고 보니 영화 속 호젠펠트에게 왠지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영화의 결말을 그대로 따른다면, 윌로우엘름에게도 똑같이 미안해해야겠죠. 시대의 비극 한복판에 내던져진 것까지 그의 책임일 수는 없고, 와중에 그의 인도적인 결정으로 생명을 구한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전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 특정 인물을 맥락에 관계없이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을 읽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한나 렌의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2020)을 읽었어요. 두 작품 모두 인간의 실존을 고민하고 인물의 내면에 흐르던 중요한 정체성―또는 자아 이미지―을 스스로 부서뜨린다는 점에서 반가운 기시감과 깊은 여운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가능하다면 다른 독자에게도 두 작품을 함께 읽기를 권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