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라는 원형 의식” 감상

대상작품: 인어학 개론 (작가: 비티, 작품정보)
리뷰어: 이외, 1시간 전, 조회 16

인류란 무엇인가?

문명을 휩쓸 대홍수를 상상하거나 예감한 적이 있는가? 애석하게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그 시대의 주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홍수 이후의 인류를 떠올려 보겠는가? 멸종 이후의 문명을 말이다. 무기질적인 건물이나 도시, 숱하게 인류를 위협해 온 기계는 잠시 내려두자.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든 5천 7백만년 후 인류의 미래를 심려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려깊음이 독자를 “지느러미가 달린 삶” 앞으로 이끌었으니, 인어학을 꿈꾸는 이라면 응당 고양된 마음으로 개론서를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또한 “문명 멸종과 함께 출현한 수많은 인류종”의 미래격 생존자이니 말이다.

 

“문명 멸종”

문명 멸종. 우리는 이 시기를 벌써 알고 있다. 숱하게 경고되어 온 시기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미래는, 이 ‘그럴듯한’ 예언은 어디까지 구체적일 수 있겠는가. 소설이 본래 그러하지만 SF는 특히 ‘있을 법한 일’을 그려내는 장르다. 인류를 향해 들이닥치는 종 차원의 위협은 시간이 흐름에따라 분명하게 가시화되고 있다.

인류와 인어의 분기는 “5천만년 전, 고인류가 고층 건물을 짓던 시절”에 일어난다. 그때부터 고인류와 고인어는 병렬적으로 각자의 문화를 일궈내기 시작한다. 고인류는 일종의 과도기적 인류로, “고인류의 문화를 보존하는 해상 인류”이나 잠수에 유리한 인류를 말한다. 그렇다면 인어는 언제 인어가 되는가. “해상 인류로부터 해양 인류가 분기해나온 것은” 지질학적 사건이 일어난 이후다. 그리고 “거주지 경쟁에서 패배”해 “차가운 바다로 급상”하게 된다.

그동안 인류는,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생태 피라미드의 최상단에 군림하며 ‘다른 종’에게 위협을 받아본 적도, 발전해야만 할 이유를 찾은 적도 없었다. 우리의 적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었으며 이는 곧 정체를 의미한다고 말해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 즉 인류와 인어의 분기 이후로 인류는 모순적이게도 발전한다. “해양 인류는 처음 불을 사용하지 않는 도구를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역이 크게 확장”된다.

그렇게 바다가 ‘인류’에게 열린다.

 

신화, 그리고 전승

더 나아가기 전에 독자에게 한 가지 짚어두고 싶은 점이 있다. ‘왜 이 내용을 알아야 하는가’ 내지 ‘왜 이것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지루한 의문이다. 그런 의문에 진부하게 답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대신 독자의 의문 자체가 글의 목적임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이 점을 기억해두고 인어의 신화에 대해 알아보자. 신화라, 익숙하지 않은가? 다시 우리와 인어의 접점이 생긴다. 거부할 수 없는 접점 말이다. “바다 신화” 즉 원시 해양 신앙의 시초가 언어적, 도구의 문양적 차이로 구분됨으로써 서로의 권역을 가지게 된 문화 간 접촉이자,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화적, 언어적 실험”이라는 점은 시간을 들여 검토할 만 하다.

개론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수중 생활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호모 인더스는 시나 해양 문화를 영유하던 모 집단에 의해 멸종되어, 호모 사피엔스 인더스와 호모 사피엔스 알레스카가 접촉할 여지를 없애버리지만, 동시에 이주라는 역사적 경험이 신화화하여 고래를 신격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덧붙여 나의 얕은 신화적 지식에 대해 고백해야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위 인용만큼은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와닿는다. 고래를 신격화한다고 했다. 고래란 무엇인가? 미국의 비영리 단체인 ‘바이오미미크리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오픈 액세스 온라인 라이브러리 AskNature에 의하면 고래는 생존을 위해 계절에 따라 먹이가 풍부한 극지방과 따뜻한 번식지 사이를 매년 수천 킬로미터 이주하는 동물이다. 이들의 거대한 이동 경로는 바다 전체의 해양 생태계를 연결하며 영양소를 순환시키는 핵심 역할을 한다.

여기서 읽히는 것은 ‘역사적 경험이 신화화’했다는 사실 외에도, 고래에 대한 지식이 전승되었다는 점, 그것을 신화화했다는 점, 즉 종 이상의 차이가 발생했음에도 습성은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모습이어도, 어떤 생활 양식을 가졌어도, 어느 곳에 살고 있어도 인류는 (광의의 의미에서)인류다.

이 고래신화는 “단일 고래신을 바탕으로 거대한 공동체를 구성”하게 된 “호모 시레나”로 이어진다. 기존 신격이 고래화하여 거대신으로 합치되는 과정은 익숙한 역사를 불러낸다. 이러한 해설은 독자의 즐거움을 선취하는 무례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의 반복은 내게 한가지 인식으로 이어진다.

 

“다리라는 원형 의식

“지느러미가 달린 삶”을 꿈꾸던 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어떻게 자라났을 것인가. 어디에서 만나 이 개론서 앞에 설 수 있었을 것인가.

두 다리 대신 지느러미가 달린 삶을 동경하던 이들이 어느덧 학자가 되었다.

“땅 박차기보다는 바다를 헤엄치고 싶을” 인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라는 한계에 갇혀 인어의 역사를 살폈다. 이 글을 개인적으로 전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공교롭게도 이 리뷰를 쓰는 하루 전날인 2026년 6월 13일은 서울 퀴어퍼레이드가 있었던 날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는 ‘오늘’과 ‘어제’를 함께 생각하게 된다.

인류로 태어났다면 인류다. 인어로 태어났다면 인어다. 아무리 인류가 인어와 분화된 역사가 길고 복잡하며 이제는 완전히 다른 종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인류는 인어와 다르다. 그렇다면 이 개론서를 읽는 이들은 어째서 “두 다리 대신 지느러미가 달린 삶을 동경”하는가.

이 작품의 서론은 동료 학자에게 보이는 신뢰이자,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바치는 당부의 말이다. 갈라져나온 듯 해도, 인어를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생물학적 이해를 요구”하게 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지느러미를 동경하게 될 것이라고. 다리라는 원형 의식을 뿌리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인어학이라는 지느러미로, 인류는 다시 인어와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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