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아이돌이라고 하여 아이돌 가수가 등장하는 이야기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아니더라구요. 대신 모두의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그리고 아이돌 자체는 우상이라는 의미를 가지죠. 이를 치환해서 흩어진 우상이라고 해석하니 또한 의미 심장 합니다.
먼저 모두의 아이돌이라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마 주로 서브컬쳐에서 많이 보이는, 학급의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인물들은 대개 모두에게 친절하고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들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그 친절은 소외된 이들에게도 평등하게 다가가죠. 그리고 이 친절로 말미암아 다소 맹목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일부가 5명의 인물들에게서도 사뭇 보이는 듯 합니다.
이런 유사한 개념이 서브컬쳐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면 지배적인 이미지의 ‘아이돌’이 등장합니다. 반 아이들이 석대를 거의 우상처럼 따르는 모습을 보이죠.
이런 맥락들은 사뭇 사회적인 흐름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대체로 위의 상황은 학교를 중심으로 풀어내는 경우가 많고,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니까요. 그리고 일반적이라면, 흩어진 아이돌 내의 상황 만을 비추어보면 아이돌을 독점하기 위한 광기의 사이코 드라마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여기서 흩어진 우상으로 다시 독해를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5명 – 작중에서는 4명 -이 사랑하는 인물은 ‘신이’라는 인물입니다. 아마 이 단어 자체는 굉장히 단순하고 분명한 의미를 보여준다고 봅니다. 네. 신입니다. 하지만 이 인물을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불투명하게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분위기가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하면서 공포를 강조하게 되죠.
이 공포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앞에서 말한 희망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작품에서 묘사하는 희망이란 되게 공허하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처절할 정도로 처연합니다. 사회의 밑바닥 자체를 반영하는 듯한 네 인물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 분위기가 상당히 강력하게 느껴지죠. 이 출구 없는 고통 속에서 희망은 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임과 동시에 이 고통스러운 연옥(!)에서 구제 없이 살아야 하는 암담함을 이중적으로 제시합니다. 신은 이들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켜만 볼 뿐이지요.
이 지점에서 명진이라는 인물을 좀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명진은 교회로 가정이 풍비박산 났으나, 결국은 다시 교회로 돌아온 인물입니다. 그리고 몸이 꽤 많이 상했는데, 이 이유를 신을 배반 해서라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배반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나 신은 이들은 구제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카니발의 시작을 알리는, ‘신이’를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명진 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신이에게 희망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신이는 정말로 신일까요?
십계명에서 살펴 보면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모양을 본 떠 만든 어떤 것도 허용치 않는다는 의미는, 어떤 모습도 띄지 않는 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신이’는 아이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현혹하고 아이들은 이를 숭배합니다. 뚜렷한 모양을 갖는 다는 점에서 ‘신이’는 아무래도 신 보다는 우상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4인방은 이미 십계명을 어김으로써 이미 원죄를 지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고통받는 현실은, 구원 받을 수 없는 죄로 인하여 연옥이 됩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신이’에 대해 서로 교류한 순간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연옥에 빠진 죄인에게 구원의 티켓은 한 사람에게만 허용된 듯합니다. 이 지점에서 카니발이 시작됩니다.
최기숙 교수님은 장르적인 공포에 대해 ‘지배하지 못한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불안과 위협을 통해 경험된다.’라고 설명합니다. 4인방이 지배하지 못한, 그리고 우리들이 지배하지 못한, 모호한 영역에서의 ‘신이’는 그 불명확성으로 인해 공포의 단초가 됩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신이의 구원을 받는다면 이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신이는 단지 이야기할 뿐입니다. 나중에 더 나아질 수 있다고. 그저 공허한 이야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연옥에서 끝없이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이의 구원조차 약속되지 않았기에 이 소설은 광기에 가득 차게 됩니다.
이 광기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공포스럽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이는 한없이 모호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구원을 약속한 담지자로써, 죄인에게 선언합니다. 자신을 믿지 않을 수가 있냐고. 너희의 죄는 사해질 수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