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생각, 그리고 죽음을 마주치는 일은 사람에게 강력한 변화를 촉구하기도 합니다. 죽음을 딛고 밝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혹은 죽음을 품고 애도하는 삶을 살 수도 있겠죠.
“어슴푸레한 푸른색이 병실을 짓누르고 있었고, 비스듬이 벌어진 문 밖으로 노란색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문장은 화자가 이 경계선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푸른색이라는 음기와 노란색이라는 양기 사이에서 주인공은 죽음의 방문을 관찰하게 됩니다. 그 죽음이 닥쳐온 순간 노란색의 세계로 나가 누군가를 부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서 그에게 의지할 수도 있겠지만, 주인공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저 죽음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그렇게 죽음을 마주치고 죽음은 어머니를 데리고 떠나갑니다. 이 태도에 대한 부분을 다음의 묘사에서도 한번 더 찾을 수 있습니다.
“꽃 사이에 파묻힌 어머니는 싱그러웠다. –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아팠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살아있는 어머니를 본 것 같았다.”
죽음과 함께 떠나간 어머니의 잔해를 주인공은 싱그럽다고 말합니다. 죽어서야 싱그러움을 남긴 어머니의 흔적은, 기계적으로 인사하는 주인공의 태도와 사뭇 대조 되면서도 비장한 느낌을 줍니다. 주인공은 울거나 슬퍼하지 않으며 그저 담담하게 죽음을 대합니다. 추후에 울기는 하지만, 지금은 울지 않습니다. 그 것이 죽음을 처음으로 마주한 소년의 태도라는 점에 주목해주십시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난 후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보육원에 맡겨 버립니다. 사실 이 부분은 문의 경계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마지막 죽음을 아버지를 부르지 않고 혼자 맞이한 주인공이기에, 주인공은 홀로 죽음을 품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여기서 죽음은 어머니의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죽음들을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자로써의 의미지요. 아무튼, 노란색 세계에 있던 아버지와 파란색 세계에 있던 아들은 서로 상종할 수 없는 세계에 있으니까요. 아버지는 죽음을 딛고 새 삶을 살아가겠지만, 주인공은 어머니의 기억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육원 첫날, 주인공은 웁니다. 화장실에서 숨죽여 흐느껴 울지만, 정작 이 감정이 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연하지요. 주인공이 너무 어려서 일 수도 있겠지만, 이 울음은 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버려진 서러움과 어머니에 대한 죽음의 슬픔일 수도 있겠지만, 첫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유년과 작별을 고하는 통과 의례로써의 울음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이제 죽음을 품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니까요. 일종의 이니시에이션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주인공이 이 죽음을 품기로 결정했기에, 주인공은 입양과 파양을 반복하면서 융화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애도자로써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그저 지켜보고 살아갈 따름이죠. 네. 살아간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억은 서사로써 차곡차곡 쌓여 뇌에 저장됩니다.
죽음을 보는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죽음을 막고 히어로처럼 활동하지 않는 것은 이렇듯 애도자라서 그렇습니다. 한번의 일탈을 했음에도 결국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며, 주인공은 슬퍼하기보다는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프란시스 잠의 고통에 대한 노래가 떠오릅니다. 고통이 끝나지 않아 존경하고 사랑하기에 이른 그의 말대로, 고통을 살짝 죽음으로 치환해도 아름답게 융화되지 않나요?
그렇기에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담담합니다. 죽음을 품고 애도자로써 사는 인물이기에, 자신에게 닥친 죽음이 편안하고 존경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죽음을 친구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에 걸친 죽음을 마주한, 애도자로써의 자신의 목소리로.